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학교 가는 날 (6)
* * *
종례 시간, 하회탈이 교실로 걸어들어와 교단에 섰다. 박철현이 뒤따라 들어와 교탁 위에 핸드폰 가방을 올려놓고 지퍼를 열어 펼쳤다. 하회탈이 박철현을 보다가 학생들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핸드폰 제출한 사람들 가져가고. 창문 다 단속하고. 바닥도... 주번이 한 번 쓸고 가라.”
“넵.”
“다들 이젠 노는 것 좀 줄여서 시험공부에 매진하고. 됐다. 종례 끝.”
하회탈이 그리 선언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온유는 나 좀 보자.”
“네.”
하회탈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지수가 수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봤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어깨를 으쓱이고 교실을 나서서 하회탈의 뒤를 따랐다. 하회탈이 교무실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나를 봤다.
“따라 들어와.”
“네.”
하회탈이 교무실로 들어가 자기 자리 앞에 서서 참고서나 문제집 같은 것들을 꺼내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하회탈이 하나씩 집어 들어서 휘리릭 넘기며 보다가 세 권을 골라서 내게 건넸다.
“가져라.”
“네?”
“수능 공부해야지. 일단은 내신 공부하고.”
팔을 뻗어 받았다. 살짝 얼떨떨했다.
“네...”
“막 자랑은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래. 가. 공부하다 궁금한 거 있으면 선생님들한테 묻고.”
“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교무실을 빠져나가려는데 남자 영어 쌤이 온유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영어 쌤이 두꺼워 보이는 책 두 권을 오른팔로 안아 든 채 서 있었다.
“어, 너 일단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할래?”
“아뇨 그냥 갈게요.”
“그래.”
“넵.”
영어 쌤 앞으로 걸어갔다. 영어 쌤이 국어 참고서 위에 영어 문제집 한 권과 수능 영단어집 한 권을 올렸다.
“수능 영어는 진짜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해. 단어가 하루 이틀에 외워지는 것도 아니고. 문제 푸는 감각도 살려놓아야 되고. 알지?”
“알죠.”
영어 쌤이 흐뭇하게 웃었다.
“응원한다.”
“감사합니다.”
“그래. 가.”
“네.”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나를 붙잡는 사람은 더는 없었다. 반으로 향했다. 애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길을 보내오는 이 중에는 송선우도 섞여 있었다.
“뭐야 이온유?”
송선우가 도도도 달려서 내 왼편으로 와 나란히 서서 발맞춰 걸었다.
“참고서들.”
“왜 있는 거야?”
“쌤들이 수능 준비하라고 주셨어.”
“개, 행복하겠다.”
피식 웃었다.
“내가 거들어줄까?”
“아냐 괜찮아.”
“그래.”
송선우가 위에 있던 영어 참고서 두 권을 들었다.
“괜찮다 했는데.”
“됐어.”
반으로 들어갔다. 백지수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내 쪽을 쳐다봤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뭐야?”
“참고서.”
“쌤들이 줬어?”
“응.”
책상에 앉아 폰 게임을 하던 박철현이 감탄했다.
“오지네 이온유.”
백지수가 박철현을 흘깃 봤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쳐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따라왔다. 사물함 앞으로 갔다. 백지수가 재빨리 내 사물함을 열어주었다. 참고서들을 넣었다. 송선우가 건네오는 영어 참고서 두 권도 안에 집어넣었다. 뒤돌아섰다. 박철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지금 밴드부 갈 거야?”
“어, 아니.”
박철현이 피식 웃었다.
“어라는 거야 뭐야?”
“아니라는 뜻이었어.”
“오키. 바이.”
“응. 넌 밴드부에 있게?”
“아마.”
“어. 바이.”
“응.”
박철현이 다시 폰을 봤다. 교실을 나섰다. 송선우가 백지수와 팔짱을 끼고 내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학교에서 여자친구인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주는 모양이었다. 고마웠다. 한편으로 피가 밑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김세은, 백지수, 송선우가 다 내 여자친구라니. 묘한 우월감이 차올랐다. 해면체가 부풀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졌다. 큰일이었다. 발길을 돌렸다. 송선우와 백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
“화장실.”
“으응...”
송선우가 답했다. 백지수가 말없이 내 몸을 전체적으로 훑고는 바지를 뚫어져라 봤다. 발기한 게 눈에 보이겠다 싶었다. 전에는 이럴 때면 눈을 돌렸는데. 섹스까지 한 사이라고 아주 대놓고 보는 모양이었다. 미치도록 음탕했다. 혈기가 끓는 듯했다. 학교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콧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너희 먼저 가.”
“응.”
송선우가 답했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너 오늘 가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
“가든 오든 결정 나면 바로 문자 해.”
“응.”
“하루만이야.”
“알겠어. 잘 가.”
“잘 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송선우랑 백지수가 잘 가, 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남자 화장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좌변기 칸 안으로 들어갔다. 자지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고 왼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조심조심 변기에 앉고 화면을 켜 문자앱을 확인했다. 강예린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화해해줘서 고마워.]
첫 문장부터 화해해서 고맙다니. 강성연이 문자나 전화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성연이 좀 괜찮은 거 같니?]
[애들이랑 어울리고 있어?]
고민스러웠다. 할 말이 조금 많았다. 내용을 정리해서 전송했다.
[당장은 성연이가 애들한테 다가서기 어려워하는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조금 많이 위축되어있는 게 눈에 보이고 해서 한번 상담사랑 면담하게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해요.]
[그렇구나. 고마워. 성연이 용서해주고 생각해줘서.]
[근데 혹시 성연이가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조력을 조금 해줄 수 없을까?]
[저도 그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동안 작성 중이라는 표시만 덩그러니 나오고 답장이 오지는 않았다. 다른 문자들을 보다가 답장이 왔을 때 확인해야 하나 싶을 때 강예린이 문자를 보냈다.
[고마워. 내가 정말 어떻게든 갚을게 온유야.]
[괜찮아요.]
[아냐. 이건 안 갚으면 정말 내가 너무 죄인이 되는 거라서 진짜 꼭 갚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감히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럼 밥 한 번만 더 대접해주세요.]
[한 번 말고 일 년 해줄 수도 있어.]
괜찮아요, 라고만 썼다가 왠지 했던 말들을 루프하게 될 것 같아서 지워버렸다. 다시 키패드를 눌렀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해요.]
[그래. 진짜 고마워 온유야.]
[네.]
다시 작성 중 표시가 떴다. 이내 문자가 왔다.
[붙잡아서 미안한데 혹시 오늘 저녁 시간 되니?]
왜 이렇게 저녁을 차려주시려고 하는 거지. 성연이랑 내가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 걸까.
성연이를 아끼는 마음이 큰 것인지 아니면 성연이가 그토록 끔찍이 걱정될 정도로 망가지고 만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최대한 가까운 시일에 가기는 해야 할 거였다. 걱정하는 마음을 계속 졸이게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고, 친구가 망가지게 내버려 두는 것도 사람이 해도 될 만한 짓이 아니었으니까. 가능하다면 오늘 가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다른 문자들부터 확인하기는 해야 했다.
[잠시만요.]
[응.]
뒤로 가기를 눌러 문자들을 훑었다. 김민준이 보낸 문자랑 이수아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 김민준이 보낸 문자부터 확인했다.
[온유 학생.]
[토요일에 드라마 작가님이랑 감독님이 좀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여동생분이 오디션 본 드라마 기억하고 있죠?]
가제가 두 바보였던가.
[네. 기억하고 있어요.]
바로 숫자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뒤로 가기를 누르고 이수아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너한테도 실장님 문자 왔냐?]
[어.]
답장을 보내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숫자가 사라졌다. 화면에 작성 중 표시가 나타났다. 곧 이수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너는 대본 분석 안 해?]
[대본이 어딨다고?]
[집에 있어. 매니저분한테 받아서.]
웃음이 나왔다.
[공손하다? 분이라고 존칭도 붙이고.]
[초면이나 몇 번 안 본 사람한테 반말하냐 그럼?]
[그래. 네가 처음에는 나한테도 존댓말 했었지.]
[알면 왜 개ㅈㄹ]
[너 내가 욕 줄이랬지]
[네, 오빠.]
[헐 시발 ㅁㅊㄴ]
[나 순간 ㅈㄴ 소름 돋았어.]
[ㅈㄲ]
[집이나 쳐 와.]
[대본 본다고 내가 뭐 되겠어?]
[존나 될 거 같아서 그러지 ㅂㅅ아.]
[개소리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오늘 집 와. 같이 해 나랑.]
[대본 읽는 거?]
[어!!!!!]
[이해력 딸림 혹시?]
[아니]
[그거 너 혼자 해도 되지 않아?]
[ㅆㅂ]
[목요일 금요일 이틀인데 여동생한테 그것도 못 해줘?]
[오빠 대접은 해주고 말해]
[오빠라고 하잖아]
[오빠라고는 생각해?]
[어]
웃음이 나왔다.
[알겠어. 해.]
[이제야 생각이라는 걸 하는구만.]
[말투 봐.]
[너한테 배웠죠? ㅅㄱㅂ]
헛웃음이 나왔다. 뒤로 가기를 눌렀다. 살펴보니 윤가영이 보내온 문자도 있었다. 눌러서 확인했다.
[오늘 집에 와 줄 수 있니?]
[같이 저녁 먹자.]
문자에서 왠지 모르게 윤가영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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