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 미쳐버린 정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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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부실로 정이슬이 들이닥쳤다. 빠르게 콧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마구 날뛴 뒤의 새끼 멧돼지 같았다.정이슬이 부실을 빠르게 훑고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한테 입술 박치기라도 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끔찍이 무서웠다. 양팔을 살짝 위로 올리고 막을 준비를 했다. 다행히 정이슬이 차차 속도를 줄이고 제자리에 섰다.
“이온유!”
“네?”
“나 말할 거 있거든? 잠깐만 나와봐.”
“뭐길래 그래요?”
“아 그냥, 잠만 빨리.”
“네.”
정이슬이 내 대답을 듣자마자 뒤로 획 돌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성연도 일어났다. 아니 얘는 왜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강성연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양손을 들고 밑으로 까딱거렸다. 그제야 강성연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낮추었다.
정이슬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몸을 돌려 부원들을 봤다.
“안녕 얘들아.”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응.”
정이슬이 눈웃음 짓고 부원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빨리 나와.”
“네.”
정이슬을 뒤따랐다. 정이슬이 문을 열고 나가서 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부실 문을 닫았다. 정이슬이 왼손 검지로 옆을 가리켰다.
“부실에서 조금 멀어지자는 뜻이에요?”
“응. 찰떡같이 알아듣네.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인가? 아니 분명 천생연분일 거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빨리 얘기나 해줘요.”
“안 돼. 일단 옆으로 가야 돼.”
“알겠어요.”
정이슬이 앞장섰다. 뒤따라 가서 밴드부실 옆의 벽면 구석 쪽으로 갔다.
정이슬이 얼굴을 싹 굳히고 나를 올려봤다.
“온유야.”
“네.”
“... 내 망붕 회로가 말해주고 있는 거인데, 짧게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줘.”
망붕 회로라니.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말해요.”
“응. 기다려 봐.”
정이슬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감더니 양손을 관자놀이에 댔다.
정이슬이 음, 하고 소리를 내다가 얼마 안 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안색이 진지했다. 그래서 더 감이 안 좋았다.
정이슬의 입술이 열렸다.
“성연이 있잖아.”
강성연은 왜. 또 미친 소리를 할 셈인 건가. 두려워졌다.
“네.”
“사실, 네가 학교에 오기 전에 성연이랑 화해를 다 해버렸고? 성연이는 그렇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준 너에게 반한 거야. 그 뒤로 너는 성연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성연이는 너에 대한 호감이 점점 커가는 것을 느끼며 더 더 오래 함께 있어하고 싶어 하고. 또, 그러다가 서로 사이가 가까워지고? 너나 성연이 중 한 명이 고백을 해서? 너희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때에 학교에 와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해주는 척을 하면서 연기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연락을 안 하는 이유는 성연이가 다른 여자한테 연락하는 것을 질투해서고!심지어 방금도 그랬어!너 강성연이랑 사귀지?”
미친.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진짜 미쳤죠?”
정이슬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사귀는 거?”
“네. 진짜 돈 거 같아요 누나.”
“그럼 성연이는 왜 너 따라서 일어난 거야?”
“아직 부원들이랑 어색해서 그런 거 같아요.”
“흐음... 그런가?”
“네.”
정이슬이 고개를 주억이다가 하아, 하고 한숨 쉬었다.
“다행이네. 나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그 진실을 혼자 깨닫고서.”
“진실은 뭐가 진실이에요. 다 틀렸는데.”
“그래. 정정할게. 진실인 줄로 착각한 망상을 하고 내가 성연이한테 밀린 줄 알아서 엄청난 패배감을 느꼈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이슬이랑 있을 때 제일 많이 헛웃음을 짓게 되는 것 같았다.
정이슬이 눈을 좁게 떴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갑자기 긴장됐다.
정이슬이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너 나한테 연락은 왜 안 했어?”
“아...”
멋쩍게 웃었다.
“까먹었어요. 죄송해요.”
“허얼...”
정이슬이 왼발을 뒤로 뻗어 한 발짝 뒷걸음치고 균형을 잃은 척 휘청이며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짚었다. 너무 연극적인 모션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너한테 내 마음 다 줬는데...”
“달라고 한 적 없잖아요. 그리고 누나 저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정이슬이 다시 똑바로 서서 나를 쳐다봤다.
“아니야. 나 너 없으면 못 살아. 이건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렇다고 평소에 말하는 것들이 진지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
“... 네.”
“지금 네, 라고 대답한 건 너 없이 못 산다는 뜻에 알겠다고 한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네가 나를 받아주겠다는 뜻?”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이슬이 눈을 좁게 떴다.
“너 진짜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내 심장에 쐐기를 박을 수 있어?”
웃음이 나왔다.
“아 또 웃어...”
“아니 누나가 너무 웃기게 말하잖아요.”
“난 항상 진심이라니까... 웃으면 안 돼...”
“아니 근데 웃긴 걸 어떡해요.”
“슬프다... 나 이러려고 태어난 거 아닌데...”
“이러려고라니요?”
“너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고 어릿광대 노릇만 하잖아.”
“어릿광대는 금방 벗어나실 수 있잖아요.”
“어? 나 사랑해주겠다고?”
실소가 나왔다.
“아니 어떻게 그 얘기가 그렇게 바뀌어요.”
“음? 그 의미 아니야? 어떻게 들어도?”
“아니죠. 제 말은, 누나가 저를 포기하면 된다는 뜻이었어요.”
“어, 난 그런 방향성은 고려하지 않아서.”
“와...”
정이슬이 씨익 웃었다.
“어때. 좀 반했어?”
“아니요.”
“왜?”
“왜냐뇨. 그게 무슨 질문이에요.”
“아니... 내가 이 정도로 감동적인 표현을 쏟아부었는데 마음이 한 번도 안 흔들렸다고?”
“음... 네.”
“헐.”
정이슬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짜?”
“네.”
“어떻게?”
“글쎄요.”
“단 한 번도?”
“넵.”
“말도 안 돼. 나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런 말을 본인 입으로 해요?”
“아니, 팩트잖아.”
“와...”
“맞지.”
“... 솔직히 누나 말이 맞기는 해요.”
“그치. 근데 왜 너는 날 안 좋아해줄까?”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떡해요.”
“아니 너한테 물어야지 누구한테 물어. 내가 사랑하는 게 너인데.”
“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정이슬이 히죽 웃었다.
“이번엔 좀 어땠어?”
“살짝 오글거렸어요.”
“이건 너무 억까인데.”
“제가 살짝 오글거렸다고 했잖아요.”
“어, 그럼 살짝 제외하고는 반할 만 했다는 거지?”
“그렇게 해석하셔도 좋아요.”
“으응. 알겠어. 넌 나한테 반절 이상은 넘어왔다는 거지.”
“그건 아니구요.”
“으응... 그럼 오케이. 일단 네 취향 파악은 했고.”
“제 취향이 뭔데요?”
“아 그건 기밀사항이라 말 못 해줘.”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진짜 개 웃겨요.”
정이슬이 흐응,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이번 한 번은 어릿광대로 보는 것을 용서해주겠어.”
“무슨 소리예요. 저 누나 어릿광대로 본 적 없는데.”
“어...?”
정이슬이 가슴을 짚었다.
“심쿵.”
“이게 왜요?”
“항상 나를 사랑해도 좋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줬다는 거잖아.”
“그건 좀 너무 나갔는데요.”
“그럼 말을 좀 바꾸면, 네가 내 말을 항상 진지하게 들어줬다는 거잖아.”
“그건 맞죠.”
“그게 감동이었어.”
“근데 저 사람들 말 다 경청해요.”
“아냐. 좀 달라.”
“어디가요?”
“좀 복잡한데. 일단 달라. 진짜 듣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요.”
“음. 좀 부담이 되잖아. 호감이라는 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는 게 행동이나 말에서 느껴지고 그러면 보통 거리를 두고 하게 되잖아. 너도 많이 그래 봤을 거고. 근데 나한테만큼은 그렇지 않잖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충분히 누나 밀어내고 있는데 누나가 자꾸 달려와서 저 덮치는 거예요.”
“... 너 말 야하게 한다.”
“네?”
“덮친다는 표현을 쓴다니. 넌 재능이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재능 말하는 거예요.”
“내 사랑을 받을 재능. 맘에 쏙 들어.”
미친. 혀가 내둘렸다.
“왜 말을 못 하니.”
“충격받아서요.”
정이슬이 히 웃었다.
“항상 새롭지. 내가 말하는 거.”
“네.”
“나랑 사귀면 매일이 새로울 텐데. 어때?”
고개 저었다.
“아니 왜?”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 자신 있는데 진짜. 여러모로.”
“아뇨, 아껴주세요.”
“나 나 충분히 아끼고 있어. 걱정하지 마.”
“네.”
“아냐.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걱정받는 거 썩 괜찮은 거 같아. 걱정해줘.”
“싫어요.”
“넘 매몰차다.”
“이 정도는 해야 누나가 떨어지잖아요.”
“아니. 전혀 안 떨어지는데. 오기만 생기는데.”
“아... 저 진짜 죽어요 누나.”
“죽는다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해.”
“저 진짜 힘들어서 그래요.”
“으응...”
“저 힘들게 안 할 거예요?”
“...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알려줄 수 있어.”
“제가 누나랑 사귀는 거요?”
“아네! 이심전심이 가능하다니. 이건 진짜 하늘이 맺어준 연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을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웃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누나 진짜 왜 그래요.”
“왜냐니. 너도 알잖아.”
“몰라요.”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몰라?”
“아 몰라요. 알아도 몰라요.”
“... 너 지금 진짜 힘들구나.”
“네. 피곤해요.”
“밤에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요...”
“늦게 잔 거야?”
“아니에요...”
“그럼 뭐지... 아침에 빨리 깼어?”
“아니에요. 그냥 누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정이슬이 흐음,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그럼 당장은 너를 놓아줄게.”
“당장 말고 항상 안 돼요?”
“안 돼. 난 너에게 집착할 거야.”
“아...”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난 내 마음을 따를 수밖에 없어.”
“왜 누나가 주체가 아닌 것처럼 말해요...”
“내가 주체가 아니니까. 흄이 그랬어.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따른다고.”
“왜 갑자기 철학 얘기해요...”
정이슬이 히 웃었다.
“그냥 윤사에서 본 거 기억나 가지고 말했어.”
“네...”
“미안. 놔줄게.”
“감사해요.”
“응.”
정이슬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시선을 뒤로 던졌다.
백지수랑 송선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로가 더 쌓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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