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285화 (284/438)

〈 285화 〉 이수아 미친년

* * *

“침대에 앉아.”

이수아가 말했다.

“어.”

눈을 돌렸다. 바닥이랑 침대 곳곳에 대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불은 대충 뭉쳐진 채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스테이플러가 찍혀있는 것은 베개 옆에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고 베개 옆에 놓인 대본을 가져가서 훑어봤다. 이래저래 줄이 쳐져 있고, 캐릭터를 분석해놓은 코멘트 같은 것이 빼곡하다시피 많이 적혀 있었다.

“그거 내 거야.”

이수아가 내 왼편에 앉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놔 빨리.”

“내가 볼 거는?”

“침대에 있잖아.”

헛웃음이 나왔다. 이수아가 내 손에 있는 대본을 낚아채듯 가져가고는 대본에 시선을 고정했다.

“왜 네 것만 정리되어 있고 내가 볼 건 흩어져 있어?”

이수아가 나를 마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시간 버렸으니까 너도 시간 좀 버리라고.”

삐친 모습이 귀여웠다. 살폿 웃었다.

“미안해.”

“존나 미안한 거 맞음?”

“진짜 미안해.”

“근데 왜 쪼갬?”

“너 귀여워서.”

“뭐?”

이수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꼬리가 내려가고, 양옆 눈썹이 각자 어긋난 게 안면 근육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

“으, 씨발.”

이수아가 상체를 뒤로 물리고 왼팔로 침대를 짚었다.

“존나 어디서 배운 좆 같은 말투냐 그건?”

픽 웃었다.

“너무 오반데.”

“오바 이 지랄. 그럼 내가 막, ‘오빠가 너무 멋있어서 웃었어.’ 이러면 넌 나처럼 반응 안 할 거야?”

“응.”

“개 좆 까는 소리 하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부 반응이 너무 격렬한 거 아니야?”

“그만큼 좆 같으니까 그러지.”

“알겠어.”

“... 갑자기 알겠어 이러네.”

흩어진 대본을 하나씩 주워서 1쪽부터 순서대로 모았다.

“대본 읽어봐야 되니까.”

“존나 갑자기 성실한 척하네.”

피식 웃었다.

“미안해 수아야.”

“좆 까.”

“많이 삐쳤어? 나 늦게 와서?”

“지랄하지 말랬지 내가.”

“알겠어.”

“아 개 빡치네...”

대본을 다 모으고 바닥에 탁탁 내려쳐서 가지런히 모았다.

“스테이플러 책상에 있어.”

이수아가 말했다.

“응.”

대본에 스테이플러를 찍고 이수아의 왼편에 앉았다.

“그냥 쭉 봐?”

“어.”

이수아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나 부른 이유가 뭐야?”

이수아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쳐다봤다.

“말 존나 많네. 그냥 일단 봐. 보라고 하면.”

“알겠어.”

이수아가 다시 자기 대본을 내려봤다.

“미안해.”

“됐어.”

“...”

더는 말을 걸면 안 될 듯했다. 대본을 봤다. 표제는 겁쟁이둘이었다. 옛날에 가제가 두 바보였나. 바꾼 제목이 확실히 더 어울리는 느낌이기는 했다. 겁쟁이랑 둘 사이에 띄어쓰기를 안 하고 그냥 붙여놓은 것은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에는 잘 붙었다.

빠르게 훑어나갔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아기자기한 러브 코미디였다. 남주인공 이윤우나 여주인공 정하윤 중 한 명이라도 진솔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풀릴 것을 서로 툭툭 간만 보는 상황부터 슬슬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윤우가 정하윤에게 러브 코치가 되는 것을 부탁하고, 정하윤이 그릇된 조언들을 해주며 살살 견제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재밌냐?”

“응.”

“존나 대충 보면서 휙휙 넘기는 거 같은데?”

“아니야. 다 보고 있어.”

“어.”

“더 읽어봐?”

“어. 나한테 말 걸고 싶어질 때 말 걸어.”

웃음이 나왔다.

“옆 사람한테 말 걸고 싶어지는 명장면 같은 거라도 있어?”

“걍 봐.”

“어디쯤에 있는데?”

“그냥 보라고.”

“후반부?”

“... 어.”

“뒤부터 봐도 돼?”

“아 존나 맘대로 해 미친놈아.”

“응.”

뒤부터 역으로 봤다. 에필로그는 이윤우랑 정하윤이 마침내 이어져서 일상을 보내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이윤우와 정하윤의 키스 신과 이윤우의 고백 신이 있었다.

만약 이수아가 정하윤 역할이면, 이수아가 이윤우를 맡은 남자 배우랑 키스하게 되는 거 아닌가?

절로 입이 열렸다.

“야. 이수아.”

“어.”

“키스 신 있는데?”

이수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어.”

“괜찮아?”

“괜찮고 말고가 있어? 그냥 키스 신인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머리를 굴려 답할 말을 찾았다.

“아니, 약간 거부감 같은 거 없어? 너 첫 키스일 거 아냐.”

“뭐 그럼 싫다고 얘기해서 빼달라고 해?”

“...”

“에바지? 네가 생각해도.”

“그렇긴 한데. 좀.”

“좀 뭐. 불편해? 나랑 키스하는 게?”

“어?”

사고가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이수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너랑 나랑 키스하는 거잖아. 병신아.”

“... 왜?”

“왜냐니. 네가 이윤우고 내가 정하윤이니까.”

“무슨 근거로? 나 오디션 같은 것도 안 봤잖아.”

“모레에 가잖아.”

“그니까. 아직 뭐 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확신하냐는 거지.”

“... 그냥. 느낌상.”

“어어...”

이수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대본을 봤다.

“... 네가 남주여야 찍을 거야. 모르는 사람이랑 이런 거 하기 싫어.”

“... 그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알겠어.”

“... 아 좆 같아.”

이수아가 갑자기 대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살짝 당황스러웠다.

윤가영이 말한 대로 이수아가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배우로 연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면서도 나랑은 키스 신을 찍을 각오를 할 정도이니, 최소한 호감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 생각하니 약간 멍했다. 느닷없이 자지가 부풀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억지로 짓눌렀다.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안은 이수아가 문으로 들어왔다.

“너도 먹을래?”

“어... 고마워.”

이수아가 오른편에 풀썩 앉고 침대에 아이스크림 통을 내려놓은 뒤 내게 아이스크림 스푼을 건넸다. 오른손을 뻗어 받았다. 이수아가 통을 열었다. 온통 초코류 아이스크림이었다. 이수아가 바로 스푼을 찍어 내려 양껏 퍼내고 입에 물었다.

나도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뜨고 입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이 사르르 녹으면서 크런치한 초코 과자가 함께 씹혔다. 혀가 녹아내릴 듯 달콤했다.

이수아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하고 미간을 좁혔다.

“으음.”

이수아가 아이스크림 통을 내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이수아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지.”

“응. 맛있다.”

이수아가 눈웃음 지었다. 왠지 익숙한 미소였다.

왜인가 짧게 생각해봤는데, 윤가영이랑 닮아 있었다. 엄마랑 딸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수아도 윤가영처럼 나를 남자로 좋아하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그 호감도는 얼마 정도일까? 알고 싶었다.

이수아가 나를 올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더 안 먹어?”

“어? 먹을 거야.”

“존나 갑자기 정신 못 차리네.”

이수아가 아이스크림에 스푼을 찍고 뱁새눈을 떴다.

“아까 내가 말한 거 때문에 뭐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아냐.”

“그럼 좀 빠릿빠릿하게 반응 좀 해.”

“알겠어.”

“어.”

이수아가 또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입에 넣었다. 나도 한 입 했다.

이수아가 우물거리면서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빨리 먹고 다시 보자.”

“응.”

“오디션 조지면 너 진짜 뒤진다.”

“안 조져.”

“어.”

“... 근데 그게 오디션이야?”

“감독이랑 작가가 너 보고 싶어 하는 거면 뭘 보고 싶어 하는 거겠어.”

“얼굴이랑 연기?”

“그게 오디션이지.”

“거의 단독적으로 만나는 거면 오디션 말고 미팅이라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이수아가 피식 웃었다.

“야, 네가 무슨 베테랑 배우라도 돼?”

“아...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는 듯.”

“존나...”

이수아가 고개를 내려 아이스크림을 퍼내면서 픽픽 웃었다.

“존나 웃기네 진짜. 생각할수록.”

이수아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나를 쳐다봤다.

나를 향해 지은 웃음이 진실 되어 보였다.

나도 마주 미소 지어 보였다.

시선을 내려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내고 입에 넣었다. 다시, 크런치한 과자가 씹히고, 아이스크림이 혀 위에서 녹아내렸다.

이수아가 나를 쳐다보면서 계속 킥킥 웃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어 오빠?”

왜 갑자기 오빠라고 부르지? 살짝 불길했다. 지금 보니 나를 보면서 계속 웃는 것도 조금 수상했다.

“응. 근데 왤케 웃어?”

“아니...”

이수아가 킥킥 웃으면서 시선을 내리고 흐으, 하고 한숨을 흘렸다.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이수아가 웃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까먹고 말 안 한 게 있어서.”

“뭔데?”

이수아가 오른손 검지로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이거 아이스크림, 오빠가 혹시 뺏어 먹을까 봐 전체적으로 다 침 뱉어놨던 거야.”

“어?”

이수아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년...”

이수아가 왼손을 내 오른 어깨에 얹었다.

“미안해. 진짜로.”

“됐어.”

이수아가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숨이 나왔다.

“아... 여동생 침 섞인 아이스크림 맛있었어 오빠?”

“...”

“나랑 먼저 키스했네? 내 침 다 먹었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농담이야. 계속 먹어 오빠.”

“... 뭐가 농담이라는 거야?”

“나랑 먼저 키스했다는 거. 정의가 다르잖아, 키스랑.”

“... 그럼 침 뱉은 건 사실이라는 거야?”

“응.”

“...”

이수아가 악동처럼 웃었다.

진짜, 진짜 미친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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