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사고 (16)
* * *
백지수를 따라 거실로 갔다. 거실 소파에 송선우가 앉아 있고, 잿더미는 송선우의 무릎에 편히 누워 있었다. 송선우가 시선을 내려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오른손으로 느긋하게 잿더미를 쓰다듬었다. 백지수가 멈춰서서 송선우를 바라봤다. 송선우가 고개를 들어 백지수를 쳐다보았다.
“나 잿더미한테 참치캔 줬어 지수야.”
“응.”
“말 안 하고 줘서 미안해.”
“괜찮아,원래 잿더미 먹이려고 놓은 거니까.”
“고마워.”
백지수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봤다.
“나 초코 라떼 만들어 줘.”
“알겠어.”
걸어가면서 송선우를 흘깃 바라봤다. 송선우가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 잿더미를 바라봤다. 먹고 싶다는 의사 표현일까. 아니면 그냥 별 뜻 없던 건가. 알 수 없었다. 그냥 3인분을 만들어야 할 듯했다.
주방으로 갔다. 3인분을 만들 게 아니라 나중에도 먹을 수 있게 많이 해두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당장 마실 거는 빨리 만들어야 했다. 냄비를 두 개 꺼냈다. 먼저 초코 소스를 만들었다. 스팀 피처에 우유를 담고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갔다. 우선 스팀을 조금 빼내고 피처를 위로 올린 뒤 공기를 주입했다. 우유가 조금 부풀어 올랐을 때 스팀 피처를 내려놓았다. 스팀을 조금 빼내서 역류해 들어간 우유를 배출시켰다. 따로 만들고 있던 초코 소스를 한 번 휘저어줬다.
선반에서 컵 세 잔을 꺼내 초코 소스를 넣고 스팀 밀크를 부었다.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서 따로 많이 만들고 있던 초코 소스를 봤다. 살짝 휘저어주었다. 그 위에 휘핑크림을 올린 다음 사진부터 찍었다. 머들러를 하나 가져와 내가 마실 잔에 꽂았다. 천천히 섞으면서 입을 열었다.
“초코 라떼 다 만들었어.”
“어.”
백지수가 답하는 소리였다. 곧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것도 있어?”
송선우 목소리였다.
“응.”
“고마워!”
경쾌하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지수의 걸음 소리랑 대조적이었다. 곧 백지수랑 송선우가 주방으로 나란히 걸어오는 보습이 보였다. 오른손으로 머들러를 잡았다.
“섞어줄까?”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사진은 찍었어?”
“응.”
“그럼내 건 섞어줘.”
백지수를 쳐다봤다.
“너는?”
“섞어.”
“응.”
백지수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송선우는 나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둘 다 섞었을 때 송선우가 양팔을 뻗어왔다. 백지수가 나를 흘깃 보고는 오른손으로 잔을 잡아서 송선우에게 넘겨주었다. 송선우가 눈웃음 지었다.
“고마워.”
“응.”
송선우가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온유야.”
“고마워.”
“사진 좀 보내주라.”
“응.”
“나한테도 보내.”
“알겠어.”
송선우랑 백지수한테 따로따로 보냈다. 송선우가 오른손으로 폰을 잡고 엄지로 화면을 누르며 봤다.
“왜 따로 보냈어?”
“그냥.”
“으응. 근데 진짜 잘 찍었다.”
“고마워.”
송선우가 나를 보면서 흐흫, 하고 웃었다. 백지수가 송선우랑 나를 번갈아 보다가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도로 내려놓았다.둘 다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속이 불편했다. 언제 얘기를 꺼내야 할까. 적당한 타이밍이라는 게 있을까? 그냥 송선우가 옆에 있는 지금 다 털어놓아야 하나.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백지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너 묵언 수행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말을 안 해.”
“그냥.”
“그냥?”
“응...”
“근데 왜 뭐 할 말 있는 것처럼 내 눈치 봐?”
“...”
“존나간 보지 말고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어차피 다 털어놓게 돼 있으니까.”
“... 알겠어.”
“어. 해 이제.”
“... 내용이좀 긴데.”
“시간 많으니까 그냥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 응.”
송선우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주말에 이수아의 오디션을 따라갔다. 그날 집에 돌아갔는데 윤가영이 술에 취해서 주방에서 의자에 앉은 채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깨웠는데 안색이 안 좋았다. 그 얼굴에 어머니 모습이 겹쳐져서 침대에서 자게 부축해줬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윤가영이 술을 마시고 주방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어서 흔들어 깨우고 침대에 옮겨줬다. 왜 술을 마시냐 물었는데, 윤가영은 이준권이 자기를 버린 거 같다고 했다.
“미친 새끼네.”
백지수가 툭 말했다.
“... 그치.”
“응. 이어서 말해.”
“응...”
윤가영을 달래고 자는 모습을 본 뒤 나왔다.
“자는 거까지 보고 나온다고.”
“...”
“진짜 존나 스윗하시다.”
“...”
“하아... 계속 말해.”
“응...”
다음날에도 윤가영이 술을 마셔서 챙겨주고 침대에 눕혔다. 내 방에 들어가 잠깐 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주방으로 가서 점심을 챙겨 먹었다. 그러는 동안 윤가영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어머니처럼 죽을까 걱정스러웠다. 위로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윤가영이 수건을 밑에 깔고 앉은 채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위하고 있었다.
백지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개 미친년.”
“...”
“그래서, 네가 눈 돌아 가지고 그 여자 따먹었다고?”
“아냐...”
“그럼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데?”
“...”
송선우가 일어나서 백지수의 옆으로 걸어갔다. 송선우가 양손을 백지수의 어깨에 얹었다.
“조금만 더 들어봐.”
백지수가 고개를 쳐들어 송선우를 봤다.
“넌 다음 내용 알아?”
“응...”
“다 듣고 안 빡쳤어?”
“... 조금 화났지...”
“그래? 네가 조금 화날 정도면, 나는 듣고 나서 그냥 뒤질 거 같은데? 아니면 저 새끼가 내 손에 죽거나?”
“...”
“손 놔.”
“응.”
송선우가 백지수의 어께에서 손을 떼고는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어디씨불여봐.”
“...”
“빨리.”
“... 일단 빠져나오고 여기로 왔어.”
“별장?”
“응...”
“다말해.”
“알겠어...”
콧숨을 내쉬고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왠지 갈증이 더 나는 느낌이었다.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음날에 윤가영이 술 취해 가지고 나 찾으면서 내가 봉사활동하는 데 근처 돌아다니다가 카페에 자리 잡았어. 그때 윤가영이 나한테 전화하고 문자도 보내놔서 바로 갔어. 민폐 될 거 같아서. 그래서 밖으로 끌고 나왔는데, 비도 오고 윤가영도 많이 취해 있어서 조금이라도 술 깬 다음에 혼자 돌려보내야겠다 생각하고 여기로 데려왔어.”
“그래서. 그다음에는.”
“... 미안해.”
“말 이어서 해.”
“... 윤가영 침대에 눕히고 주방에서 술 좀 마신 다음에 화장실 가려고 위로 올라갔는데...”
“왜.”
“...”
“왜 올라갔냐니까? 1층에도 화장실 있잖아.”
“... 세탁기에서네 팬티 찾아서 자위하려고...”
송선우가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입을 벌렸다.
“헐.”
송선우가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내려봤다. 부끄러웠다. 백지수가 어이없는지 피식 웃었다.
“병신 새끼...”
“...”
“계속해.”
“... 윤가영이 침대에서 자는 척하고 있었어. 운동한 사람처럼 약간 땀 흘리고 볼도 좀 발그레해서 가까이 가봤는데, 알고 보니까 노브라로 티셔츠랑 팬티만 입고 자위하고 있던 거였어. 그때 윤가영이 너무 야하게 굴어서너무 흥분돼 가지고 순간 이성 잃고 덮쳐버렸어...다 하고 나서 윤가영이 사후 피임약 먹기는 했는데, 임신했을 수도 있어...”
“... 뭐라고 씨발...?”
“...”
“콘돔 없이 했다고? 내 침대에서?”
“응...”
“이런 미친 새끼가...! 존나 기가 차서 씨발...”
백지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미안했다.
“너 존나 내가 며칠 섹스 안 해줬다고 그래?”
“...”
“씨발. 막말로 선우도 있는데 선우나 따먹지 왜 네 새엄마를 따먹는데?”
“...”
“네가 무슨 존나 예수님이야? 왜 원수를 사랑하는데 개 미친 새끼야...”
송선우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뒤돌았다. 웃음이 나올 거 같아서 입술을 살짝 안에 넣어 깨물었다.
“존나웃지 마 병신아...”
“안 웃었어...”
“좆까 씨발놈아...”
“미안해...”
“씨발 존나 해결되는 거 좆도 없으니까 미안하다고 처하지 말라고... 그냥 미안할 짓을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개새끼야...”
“...”
백지수가 말없이 일어나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따라서 일어섰다. 송선우가 오른손으로 내 오른 손목을 잡았다.
“나도 같이 갈까?”
“나만 가야 될 거 같아. 미안해.”
“알겠어.”
송선우가 내 오른 손목을 놓지 않았다. 왜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온유야.”
“응?”
“성욕 쌓이면 내가 풀어줄 테니까, 자위 같은 거 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주라.”
“... 응...”
송선우가 두 손을 내 어깨에 얹고 까치발을 서 내 왼 귀에 입술을 댔다.
“앞으로 피임약 꼬박꼬박 먹어서 안에 쌀 수도 있게 해줄게.”
“...”
바지 속에서 자지가 빠르게 커졌다.
“응... 고마워...”
“흐흫...”
송선우가 까치발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내 왼 엉덩이를 툭 쳤다.
“이제 가.”
“응.”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성적으로 이래저래 얽히고 만 원인은 내 큰 성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토록 섹스에 미친 이유에는 김세은을 비롯해서 주변 여자들이 미치도록 야해서인 것도 있다고 해야만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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