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겁쟁이둘 오디션 (2)
* * *
“뭐 하는 거야 이게?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한테 러브 레터나 쓰고.”
답할 말이 궁했다. 이서은이 계속 나를 째려봤다. 어떻게든 변명해야 하는데. 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했던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거 진짜 내가 쓴 거 아니야.”
“계속 거짓말할래?”
“아니 진짜라니까.”
“하... 야.”
“... 응.”
“너 솔직하게 말 안 하면 정하윤한테 가서 너 사실 걔 좋아한다는 거 다 얘기한다?”
“아, 안 돼.”
“그럼 왜 러브 레터 넣었는지 말이나 해.”
“아니, 제발...”
머리가 하얬다. 정하윤한테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됐다. 그리되면 실은 정하윤을 좋아하는데도 그 마음을 전할 용기가 없어서 질투심 같은 거나 유발하려고 다른 애를 좋아하는 척을 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거였다. 내가 그렇게 치졸한 짓을 했다는 걸 알면 친구로서의 호감도 사라지고 말 거였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이서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서은이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질 치면서 오른손을 머리 뒤로 뺐다.
“어 이거 왜 이래? 오지 마.”
“알겠어.”
멈춰 서고 이서은의 앞에서 무릎 꿇은 다음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얹었다.
“제발 말하지 말아주라...”
이서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개 웃긴다 너.”
“맞아 나 웃기는 놈이야...”
이서은이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다가 손 부채질을 했다.
“아, 진짜 미쳤다. 너 갑자기 왜 그래?”
“하윤이한테 말 안 한다고 약속해줘...”
“내가 걔한테 말하면 안 돼? 너 사실 정하윤 좋아한다고?”
“안 되지 당연히...!”
이서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 언성 높여?”
“미안해.”
이서은이 히 웃고 러브 레터를 자기 마이 안 주머니에 넣었다.
“너 걔 좋아하면 왜 고백을 안 해?”
속이 답답했다.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 아니었다.
“... 이유가 있어. 되게 복잡하게.”
“흠. 그래?”
“응...”
“내 사물함에 러브 레터는 왜 넣은 거야?”
“...”
“너 말 안 하면 바로 정하윤한테 달려간다?”
“안 돼. 말할게.”
즉답하고 나서 내가 지금 단단히 약점 잡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은이 빙긋 웃었다.
“빨리 말해. 편하게.”
“응.”
“일단 일어서. 무릎 꿇고 있지 말고. 누가 올라와서 발견하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알겠어.”
자리에서 일어나고 무릎을 털었다. 이서은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다 털었으면 이제 말해.”
“... 응.”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안 해.”
“... 되게 우스울 수도 있는데 크게는 웃지 마.”
“알겠어. 걱정하지 마.”
이서은이 그리 말해놓고 곧장 살포시 웃었다.
“아니 근데 얼마나 우스우면 그런 얘기를 해?”
“아니 그냥,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래서.”
“그래. 말해봐.”
“응. ... 내가 원래 정하윤이랑 되게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거든.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 때부터. 옛날에는 그냥 친구 사이였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호감 생겨 가지고...”
“그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면 됐잖아.”
“그게 안 돼. 어려워.”
“으음. 그래. 이어서 말해.”
“... 내가 고백을 못 하는 게...”
“고백했다가 차이면 어색해질까 봐?”
“응. 맞아.”
이서은이 픽 웃었다.
“계속 말해.”
고개를 돌려 옥상 문을 한 번 보고 다시 이서은을 바라봤다.
“정하윤도 나한테 마음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내가 너한테 호감 있는 척하려고 걔한테 계속 너 언급했거든. 근데 반응이 되게 시큰둥해서 고백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단념하기 힘들어서, 진짜 좋아해서, 질투심 같은 거라도 일으켜보려고 정하윤한테 계속 어떡하면 너랑 사귈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그랬어. 그래서 정하윤이 어떻게 하라고 조언해주고 했고.”
“으응...”
이서은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네가 수업 시간에 나한테 톡 보내고 그랬던 거야?”
“응. 러브 레터 넣은 것도 정하윤이 그러라고 해서 그런 거야.”
“아...”
이서은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이서은이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웃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체온이 상승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 대박이다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안 해. 안 할게.”
“... 응.”
이서은이 나를 쳐다보면서 눈웃음 지었다.
“윤우야.”
“응.”
“그럼 너 정하윤이랑 사귀고 싶은 거잖아.”
“그치...?”
이서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악동이 재미있는 짓을 벌이기 전에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내가 네 러브 코치 돼줄게.”
뭔 소리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서은이 히히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두 손을 위로 들었다.
“하이파이브해요.”
“아.”
양손을 올려 정시은의 두 손에 작게 짝 소리가 나게 맞대었다.
고개를 돌려 객석을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눈이 보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 실감 났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와서 눈을 굴리다 오지윤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오지윤 감독은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온유 군.”
“네? 네.”
“이어서 한 장면 더 해볼래요?”
“네, 하겠습니다.”
정서아가 오지윤 감독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결정해도 돼요?”
“응, 마음대로 해.”
“네.”
정서아가 나를 바라봤다.
“저번에 여동생분 오디션 보러 왔을 때 같이 왔잖아요. 그때 본 오디션용 대본, 그 파트 찾아서 보여줄 수 있어요?”
“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손에 대본이 없는 이수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기 끝쪽으로 가자.”
“응. 너 대본 안 봐도 돼?”
“어. 이 부분은 외웠어.”
정시은이 오, 하고 감탄하면서 양손 엄지를 추켜세웠다.
“기억력 완전 좋으시네요.”
“고마워요. 오빠는 대본 필요해?”
“나도 외웠어. 마침 보고 온 데라.”
“와... 아, 두 분 다 잊기 전에 해야 되니까 저 빨리 빠질게요.”
정시은이 도도도 달려서 무대 밖으로 나갔다. 대본을 쥔 FD가 무대로 올라오려다 그대로 뒷걸음질했다.
“찔끔찔끔 걷자.”
이수아가 말했다.
“응. 일단 자리 바꾸자. 너 표정 보이게.”
“응.”
고개 돌려 오지윤 감독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바로 할게요.”
미소를 띠고 있는 오지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면 시작해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오른편에 정하윤이 서 있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 하굣길에서 정하윤과 느릿느릿 나란히 걸었다.
둘이 함께 걷는다는 점에서 평소랑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가 한 발짝 먼 느낌이었다. 이서은의 조언에 따르면서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던 것이 오히려 더 우리 사이를 멀게 한 걸까.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다 했는데. 얘는 진짜 나한테 아무 마음도 없는 걸까? 초조했다.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입을 열었다.
“걔가 나랑 영화 보재.”
정하윤이 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표정이 살짝 찡그려지는 게 느껴졌다. 오기가 들었다. 억지로 다시 얼굴을 폈다.
“그린라이트지? 이거.”
“그린라이트지.”
목소리가 살짝 퉁명스러웠다.
“나 걔한테 뭐라고 고백하면 돼?”
“뭐?”
정하윤이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주먹 쥐고 내 오른팔을 한 대 툭 쳤다.
“네가 그러니까 여태 여친이 없던 거야.”
“뭔 소리야 뜬금없이.”
“그 정도면 그냥 대충 사귀자고만 해도 돼.”
“아니 좀 로맨틱한 말들 있잖아.”
“아 그딴 거 좀 묻지 마. 나도 모솔이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하윤도 웃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야.”
정하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어?”
“우리 친구 그만할래?”
정적이 흘렀다. 왜 답을 안 하지. 가슴이 졸아들었다. 정하윤을 바라보면서 억지로 웃음 지었다.
“방금 멘트 어땠어?”
정하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고백 멘트야?”
“별로였어?”
“어. 진짜 별로니까 나 말고 딴 사람한테 그 멘트치지 마라.”
“알겠어.”
정하윤이 나를 바라보면서 멈춰섰다. 나도 멈췄다. 정하윤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이 귀여운 새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넘어갔구나. 안심됐다.
정하윤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볍게 뛰어서 왼편에 따라붙었다.
“왜 나 버려.”
“버리긴 뭘 버려. 오바하지 마.”
귀여웠다. 친구 사이라고 해도 얼굴은 볼 수 있으니까, 지금 같은 사이로 쭉 이어져도 괜찮을 듯싶었다. 다시 미소 지었다.
정하윤이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가슴이 졸아들었다. 내가 너무 빤히 봤나? 왜 그러지? 걱정스러웠다.
정하윤이 오른팔을 들어 와이셔츠 소매를 눈에 댔다.
“왜 그래?”
“너 얼굴 안 씻고 살아?”
“뭔 소리야?”
“내 눈에 뭐 먼지 같은 거 들어갔잖아.”
농담이었구나. 픽 웃었다.
“한 번 봐 봐.”
“봐서 뭐 하게.”
“진짜 먼지 들어간 거면 불어줄게.”
“아 됐어.”
“아니 진짜 봐 봐.”
정하윤이 한숨 쉬었다. 어 나 지금 잘못했나? 아차 싶었다. 이윽고 정하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면서 목을 살짝 젖혔다. 감고 있는 건 왼눈뿐인데 양쪽 눈이 다 촉촉했다.
“한번 불어 봐 봐.”
“...”
정하윤의 얼굴을 잡고 입김을 부는 모습을 상상했다. 떨려왔다. 못할 것 같았다. 왠지 내 입에서 냄새가 날 것 같기도 했다. 하기 무서웠다.
“너 눈에서 먼지 빠진 거 같은데...?”
“아니야. 하기나 해, 빨리.”
“... 알겠어.”
양손으로 조심스레 정하윤의 얼굴을 잡고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정하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하윤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한 번 더 불어 봐.”
“응...”
다시 후 불었다. 정하윤이 왼눈도 감았다가 오른팔 옷소매로 눈꺼풀을 스윽스윽 닦은 다음 두 눈을 동시에 떴다.
“이제 됐으니까 놔.”
“어, 미안.”
정하윤의 얼굴을 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정하윤이 정면을 보고 먼저 앞장서 걸었다.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까 정하윤이 놓으라고 했을 때 키스를 했으면 어땠을까.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뭐 해, 안 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네. 살짝 야속했다.
“가.”
가볍게 뛰어 뒤늦게 정하윤의 왼편에 따라붙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친구 사이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미지근한 관계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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