〈 337화 〉 동아리 시간
* * *
송선우랑 함께 소강당을 향해 걸었다. 송선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이 자연스레 흔들리면서 송선우의 오른손 중지랑 엄지에 붙들린 a4 용지 대본이 놀이공원 바이킹처럼 스윙했다.
“이거 대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랬지.”
송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되게 슬픈 드라마 아니야? 좀 옛날 거고.”
“맞아. 근데 이거는 리메이크된 거라서 좀 최근에 나왔을걸. 내가 알기로.”
“으응.”
문이 열려 있는 소강당에 들어갔다. 안을 빠르게 훑었는데 서예은은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있던 1학년 여자애들이 나랑 송선우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반가운 기색을 뗬다.
““안녕하세요오!””
송선우가 웃으면서 마주 오른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도 눈웃음 짓고 입을 열었다.
“안녕.”
붙임성 있는 여자애 한 명이 내 앞으로 도도도 다가왔다. 이름이 김예빈이었나.
“오빠 진짜 오랜만이에요.”
“나도 너 오랜만에 보네.”
“헤. 네.”
언제 봐도 잘 웃는 애였다. 긍정적인 기운이 넘쳐났다. 나랑은 다소 반대되는 느낌이어서 살짝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오빠 강사님으로 서예은 배우 오는 거 알죠?”
“응, 들었어.”
“그럼 오늘 연기해보실 생각 있으세요?”
“음? 원래 하던 사람이 계속 이어서 하는 거 아니야?”
“어... 제 생각에는 그냥 배우님이 적절한 사람 집어서 하시는 거 같아요. 그니까 오빠가 좀만 어필하시면 지목될 거예요.”
멋쩍게 웃었다.
“느닷없이 자기 어필은 좀 어려울 거 같은데.”
“아, 그럼 제가 대신 오빠 어필해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넵! 가만히 있을게요.”
“응. 고마워.”
김예빈이 헤헤 웃었다.
“네.”
눈웃음 짓고 송선우를 바라봤다. 송선우는 팔짱을 끼고 따스하지만은 않은 눈으로 김예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가락으로 송선우의 오른팔을 찔러볼까 했는데 너무 가까워 보이는 거 아닐까 싶어서 왼팔 팔꿈치로 송선우의 오른팔을 톡 쳤다. 송선우가 그제야 나랑 눈을 마주치고는 단상에 가까운 앞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 송선우 오른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강사는 언제 와?”
송선우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쳐다봤다.
“보통 종 치기 전에 들어오던데? 시간은 잘 맞춰.”
“으응.”
그때 밖에서 1학년 여자애 하나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다른 여자애들이 있는 자리에 끼어 앉았다.
“지금 오고 있어...!”
대놓고 설레하는 게 느낌이 풋풋했다. 픽 웃음이 나왔다. 두 번이나 봤을 건데 아직도 가슴 떨리는 걸까. 그래도 강사가 서예은이니 저렇게 반응하는 게 이해가 되기는 했다. 스크린이나 유튜브에서만 보던 사람이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모자라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춰주는 것이니 매번 설렐 만도 했다.
다들 닫혀 있는 앞문 쪽을 바라봐서 따라 시선을 앞문 쪽에 보냈다. 이윽고 앞문이 열리고, 하얀 폴로 티셔츠에 색이 진한 청바지를 입고 회색빛 니트 가디건을 걸친 서예은이 들어왔다. 진짜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내가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 작고, 이목구비 오밀조밀하고. 그러면서도 키는 커서 옷맵시도 잘 살고 시원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갖고 있던 인상이랑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화면 밖의 서예은은 청순하다기보다는 차분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는 거였다. 강아지상보다는 고양이상 느낌이고.
“안녕하세요!”
김예빈 목소리였다. 서예은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눈웃음 지으면서 응, 이라고 했다. 다른 애들도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목소리를 던지듯 인사했다.
“그래, 안녕. 일주일만이네 얘들아.”
목소리가 깨끗했다. 은근히 포근하면서도 가라앉은 느낌이 있어서 안정감이 들 정도였다. 밝고 청순한 모습을 연기하는 톤이랑은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어색하다거나 나쁘다는 감이 없었다. 노래할 때 톤이랑 약간 비슷해서 그런 건가? 아마 그럴 것 같았다.
“맞아요!”
김예빈이 답했다.
“저 진짜 일주일 동안 지금 시간만 기다렸어요.”
서예은이 미소 지은 채 단상에 걸어가 중심에 서고 우리의 면면을 바라봤다.
“나도 일주일 동안 오늘 언제 오나 하고 기다렸어. 요즘 하는 게 없어서 그런가 시간 되게 느리게 흘러 가지고 너희 보는 거만 기다리게 되더라.”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소리 높여 환호했다. 거의 비명이랑 비슷했다. 서예은이 빙긋 웃으며 잠시 듣다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그만해줘도 돼. 너희 목 상해.”
“저희 목 건강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언니!”
1학년 여자애 한 명이 소리 지르듯 말했다. 적응이 안 되게 텐션이 좋았다.
“어, 나 언제 네 언니 된 거야?”
“아, 죄송해요. 흥분해버렸어요.”
서예은이 눈웃음 지었다.
“괜찮아. 언니라고 불러도 돼. 너희 다.”
여자애들이 다시 환호했다.
“저도 언니라고 해도 돼요?”
어떤 남자애가 말했다. 서예은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남잔데? 언니라고 하고 싶어?”
“네!”
“어, 맘대로 해.”
“감사합니다 언니!”
애들이 즐거운 듯 웃었다. 누군가 언니, 언니, 하고 연호하기 시작하자 다들 따라했다. 언니를 외치는 소리가 쭉 이어졌다. 서예은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 이제 시작해야지.”
“앗, 네!”
김예빈이 답했다. 이내 연호 소리가 잦아들었다. 서예은이 소리 없이 웃었다.
“나 1년 동안 들을 언니 소리 방금 다 들은 거 같아.”
“일주일마다 말해드릴 테니까 계속 와주세요 언니.”
“생각해볼게.”
와, 하고 환호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문득 서예은은 팬들에게 항상 이런 반응을 받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이면 사람들이 나를 되게 좋아해 주는구나 하고 행복한 마음이 들 것 같아도, 매번 이런 식으로 하이 텐션으로 반긴다면 피곤할 듯싶은데. 조금은 짜증도 날 수 있을 것 같고. 근데 어떻게 항상 미소를 유지하고 볼 수 있는 걸까. 배우에 가수인 서예은도 남들이랑 같은 사람인데. 인형처럼 보기 좋은 모습만을 유지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환호 소리가 사그라졌다. 서예은이 반 안을 둘러보다가 나랑 눈을 마주쳤다. 서예은이 왼눈을 치켜떴다. 왠지 눈빛에 싸늘함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부 여기 맞아?”
“네, 맞아요.”
“근데 왜 저번이랑 저저번 시간에는 안 보였어?”
“저... 정학으로 잠깐 학교 못 나와서요.”
“아, 그래. 이름이 이온유 맞지?”
“네... 어떻게 아세요?”
“내 동생이 얘기해서. 밴드부장이라며.”
“네.”
“응, 그래 가지고 알아. 유은이가영상 하나 틀어서 들려줬는데 노래 되게 잘 부르더라.”
멋쩍게 웃었다. 왠지 의례적으로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응.”
서예은이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제 시작하자. 저번에 했던 거 있지, 그때 나온 사람들 나와. 누구 말하는지 본인들이 다 알지?”
“네.”
송선우가 답을 하고는 대본을 나한테 건네줬다. 눈을 크게 떴다. 송선우가 살폿 웃고는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나 다 외웠어, 라고 한 듯했다. 대본을 슬쩍 내려봤는데 직접 필기해넣은 디테일이 적혀 있었다. 여러 번 봤다는 티가 확실히 났다. 진짜로 외운 모양이었다.
송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걸어갔다. 김예빈도 일어나고는 단상으로 가 섰다.
서예은이 대본을 스윽 훑고 송선우랑 김예빈을 바라봤다.
“선우, 너 대본 어딨어?”
“저 다 외웠어요.”
“으응. 그래?”
서예은의 눈이 휘어졌다.
“좋아. 그럼 선우는 대본 없이 하는 거로 하고, 양순이 입장하는 거부터 마임하면서 해보자.”
“넵...”
김예빈이 답했다.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송선우가 바닥에 풀썩 앉았다. 행동은 돌발적이었는데 행색은 자연스러웠다. 뭐 밑에 깔아놓은 것도 없는데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앉는다니. 놀라웠다.
서예은이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치고 오른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송선우를 바라봤다. 눈을 살짝 찡그린 게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시작하자.”
송선우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서예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송선우가 다시 정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리깐 뒤 마임을 시작했다. 뭔가 얇은 걸 양손으로 쥐고 쌓아 올리는 느낌이었다. 송선우가 준 대본을 확인했다. 인희 통장을 상자에 정리한다. 이 부분인 듯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단상을 봤다. 김예빈이 마임을 해 문을 여는 시늉을 하고, 앉아 있는 인희를 바라보고는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는다.
“부르셨어요...”
살짝 발음이 흐렸다. 약간 우울하고 위축된 느낌을 표현한 건가 싶었다.
“음, 잠깐.”
서예은이 말했다. 김예빈이 고개를 돌려 서예은을 바라봤다.
“네...?”
“방금 목소리 톤은 나쁘지 않았거든? 근데 발음이 뭉개졌어. 대사 전달은 기본이야. 내용이 전달이 안 되면 관객은 몰입을 아예 할 수 없어. 인물이 왜 그러는지가 이해가 안 되니까. 그러면 등장인물이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한 채 혼자 격앙되거나 슬퍼하게 되는데, 그때 관객들이 하는 생각은 어, 쟤 왜 저래, 이거야. 그 장면의 감정선이 기쁘든 웃기든 슬프든 다 흐트러지고 우스꽝스러워진다고.”
“네에...”
“네에, 하지 말고. 평소에 말 똑바로 하는 습관 들여. 배우 할 생각 있든 없든, 말을 바로 하는 연습을 해놓으면 어떻게든 도움이 돼. 기본적으로 말을 또박또박 바로 하면 신뢰감을 주게 되니까.”
“넵. 알겠습니다.”
“응. 다시 하자. 문 여는 거부터 바로.”
“넵.”
김예빈이 빳빳하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한숨을 푹 쉬었다.대본을 내려보는 김예빈의 표정이 바뀌었다.시한부인 시누이를 보러 가는,마음 따스한 올케 양순의 얼굴이었다.
서예은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기자들을 바라봤다. 눈빛이평소 서예은이 맡는 캐릭터가 보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아예차가움마저 묻어나서 내 심장이 다 떨렸다.자존감 높아 보이던 김예빈이 연기 시작 전에 살짝 굳은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가 이해됐다.대배우라고 할 수 있을 서예은이 저런 눈으로 연기를 보고 지적까지 한다면 긴장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선우는 김예빈처럼 연기를 지적받을까.부디 아니었으면 했다.
송선우, 아니 인희가 손을 더듬더듬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우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본을 봤다가 단상을 보기를 반복했다.
인희가 통장을 사각 종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을 때, 양순이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인희, 상자를 옆으로 밀고, 상자를 톡 친 뒤.
“여와 앉어.”
양순, 인희 앞으로 다가가 앉고.
인희 오른손으로 종이봉투를 들어 양순 앞에 내려놓는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
송선우는 대사부터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적어놓은 디테일까지 다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내 걱정은 기우였던 듯했다.
대본을 슬쩍 본 양순, 봉투를 보다가 고개를 들고 인희를 바라본다.
“왜 나보고 집에 가래요?”
인희 시선 피하며.
“근덕이 놔두고 여기서 살 거야?”
“하루걸러, 한 번씩 집에 가보잖아요.”
양순 두 눈 깜빡이며.
“그리고 요즘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
인희 여전히 시선 피하면서.
“가. 밀린 일이 태산일 텐데.”
양순이 바닥에 놓인 봉투를 인희 쪽으로 밀어낸다.
“간호비면 싫어요.”
잠시 침묵 후. 인희 입 연다.
“나 돈 없어. 돈 아니야. 뭔지는 집에 가서 보고, 가지고 가.”
양순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있으면 밥이라도 하는데.”
인희 계속 눈을 피하면서.
“나 연수가 해주는 밥 먹을래.”
대본 슬쩍 보고 인희 보는 양순, 울상 지으며 입을 우물거리다가.
“형님 옆에 있고 싶은데.”
“귀찮아. 내 옆에 사람 많아.”
양순 인희를 바라보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입술을 축 늘어뜨리고, 양손을 모아 손가락을 더듬거린다. 인희가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양순의 오른손을 잡는다. 양순이 아기가 자신의 손에 붙들리는 것을 꽉 붙잡듯 인희의 손을 부드럽게 쥔다.
인희, 슬픔에 북받치지만 참아내며, 하으, 하고 한숨을 흘린다.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천천히 올려 양순의 눈을 마주 바라본다.
“꼭... 우리 근덕이 옆에 있어... 그놈이 뭐라 그래도...”
인희 대사에 숨소리 섞으면서.
“어디 가지 말고... 꼭 옆에 있어...”
목메어 천천히 말한다.
“지놈이, 지금은, 젊어서... 힘이 넘쳐 꽥꽥 돼도... 늙어봐아... 올케한테 미안해서 잘할걸...?”
인희 고개 숙이고, 숨 한 번 들이마시며.
“울엄마 일찍 돌아가시고... 어린 내가 업어 키운 애야...”
인희 고개를 천천히 들면서.
“걔가, 엄마한테, 정을 못 받고 자라서 그렇지... 본성은, 그리 나쁜 애가 아니야...”
고개 숙이던 양순, 고개 살짝 들고, 목멘 소리로.
“알아요.”
양순 왼 소매로 인중을 슥슥 닦는다. 양순을 바라보는 측은한 눈빛의 인희.
“울지 마. 초상났어? 왜 울어.”
인희 고개 숙이고 봉투를 오른손에 쥔 뒤 왼손으로 양순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리고 이거.”
인희 양순의 오른손에 봉투를 내려놓고,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봉투 위로 오른손을 살포시 포개면서.
“근덕이하고, 올케만 아는 거야.”
양순 붉어진 눈시울로 인희를 바라본다. 하지만 시선을 차마 못 마주치는 인희.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인희 느리게 눈을 올려 양순을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 숙여 손을 내려본다.
“더 늦기 전에.”
인희 오른손을 봉투 위에 얹어 바스락 소리가 나도록 약하게 힘을 준다.
“가지고 가.”
인희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나 피곤해. 눕고 싶어.”
대본 보는 양순, 슬픈 듯 흐흐흡, 하고 콧소리를 내며.
“형니임...”
인희 몸을 천천히 돌리며 무릎을 움직이면서.
“나 잘래.”
인희 요에 천천히 엎어지듯 뉘려 한다.
양순 오른손에 든 봉투를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형니이임...”
인희 완전히 눕는다.
인희를 바라보는 양순 말없이 입만 우물거리다, 대본을 슬쩍 보고, 차오르는 슬픔을 막지 못해 큽, 하고 입술을 터트린다. 봉투를 내려봤다가 다시 인희의 등을 바라보고. 아무 말도 만들지 못한 채 그저 파르르 떨리는 양순의 입가. 묵묵한 인희의 뒷모습.
“좋아.”
서예은 목소리였다. 만족감이 묻어나는 게 느껴졌다.
“어때 예빈아.”
“아, 저...”
목이 멘 듯했다. 서예은이 살폿 웃었다.
“지금 말 안 나오지. 슬프고 목메서.”
김예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언니 말 그대로 되게 슬프고 목메서...”
“그래. 그거야, 캐릭터에 확실히 몰입하면 행동이나 대사 처리 같은 게 자연스럽게 돼. 이번엔 진짜 잘했어.”
서예은이 박수하기 시작하고는 고개를 돌려 단상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둘러봤다. 나도 고개를 두리번거렸는데, 감수성이 뛰어난 애 중에 눈시울을 붉힌 사람이 좀 있었다. 나도 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물이 흐르는 느낌은 안 나니 아예 눈물을 찔끔 흘린 애들보다는 낫다 싶었다.
서예은이 입을 열었다.
“얘들아, 박수 쳐줘야지 지금은.”
그제야 다들 박수했다. 서예은이 빙긋 웃고 잠시 박수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이만하면 된 거 같아.”
곧 박수 소리가 그쳤다. 서예은이 다시 고개를 돌려 단상 쪽을 봤다.
“선우는 연기를 되게 잘하네. 발음 좋고 감정 좋고. 톤 흠잡을 데 없고 시선 처리도 완벽하고. 그냥 진짜 현역 배우 같았어.”
송선우가 히히 웃었다.
서예은의 칭찬 폭격에 내가 다 뿌듯했다. 잘난 여자친구를 둔 남자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분수처럼 솟아올라서 등에 전류 같은 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서예은이 눈웃음 지었다.
“선우 너 저번에 배우할 생각 없다고 했었지?”
“네...”
“그럼 진짜 할 마음이 전혀 없는 거야?”
“글쎄요, 여태 배우라는 직업을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 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으응. 그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할 마음 조금이라도 있는 거 같다 싶으면 해. 너 재능있어. 연기 안 한다고 하면 아까울 정도로. 진심이야 이거는.”
송선우가 멋쩍게 웃었다.
“진짜 진지하게 네가 배우 된다고 하면 좀 도와줄 의향도 있어. 지금 여기에서 약속할게.”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아니 진짜로. 뭐 아무튼. 일단은 수업 진행해야 되니까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이따 말하거나 하자.”
“네.”
서예은이 고개를 주억였다.
“근데 너 연기 잘하게 된 계기 같은 거 뭐 있어?”
“아...”
송선우가 살폿 웃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최대한 일상적인 느낌으로 하려다 보니까 된 거 같아요.”
“맞아. 너무 의식하고 하면 안 돼. 내가 지금 연기한다고 생각을 박아넣고 하면 연기하는 거를 연기하는 것처럼 작위적으로 되니까.”
서예은이 말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선우랑 예빈이 수고했고, 지금은 들어가서 쉬어.”
“넵!”
“네.”
김예빈이랑 송선우가 단상을 내려왔다.
“얘들아 다시 박수.”
서예은이 말했다. 바로 박수했다. 박수 소리가 소강당을 메웠다.
송선우가 걸어왔다. 눈이 초롱초롱해진 여자애들이 송선우를 올려보면서 손을 뻗어 가로막듯이 했다.
“너 학원 같은 데서 연기 배웠어?”
“아 나 진짜 연기 좀만 더봤으면 울 뻔했잖아.”
“진짜 나도 울 뻔했어. 왤케 연기 잘 해 송선우?”
“언니 진짜 대박이었어요.”
“저 오늘부터 언니 팬해도 돼요? 아니 할래요.”
“언니 배우 해야 돼요.”
송선우가 멋쩍게 웃으면서 여자애들이 뻗어온 손을 맞잡으며 걸었다.
“아냐, 그냥 뽀록이었어.”
“에이, 대본 외웠으면서 뽀록이라고 하면 어떻게 믿어.”
“몰라. 초심자의 행운 그런 건 가봐. 나 빨리 갈래 창피해.”
“왜 창피해해. 진짜 잘했다니까?”
“근데 초심자의 행운 도박에서 쓰는 말 아냐 선우야?”
“아 몰라. 나 좀 보내줘. 진짜 부끄러워.”
“흐응. 알겠어.”
송선우가 여자애들에게서 빠져나오고 빠르게 달려와 내 왼편에 와 앉았다.
송선우의 입에 걸린 미소에서 흡족함이 묻어났다. 잔뜩 칭찬해주고 싶었다.
대본을 송선우에게 건네주면서 입을 열었다.
“너 연기 진짜 잘했어.”
송선우가 대본을 양손으로 받으며 눈웃음 지었다.
“고마워.”
절로 미소 지어졌다. 다른 애들이 보기에 서로 좋아하는 티가 나면 안 되니 웃음을 바로 지우고 시선을 단상으로 돌렸다.
서예은이 다른 애들을 호명했다. 남자 둘이랑 여자 하나가 빠릿빠릿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송선우가 오른손을 내 등 뒤로 해 검지로 간질였다. 뭔가 글자를 쓰는 듯했다. 너 덕분이야, 라고 쓴 것 같았다.
내 덕이라니. 무슨 의미일까. 잠시 머리를 굴려봤는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송선우는 십 년 넘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척 연기해왔으니 당연히 연기를 잘 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고개를 돌려 송선우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이해했어?”
목소리가 작았다. 딱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을 정도였다.
나도 목소리를 작게 내야 할 거였다. 음량을 의식하면서 입을 열고 최대한 조용히 성대를 울렸다.
“아마?”
송선우가 흐흫, 하고 아이처럼 웃었다.
선우도 배우가 된다면 AOU 엔터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한번 김민준 실장이나 백채영 대표한테 넌지시 얘기를 해봐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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