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 사고 (11)
* * *
외할머니가 오른손을 내 왼 허벅지에 얹었다.
“근데 온유야.”
“네...?”
“결혼은 어떡할 거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결혼을 뭘 어떻게 해. 여자가 셋인데. 진짜 그러려면 아예 결혼 안 하고 다 같이 살기나 해야지.”
외할머니가 고개를 획 돌려 외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당신은 생각을 못 해요?”
“내가 뭘 생각을 못 해? 결혼 얘기 꺼낸 당신이나 생각 못 하는 거지. 대한민국이 일부다처제야?”
“아니, 여자애들 부모님이 있잖아요. 이십 대에나 결혼 안 하고 버티지, 나중 되면 그쪽 부모님들이 결혼 생각 없냐고 보챌 건데. 그때 되면 뭐 어떻게 되겠어요? 숨기고 숨기다 들통나고 말지. 그럼 부모 입장에 금쪽같은 내 딸내미 번듯한 남자한테 보내는 것도 슬프고 아쉬운데, 여자를 둘이나 더 데리고 있는 애한테 시집보내고 싶겠어요?”
“온유 듣고 있는데 말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야 당신?”
“아.”
외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멋쩍게 웃고 계셨다. 외할머니가 오른손으로 내 허벅지를 토닥였다.
“미안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괜찮아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가져야 돼 온유야. 진짜 평생 네 여자친구들이랑 다 같이 살려면.”
“네...”
“근데 그게 되기는 하겠어?”
외할아버지가 물었다.
“그건 온유가 알겠죠. 손자를 못 믿어요?”
“이미 믿음 다 깨버린 놈인데 뭘 또 믿겠어.”
“죄송해요...”
외할머니가 왼손으로 외할아버지의 등을 찰싹 때렸다.
“말 좀 심하게 하지 마요.”
“말은 당신도 심하게 해서 아까 온유한테 상처 줬구만. 뭐가 낫다고 날 꾸짖어.”
“나는 사실 짚다가 그런 거지 당신은 대놓고 상처 주는 말한 거잖아요.”
“뭐가 어쨌건 아프게 한 게 중요한 거지.”
“군말 말고 그냥 미안하다고나 해요.”
“하, 참...”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봤다.
“미안하다 온유야.”
“괜찮아요...”
“근데 너 진짜 네 외할머니 말대로 애들 나이 다 차서 혼령 되면 어떡할 거냐?”
“... 허락 받아야죠...”
“그게 될 거 같으냐? 네가 생각하기에?”
“...”
“그러다 갈가리 찢겨도 난 모른다.”
순간 머릿속으로 백지수 아버지랑 오빠가 양옆에 서서 내 사지를 붙잡아 거열형이라도 하듯 찢는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말 험하게 하지 말랬잖아요.”
“그럴 거면 아예 말을 하지 말라 하지.”
“말하지 마요.”
“싫어.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나 말하고 싶은 거 다 말할 거야.”
외할머니가 콧숨을 내쉬고는 외할아버지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근데 허락은 어떻게 받으려고 하는 거니? 외할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처럼 네가 사귀는 여자친구들 집안에서 너 되게 안 좋게 생각할 건데.”
“당장은 어쩔지 모르겠어요...”
“그래. 지금 바로 해결책이 나오긴 힘들지.”
“너 자식은 낳을 거냐?”
외할아버지가 물었다.
“다 낳겠다고 했어요...”
“그 세 명이 다?”
“네...”
“하 참. 너 어디 중동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것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죠...”
“진심이냐?”
“네...”
“그럼 연예인은 어떻게 하고? 그러고 보니까 너 여자친구 셋이나 있는데 연예인하면서 다 섭섭지 않게 데이트는 할 수 있겠냐?”
“가수 같은 건 해외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데이트는 제가 분발해볼게요...”
외할머니가 내 왼 허벅지에 오른손을 내려놓았다.
“진짜 잘해야 돼 온유야. 너는 세 명한테 시간 나눠 쓰는데 세 명은 다 너한테 시간 쏟는 거니까, 네가 원래 해야 할 거의 세 배는 더 노력하고 사랑해줘야 돼.”
“그래야죠...”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프구나.”
“올라가서 먹을 거예요.”
“아냐. 할머니가 밥 빨리 차려줄 테니까 조금이라도 먹고 올라가. 가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주린 배 잡고 있으면 힘들어.”
“... 그럼 조금만 주세요.”
“그래.”
외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외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뭐 데이트나 사랑이야 어떻게 잘한다 하자. 근데 요즘 기자들이 얼마나 많고 블랙박스니 뭐니 많은데 사람들 눈길은 어떻게 피할 거야. 한 명이랑만 스캔들이 나도 엄청 피해 가는데, 너는 뭐 두 명한테 다리 걸치는 것도 모자라서 팔 한 짝까지 걸치고 있으면 그대로 망하지 않겠냐? 논란 한 번 생기면 죽을 때까지 꼬리표로 따라다녀서 재기 같은 건 꿈도 못 꿀 건데.”
“...”
“결혼도 여자애들 부모님부터 친척까지 다 결사반대할 거고. 너 그 애들 다 임신시키면 임신시키는 대로 한국에서 내쫓기거나 해서 다시는 발도 못 들이고 할 건데. 네가 그걸 감당할 수야 있겠냐?”
“해야죠... 어떻게든...”
외할아버지가 콧숨을 내쉬었다.
“온유야. 들어봐라.”
“...”
“나는 네가 세은이랑만 쭉 갔으면 어떨까 한다. 정말 진지하게. 그럼 네가 골 아플 일도 없고. 너한테 메였던 지수, 선우도 풀려나서, 사랑을 쪼개서 받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자기만 봐줄 사람 찾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하면, 그럼 모두가 다 해피엔딩 아니겠냐.”
“... 제가 아니면 미래가 안 그려진다 했어요.”
“하나같이 다 그랬다고?”
“네.”
“넌 그럼 다 품고 가겠다고 결심한 거겠다?”
“네.”
“얼마나 강조하든 모자랄 정도로 힘들 텐데 정말 괜찮으냐?”
“네.”
“다 모자람 없이 사랑할 자신은 있고?”
“되게 할 겁니다.”
“네 여자친구들이 자식을 세 명 네 명씩 낳아서 네 애가 막 열 명가량 생겼다고 하면, 그 애들 다 부양할 수는 있고?”
“당연하죠.”
“내 말은, 네가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냐 이 말이다.”
“제 말뜻이 그거였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코웃음 쳤다.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한 명이랑만 살든 셋이랑 살든. 결국에는 다 네 깜냥대로 될 거다.”
“잘할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거예요.”
“그래.”
외할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내 왼팔을 툭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에 해도 해도 네 능력이 안 되면, 그땐 상처 안 되게 놓아줘라.”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혹시나 해서 그런 거다.”
외할아버지가 오른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외할아버지가 곧장 나를 내려봤다.
“하나만 피우고 올 테니 조용히 있어라.”
“딱 하나만이에요.”
“어차피 돗대였다.”
“네.”
외할아버지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셔서 병을 비워버렸다. 벽지를 보다가 폰을 켜지도 않은 채 검은 화면을 내려봤다. 내 얼굴이 반사되어 보였다. 못난 얼굴이었다. 보기 싫어서 화면을 켰다. 여섯 시 삼십이 분이었다. 이제 곧 올라가야 할 거였다. 밥을 먹고 간다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아홉 시 언저리쯤이 될지도 몰랐다.
“온유야.”
주방에서 외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상을 차리고 계셨다.
“수저 좀 놓아라.”
“네.”
젓가락을 세 쌍 놓고 숟가락을 하나씩 뒀다.
“앉아.”
“네.”
자리에 앉았다. 외할머니가 갈비찜이 담긴 냄비에서 갈비를 하나 꺼내 빈 그릇에 놓고는 젓가락으로 살을 발랐다. 외할머니가 살점을 집어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먹어봐라.”
“네.”
숟가락으로 밥을 푸고 갈비찜을 위에 올려 입에 넣었다. 언제나처럼 맛있었다. 외할머니의 눈주름이 짙어졌다.
“꼭꼭 씹어먹어라...”
“네...”
외할머니가 자꾸 살점을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그런 걸까. 문득 외할머니가 내 입맛이 엄마의 입맛과 닮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그리는 걸까. 가슴으로 뜨거운 물이 차올라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 저만 주시지 말고 할머니도 드세요...”
“그래...”
외할머니가 살점을 바르고 자기 그릇 위에 한 점을 놓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다시 밥을 한 입 먹었다.
“많이 먹어라...”
목멘 소리였다. 외할머니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 외할머니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잘해야 돼 온유야... 애들 아프게 안 하려면...”
“네...”
“... 외할아버지는 어딨니?”
“담배 피우러 가셨어요.”
“아이고.”
외할머니가 왼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오른손으로 의자를 뒤로 밀면서 몸을 일으켰다.
“한 대만 피우신댔어요.”
“돗대든 뭐든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일단 먹고 있어라.”
“네.”
외할머니가 주방에서 나갔다. 폰을 꺼내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삼십팔 분이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 밥을 다 먹을 즈음에라도 택시를 부르고 올라가야 할 거였다.
이내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데리고 오셨다. 외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자마자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외할아버지가 큼,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컵에 물을 더 부어줬다.
“담배를 피우니까 기침을 하지.”
“고마워.”
외할아버지가 컵을 잡고 물을 마셨다. 외할머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
외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봤다.
“온유야.”
“네.”
“너 나중에 여자친구들 데려와 봐라.”
그럼 윤가영도 데려와야 될 텐데. 도움이 필요했다.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외할머니가 묵묵히 나를 바라보시기만 했다. 외할머니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데려오기 싫으냐?”
“아뇨...”
“... 여자친구들이랑 얘기를 해서, 한 명씩 데려오든 다 같이 오든 해라.”
“네...”
“먹자.”
“알겠습니다...”
젓가락을 뻗어 갈비찜 살점을 집고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짭짤했다.
김세은은 밥을 먹었을까. 지수나 선우는 버스킹 때문에 안 먹었을 거 같고.
이따 지수랑 선우한테 가서 윤가영이랑 했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두려움이 차올랐다. 한편으로는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사는 동안 이런 두려움과 설렘이 끝없이 공존할 것만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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