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 점심시간과 하굣길
* * *
점심을 먹어치우고 양치를 한 다음 밴드부실로 향했다. 운동장 쪽에서 서유은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도도도 달려왔다. 나한테 오는 게 맞는 거겠지? 일단 멈춰섰다. 서유은이 점차 속도를 줄이더니 내 앞에서 서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하아, 하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들숨 날숨을 반복할 때마다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는 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왜 유은아?”
“저, 하아, 하나 물어볼 거, 하, 있어서요.”
“뭔데?”
“하아...”
서유은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오빠 AOU 엔터에 사인했어요?”
“응. 근데 그거 누가 알려줬어?”
“그냥 소문처럼 귀에 들어와 가지고요...”
“으응.”
근데 내가 말한 사람이 지수랑 선우밖에 없던 거 같은데. 내가 AOU 엔터 들어간 걸 알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아, 정이슬이 있구나.
“그럼 부원들 다 그렇게 아는 거야? 나 AOU 엔터 사인했다고?”
“그럴걸요...?”
“그래. 근데 너도 들어올 생각 있어? AOU 엔터?”
“저 들어가면 좋을까요...?”
“난 좋지 뭐.”
서유은이 눈웃음 지었다.
“그래요?”
“응.”
“마침 저도 들어갈 생각 하고 있었어요.”
“응. 좋아. 재밌겠다, 같은 회사 되면 작업도 편하게 같이 할 수 있겠고.”
서유은이 히 웃었다.
“그러니까요.”
“그래도 일단 계약서 같은 거 봐서 잘 검토하고 고민한 담에 결정해.”
“그럴 거예요.”
“그래. 지금 밥 안 먹었지? 빨리 먹으러 가, 오늘 메뉴 맛있어.”
“네, 맛있게 먹고 올게요.”
“응.”
서유은이 양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질 쳤다.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서유은이 히 웃고 뒤돌아서 급식실을 향해 달렸다. 총총 뛰는 폼이 발랄한 게 토끼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기운이 긍정적이고 좋아서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을 애였다.
*
종례가 끝나고 가방에 도서실에서 빌린 책 두 권을 넣은 다음 등에 멨다. 이미 가방을 메고 있던 송선우랑 백지수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 지수야 선우야.”
송선우가 미소 지었다.
“응.”
“그래.”
백지수가 건조하게 답하고 반을 나섰다. 선우랑 곧장 뒤따라 반을 나갔다.
백지수가 내 왼편에 서고 송선우가 내 오른편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지수가 묵묵히 걷다가 정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집 갔다가 오는 거지?”
대상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일단 확실하지는 않지.”
통화나 문자를 할 때는 괜찮은 척한 거일지도 몰랐다. 만약 실제로 봤을 때 윤가영이 상태가 안 좋거나 하면 최소한 하루 정도는 곁에 붙어서 멘탈을 케어해줘야 했다.
“... 그래.”
“고마워.”
“됐어.”
백지수가 살짝 투덜대는 어조로 말했다. 너무 귀여웠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싫은 티도 내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어쩌면 지수는 불안해할지 모르는 사람을 챙기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내가 잠시 옆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것 말고는 그리 불만스럽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교문 앞에 강성연이 멈춰 서서 폰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백지수가 눈살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며 내가 반 발짝 정도 붙어서 걸었다.
강성연이 백지수를 흘깃 봤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고는 교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지수가 껄끄러운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른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문자라도 왔나. 걸어가면서 폰을 꺼내고 화면을 켜 확인했다. 강성연이 문자를 보낸 거였다.
[안 데려다줘도 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백지수가 살짝 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봤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응. 잘 가.]
그렇게 짧게 써서 전송하고 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진동이 연달아 울렸다. 백지수랑 송선우가 나를 쳐다봤다.
“뭔데 그렇게 많이 와?”
백지수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빨리 보고 알려주라.”
송선우가 말했다. 교문을 나서면서 폰을 꺼내고 확인했다. 강성연이 보내온 문자였다.
[어.]
[너도 잘 가.]
[내일 저녁에 오는 거 맞지?]
그냥 어, 라고 단답만 해도 됐을 건데. 예전의 강성연이었으면 아마 실제로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뭔가 시큰둥한 느낌도 벗고 가능한 한 부드러워지려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성연이가 바뀌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조금은 어색한 감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 날 서 있다는 느낌이 강했던 옛날이랑 비교하면 나쁜 변화는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빠르게 타이핑해서 전송을 눌렀다.
[응. 내일 보자 성연아.]
[그래.]
“누구야?”
송선우가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성연이.”
“성연이?”
백지수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성연이라고 한다고?”
“응. 나 원래 그랬는데?”
“내가 알기로는 아닌데. 너 평소에 강성연이라고 불렀어.”
“섞어서 쓰긴 했지. 뭐 아무튼. 나 답장만 좀 쓸게.”
“뭐라고 문자 보냈길래?”
“그냥 내일 저녁 먹으러 오는 거 맞냐고.”
“아니 갠 뭐 약속했으면 한 거지 그걸 또 묻네.”
송선우가 픽 웃고 백지수의 뒤로 가서 백지수를 껴안으며 뒤뚱뒤뚱 걸었다.
“이건 너무 억까다 지수야.”
“아 몰라 걔 맘에 안 들어. 요즘에 특히 더 이상해졌어.”
“난 요즘 성연이 귀엽던데. 이상하다고 말하려면 지금보다는 예전이 그런 거 같구.”
백지수가 송선우의 말을 듣고 콧숨을 내쉬었다.
“행동 같은 건 옛날이 더 이상하긴 한데, 요즘은 그냥 걔 이미지랑 좀 안 어울려. 안 맞는 옷 입는 패션 테러리스트 보는 느낌 나. 별로야 그냥.”
송선우가 킥킥 웃었다.
“진짜 너무했다 지금 발언은.”
“몰라. 너무했든 말든 말할 수도 있잖아. 표현의 자유도 있는데.”
“근데 상처 될 수 있는 말이잖아.”
“면전에서 안 했잖아. 그리고 나 걔한테 쌓인 거 좀 있어서 말한 거라 걔가 알아도 어차피 쌤쌤이야.”
“무슨 일 있었는데?”
“몰라도 돼.”
백지수가 나를 올려봤다.
“너는 요즘 강성연 괜찮아?”
“난 좀 어색하긴 한데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
“그치 온유야.”
송선우가 말했다. 백지수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나를 쳐다봤다. 네가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추궁의 뜻도 살짝 담겨 있는 듯했다. 선우랑 다르게 나는 강성연이 지수에게 카톡 고백을 하고 대차게 차인 이력이 있다는 걸 아니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낄 만도 한 것 같았다.
“넌 걔한테 안 좋은 감정 안 들어?”
백지수가 물었다.
“그냥 딱히 생각 없어.”
“... 너 뭐 해탈한 거 아냐?”
피식 웃었다.
“해탈 안 했어.”
해탈했다기에는 나는 너무 속인이었다. 번뇌도 많고, 자주 흔들리며, 육욕에 심취하기까지 했으니 죽어도 부처는 되지 못할 거였다.
“그럼 현자타임 온 거야?”
백지수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진지함을 더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 응. 맞는 거 같아. 현탐인가 봐.”
“흐응... 너는 상시 현자타임 가능할 거 같긴 해.”
송선우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소리 없이 웃었다. 바깥에서 이렇게 섹드립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남이 듣기에는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잘 안 들 것 같기는 했지만, 괜히 찔리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송선우가 자리에 멈춰 서고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택시는 불렀어?”
“내가 불렀어.”
백지수가 말했다. 송선우의 눈이 커졌다.
“오. 언제?”
“좀 됐어. 저거 같아. 아니 맞아.”
백지수가 이쪽으로 근접해오는 택시를 향해 걸어갔다. 송선우가 백지수의 왼편에 따라붙었다. 나도 빠르게 걸어서 백지수의 오른편에 따라붙었다. 백지수가 뒷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들어갔다. 송선우가 뒤따라 몸을 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송선우가 좌석에 앉고 나를 쳐다보며 양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선우야, 지수야.”
“응. 잘 가 온유야.”
송선우가 답했다.
“잘 가. 내일 봐.”
백지수가 오른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조는 높낮이가 없는데 왠지 애교스러운 느낌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봐.”
“어.”
“진짜 잘 가 온유야.”
“응.”
송선우가 흫, 하고 웃으며 문을 닫았다. 택시가 곧장 출발했다.
폰을 꺼내고 택시를 호출했다. 미리 불러놨어야 했는데 정신을 빼먹고 있었다.
성연이가 제안해줬을 때 강예린의 차를 탔으면 금방 집에 도착해서 빨리 윤가영을 보는 게 가능했을 텐데. 기회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지수나 선우가 문자라도 보냈나? 폰을 꺼내고 확인했다. 강성연이었다.
[너 택시 기다리고 있어?]
얘가 어디서 나 보고 있는 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에서 강성연이 왼팔을 번쩍 들고 왼손을 흔들고 있었다. 키가 작아서 오히려 눈에 더 띄는 느낌이었다. 성연이 쪽으로 느리게 걸어가면서 타이핑하고 전송했다.
[응. 너 왜 아직도 거깄어?]
[나 엄마 아직 안 와서. 택시 취소하고 같이 타고 가자.]
[그래도 돼?]
[100000% 가능, 씹가능.]
피식 웃었다. 택시를 취소하고 그대로 걸어가 성연이의 앞에 섰다.
강성연이 나를 올려봤다가 도로를 바라봤다. 얼마 안 가 강예린의 차가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면서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강예린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 온유야.”
“안녕하세요.”
강예린이 빙긋 웃었다. 꾸밈 없는 미소가 강예린을 어려 보이게 했다.
“빨리 타.”
“네.”
강성연이 뒷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고 차문을 닫았다. 강예린이 악셀을 밟았다.
몸이 뒤로 쏠리면서 등이 좌석에 달라붙었다. 시트가 좋아서 그런가, 느낌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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