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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303화 (302/438)

〈 303화 〉 겁쟁이둘 오디션 (1)

* * *

김민준과 나란히 걸어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수아가 당당하게 무대 위로 올라가서 뒤늦게 뒤따라 나란히 섰다. 윤가영이 쭈뼛쭈뼛 걸어 무대 먼발치에 서고 김민준이 윤가영의 왼편에 섰다.

객석에는 제작진들이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내 얼굴을 제대로 보려는 건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포니테일을 한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 한 명이랑 양손으로 대본집을 그러쥔 채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안경 쓴 여자애 한 명도 있었다. 특이한 건 둘이 얼굴이 서로 닮아 있었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거였다. 둘이 자매라도 되는 건가? 일단 외견상 그래 보였다.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여자애가 내게 어딘가 익숙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는 거였다.

너무 침묵이 오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들 얼굴에 싱글싱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한테는 잘 안 들릴 정도로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작발표회 사진 같은 것에서 얼굴을 익히 봤던 오지윤 감독이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우리 여배우님도.”

이수아가 빙긋 웃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웃는 모습이 좀 가식적이어야 될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천생 웃는 게 어울리게 태어나서 평생 웃어온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수아는 진짜로 인상을 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더 성격적으로 맞는지도 몰랐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이수아가 천생 배우라는 거였다.

포니테일 여자애가 오른손으로 안경 쓴 여자의 왼팔을 주무르면서 언니, 언니, 라고 말했다. 확실히 둘이 자매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포니테일 여자애가 키는 더 커 보이는데 여동생이었구나.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포니테일을 한 여자애는 조금 맹한 느낌이고, 안경 쓴 여자애는 성숙한 느낌이기는 했다.

안경을 쓴 언니가 여동생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나만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대본은 다 읽고 오셨어요...?”

눈빛이 뭔가 기대하는 느낌인데. 착각인가? 아리송했다.

“네, 다 읽어봤어요.”

“몇 번이요...?”

“저 두세 번 정도 읽었어요...”

“그래요...”

언니가 고개를 얕게 끄덕거렸다. 포니테일을 한 애가 계속 언니의 팔을 만져대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언니, 언니, 하고 불러댔다. 언니가 더는 못 견디겠는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여동생을 봤다.

“왜.”

마주 답하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살짝 신경질적이었다. 성격이 착한 건지 짜증이 많이 섞여 있지 않아서 애교스럽게도 느껴질 수준이었다.

“저분 언니가 보여준 영상에 나온 그 사람 아냐?”

“맞아. 그니까 그만해.”

“응.”

오지윤 감독이 자식들을 보기라도 하는 듯 흐뭇한 눈으로 두 자매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온유 학생. 근데 저기 우리 수아 양이랑 매니저분 말고 또 오신 분은 누구예요?”

윤가영이 눈을 크게 뜨고 멋쩍게 웃었다.

“아, 저 온유 새엄마인데, 온유 연기 하는 거 보고 싶어서 왔어요...”

“아... 네. 죄송한데 혹시 연기 하세요?”

“아뇨...?”

“할 마음은 있어요?”

“아뇨 없는데요...?”

“음, 알겠어요.”

오지윤 감독이 나를 쳐다봤다.

“가만히 세워둬서 미안해요, 온유 학생. 자꾸 온유 학생이라고 말하기 힘든데 온유 군이라고 해도 돼요?”

“네, 네. 괜찮아요.”

“그럼 온유 군. 대본 다 읽고 왔다고 했으니까, 어디 부분 하자고 하면 바로 찾아서 바로 외우고 연기할 수 있겠어요?”

“네. 해보겠습니다.”

오지윤 감독이 눈웃음 지었다.

“그래요. 그럼 지금 여자 주연 두 명 다 있으니까 같이 나오는 장면 하나씩 해보는 거로 하는 거 괜찮아요?”

“두 명이 다 있다고요?”

“네. 여기 안경 쓴 우리 정서아가 드라마 작가고, 온유 군이랑 동갑이에요. 그담에 서아 옆에 있는 이 애가.”

오지윤 감독이 왼손으로 포니테일 여자애를 가리켰다. 여자애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정시은. 극 중에서는 이서은 역할 하는, 드라마 작가 연년생인 친여동생. 그리고 다른 여자 주연 한 명은 알죠? 온유 군 여동생, 수아 양.”

“아, 네.”

정시은이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획 돌려 오지윤 감독을 봤다. 포니테일 끝이 정시은 언니의 안경을 툭 쳤다.

“아.”

“아 미안 언니.”

정시은이 손으로 정서아의 팔을 한 번 쓸고 다시 오지윤 감독을 봤다.

“근데요 감독님 저 한번 보고 싶은 신 있는데 지목해도 돼요?”

“음? 응. 맘대로 해.”

“넵.”

정시은이 나를 쳐다봤다.

“그럼 그거 하죠? 이서은이 러브 코치 되는 신. 이윤우가 정하윤 조언 따라서 이서은 사물함에 러브레터 놓아가지고, 이서은이 점심시간에 그거 확인해 본 다음에 옥상으로 오라고 문자 보낸 부분. 알죠?”

“알죠.”

“그럼 거기 문자까지는 건너뛰고, 옥상 간 부분부터 하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거기부터.”

“그래요.”

대본집을 빠르게 넘겨 찾았다. 이야기가 사실상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첫 구간이자 이서은의 정곡에 당황하는 이윤우의 모습이 킬링파트가 될 부분이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살짝 들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본 내용이 너무 아기자기하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밌겠네요.”

정시은이 씩 웃었다.

“그니까요.”

정시은이 대본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와 무대에 올라왔다.

이수아가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나 윤가영의 옆에 섰다.

정시은이 내 왼편으로 다가와서 자기 대본집을 보여주면서 왼손 검지로 문장 하나를 짚었다.

“여기 ‘내가 네 러브 코치 돼줄게.’ 이 대사까지만 하죠.”

“네.”

“온유 군.”

오지윤이 말했다.

“외우는 데 시간 얼마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여긴 좀 많이 봤던 부분이라서 많이는 안 걸릴 거 같아요. 아마 금방일 거예요.”

“그래요 그럼.”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행동 지시랑 대사 한 줄 한 줄을 눈으로 읽은 다음 머릿속으로 한 번 곱씹고 장을 넘겼다.

내 기억력을 믿어도 되는 걸까. 갑자기 의심스러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눈을 빠르게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수아가 꽤 괜찮게 연기한다고 말했었으니까, 스스로 믿어봐도 좋을 거였다. 읽던 문장을 다시 읽어나갔다.

이서은, 괄호 속에 피식 웃고라는 행동 지시 뒤에, 내가 네 러브 코치 돼줄게라는 대사가 써진 줄까지 도달했다. 신의 전체적인 흐름을 머릿속으로 다시 돌이켰다. 내 대사만 한 번 더 되새기고 대본에서 눈을 뗐다. 아까랑은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정시은, 아니 이서은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오지윤 감독을 바라봤다.

“저 다 외웠어요.”

“벌써? 그럼, 잠깐만.”

오지윤 감독이 기억력이 되게 좋은가 보네, 하고 혼잣말했다.

“온유 군오디션 하는 거 카메라로 녹화할 거예요.”

“네.”

수아가 오디션을 볼 때 마주쳤던 FD가 달려왔다. FD가 나랑 이서은의 손에서 대본을 가져가고는 이서은에게 세 번 접힌 작은 편지지, 즉 이윤우가 쓴 러브 레터를 건네줬다.

“이제 카메라 돌아가니까 준비되면 시작해요.”

“네.”

이서은이 답하고 내게서 등 돌려 섰다.

정면에 하나, 양옆에도 하나씩, 그렇게 고정되어있는 카메라 세 대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미친 듯이 긴장되면서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다. 몸이 순간 체온이 확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심장 박동이 천천히 진정되면서 몸도 식었다.

햇볕 내리쬐는 5월, 초록색 우레탄이 깔린 학교 옥상이었다.

이서은이 두 발짝을 걷고 멈춰 서더니 뒤돌아서 이윤우를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이윽고 이윤우와 이서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서은은 이윤우와 정하윤과는 반이 달랐던 1학년 1학기 초부터 두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둘 중 고백하는 애는 누구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만 남긴 채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2학년이 되어서 이서은은 두 겁쟁이와 같은 반에 있게 되었다. 그녀는 4월 초부터 갑자기 수업 시간에 카톡을 보내는 등 이상한 짓을 해대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윤우를 보고, 얘가 대체 뭐 하는 건가 생각하며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서은은 자신의 사물함에 들어 있던 이윤우의 러브 레터를 화장실에서 열어보고, 참다못해서 이윤우를 옥상에 불러세운 것이었다. 제발 개 짓거리 좀 그만하라고 말할 작정으로.

이서은이 오른손을 마이 안주머니에 넣어 러브 레터를 꺼내고는 팔짱을 꼈다. 그 상태에서 오른손 엄지를 움직여 손아귀에 있는 러브 레터를 수직으로 세웠다.

“이거 뭐야?”

“...”

눈살을 찌푸리고 생경한 듯 바라봤다. 나는 정하윤이 조언한 대로 왼손으로 러브 레터를 쓴 다음 이서은의 사물함에 넣어서 고백 의사를 전달하고, 이서은의 반응이 좋지 않다면 친구가 장난친 것 같다고 말하며 발뺌해야 했다. 물론 용기없고 지질한 짓이기에 반응이야 당연히 좋지 않을 테지만, 만에 하나 고백을 받아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장난 아니라 친구가 쓴 것 같다며 최대한 연기하고, 될 수 있는 한 정중하게 밀어내야 했다.

“러브 레터 아냐?”

이서은이 피식 웃었다.

“네가 넣은 거 아니야? 왜 모르는 척해?”

“아니 나 진짜 몰라. 처음 보는 거야.”

“근데 왜 바로 러브 레터 아니냐고 정확하게 집어서 물어봐?”

“...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우연이야.”

이서은이 또 픽 웃음을 터뜨렸다.

“너 연기 진짜 못한다.”

“뭐가?”

“네가 쓰고 넣은 거지? 이거.”

“아냐 그거 아마 뭐 다른 애가 쓰고서 내가 쓴 거처럼 꾸며 가지고 나 놀리려고 한 거일걸?”

“너 되게 생각해뒀던 거 풀어놓는 것처럼 말한다?”

“...”

속이 타들어 갔다. 고백에 대해 응낙하거나 거부하는 경우만 상상하고 온 것이어서 머리는 하얘진 채로 빙빙 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당황에 물들어있는지, 아니면 무표정한지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얼굴이 붉어 보이리라는 것이었다.

“아냐. 네가 너무 색안경 끼고 나 몰아가는 거야.”

“그래? 근데 너 얼굴은 왤케 빨개?”

“네가 억지로 나 몰아가니까 그러지.”

이서은이 어이없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눈살을 약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봤다.

“야.”

“... 응?”

“언제까지 발뺌할래?”

“...”

“너 정하윤 좋아하잖아.”

말문이 막혔다. 동공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얘가 어떻게 알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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