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사고 (10)
* * *
말해야 하는데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외조부모님의 따스한 눈빛에 나는 한없이 수치스러워지기만 했다. 이마가 뜨거웠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외할머니의 눈빛이 측은함으로 물들었다.
“왜 우니...”
외할머니가 오른손을 뻗어 내 등을 토닥였다. 죽도록 창피했다. 무슨 생각으로 와서 얘기하려 했을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송해요... 제가, 흡... 애초에 그랬으면 안 됐는데... 끅... 여기 오면, 안 됐는데... 의지해도 좋을 분이, 흑...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밖에 없어서...”
“여기 와도 돼... 언제든지 와...”
“흡... 죄송해요...”
“아니 뭐한 것도 없는데 왜 죄송하다 그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등에 외할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넌 사내놈이 뭘 울고 그러냐.”
“당신은 뭔 그런 소리를 해요.”
“농담한 거야, 애 슬픈 거 좀 풀리라고.”
“그게 어떻게 농담이에요.”
“안 웃겼으면 미안하고.”
외할머니가 헛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그 웃음소리가 웃겨서 픽 웃어버렸다.
“봐, 온유도 웃는구만.”
“헛소리하지 마요.”
“헛소리라니. 이젠 좀 괜찮냐 온유야?”
“네...”
“얼굴 닦게 행주 좀 가져다줄까?”
외할머니 목소리였다.
“아뇨 괜찮아요...”
“남자는 그냥 소매로 눈물 닦으면 돼.”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요.”
“저 소매로 닦을게요...”
“거봐.”
눈을 감고 소매로 얼굴을 감싸 눈물을 닦았다. 눈을 떴다. 외할아버지가 왼손에 힘을 주고 내 등을 툭툭 쳤다.
“울지 마라. 잘못했으면 도망치고 울 게 아니라 제힘으로 수습해야 되는 거다.”
“아니 온유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훈계를 해요?”
“이따 얘 말하는 거나 들어봐요.”
“참...”
외할아버지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외할머니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외할아버지를 쳐다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얘기해 줄 수 있어?”
“네...”
침을 삼키고 편의점 커피를 잡아 양손으로 쥐었다. 시선을 커피에 고정한 채 천천히 풀었다. 첫 번째 여자친구는 아이돌 연습생인 김세은이었다. 김세은이 연습생인지라 연인 관계임을 주변에 밝힐 수 없었고, 일정 때문에 만날 시간도 적었다. 김세은이 더 바빠져만 갈 시기에 나는 감정적으로 내몰려서 집 말고 다른 잘 곳이 필요했고, 의지해도 될 만한 사람도 필요했다. 주변 친구 중에서 그런 사람을 찾다가 별장이 있는 백지수에게 잠시 있어도 되겠냐고 부탁했다. 몰랐는데 백지수는 그 별장이라는 곳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자는 곳이 같아지니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백지수가 입이 무거운 친구라서 나는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사정들을 하나씩 털어놓았고, 조금씩 백지수에게 의지했다. 며칠을 함께하다가 백지수가 내게 호감을 표했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던 나는 백지수를 밀어내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이때는 김세은이 데뷔 준비를 하느라 폰도 뺏겨서 아무 연락도 못 할 때였다. 백지수에게는 내가 김세은과 사귀는 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백지수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백지수를 잃으리라 생각했고, 그런 상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백지수와 김세은 둘 다를 기만했다.
목이 메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이 열리고 가장 처음 온 애가 소꿉친구인 송선우였다. 장례식장에서 잠시 같이 얘기하려고 나갔다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송선우가 나를 위로해주면서 힘들면 자기한테 의지해도 된다고 하면서 내게 호감을 표했다.
“아니 온유야 잠깐만.”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호감을 표했다는 게 무슨 소리냐?”
“그게... 키스해 왔다는 의미예요.”
외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아까 그 자취한다는 애도 너한테 대뜸 키스했던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 하아, 하고 탄식했다.
“아이고 세상에.”
외할머니가 잠시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젊은 애들이 다 그러니? 맘에 들면 입술부터 들이밀고 사귀고 그래?”
“... 저도 잘 모르겠어요...”
“됐고 이어서 얘기나 해봐라.”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네...”
나는 송선우에게 안 된다고 했지만 송선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를 좋아하겠다고 답했다.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학교 선생님, 친구들이랑 선후배가 왔고, 나중에 김세은이 찾아왔다. 나는 데뷔 준비를 하느라 여태 연락이 닿지 않았던 김세은에게 백지수와 키스하는 사이가 됐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김세은은 내게 정 힘들면 다른 사람한테 조금은 의지해도 되니까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고, 모든 사실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다 털어놓기만 하라고 하면서 내가 백지수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해줬다.
“그래서 송선우라는 애랑도 사귄 거냐?”
외할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니 일단 들어봐요. 애가 사귄다고도 안 했는데.”
“사귄다고 했어.”
“무슨 소리예요. 아까부터 계속 같이 들었는데 그런 얘기 한마디도 안 했구만.”
“내가 당신 잘 때...”
“아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온유 말 끝낼 때까지 계속 듣기나 해요.”
“아유 예, 알겠습니다.”
멋쩍게 웃었다. 외할머니가 나를 봤다.
“이어서 말하려무나.”
“네...”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차마 송선우한테 강간당했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다. 조금 순화해야 할 듯했다. 입을 열었다. 장례식 후에 나는 백지수에게 김세은과 사귀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백지수는 화를 내고 나를 용서해줬다. 송선우랑 사귀게 된 건 그다음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백지수랑 별장에 있을 때 담을 넘고 안에 들어와서 백지수와 내 사이를 퍼뜨리겠다고 나를 겁박하며 내가 직접 키스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요구에 응했고, 송선우가 어릴 적부터 나를 좋아해 왔다는 신호를 많이 보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괜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송선우는 내 눈물을 보고 억지로 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억지로 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송선우에게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 저 여자를 홀리는 악질적인 놈이고,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정도로 속이 뒤틀려 있다고 고백했다. 이래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냐고 질문을 던졌고, 송선우는 마음이 바뀌기에는 너무 깊이 사랑해버렸나 봐, 라고 답했다. 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송선우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했고, 송선우가 내 세 번째 여자친구가 됐다.
“지수가 허락은 했냐?”
외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네 여자친구들은 왜 그리 관대하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외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얘기할 거 남았으면 마저 해라.”
“네...”
윤가영 얘기를 해야 하는데.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뚜껑을 내려봤다. 거짓을 섞는 것도 이상했다. 아는 유부녀가 불륜으로 고생해서 어머니가 겹쳐 보여 가지고 챙겨주다가 사이가 가까워졌고, 분위기에 타서 섹스해버린 다음에 임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할까. 그냥 자세한 얘기는 아예 건너뛰고 결과만 말해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여자친구 셋을 두고 애먼 여자랑 섹스해버린 쓰레기밖에 안 됐다. 사실 그게 맞기는 했다. 자괴감이 덮쳐왔다. 죽고 싶었다.
“왜 말을 못 하고 그러냐 온유야.”
“아니 좀 기다려봐요. 생각 정리하는 거 같은데.”
머리가 하얬다. 어떻게도 말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오른손으로 내 등을 쓸어 주셨다.
“못 말할 거 같으면 그만해도 돼.”
그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고 싶었다. 모두 묻어두고 싶었다. 내가 윤가영이랑 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걸까. 아닐 거였다. 외조부모님한테는 차마 말할 수 없어도 김세은, 백지수, 송선우한테는 얘기해야 할 거였다. 외할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도망치고 울 게 아니라 잘못을 직시하고 직접 수습해야만 할 거였다.
“저 생각해보니까 다 말한 거 같아요...”
외할머니가 오른손으로 내 등을 톡톡 토닥였다.
“그래.”
“그럼 넌 지금 여자친구가 셋이라는 게 고민이라 이거냐?”
외할아버지가 물었다.
“네...”
“그냥 원래 사귀던 세은이랑만 사귈 수는 없냐? 지수랑 선우 걔들은 최대한 상처 안 받게 잘 달래면서 놓아주고.”
“그게 안 돼요...”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냐?”
답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 애들이 다 너 아니면 죽기라도 하냐?”
고개만 끄덕였다. 외할아버지가 한숨 쉬었다.
“그럼 뭐 어쩌겠냐? 다 책임져야지.”
“네...”
“만약에 네가 책임 못 져서 세은이, 지수, 선우, 그중 한 명 가슴에라도 칼 꽂으면, 난그때부터 다시는 너 안 볼 거다.”
“잘할게요...”
“...당신은 왜 그렇게 말해요...”
“내가 말한 게 어디 못할 말이야?”
가슴이 대바늘로 찔리는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외할아버지가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착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됐다. 죄송은 네 여자친구들한테나 해라.”
“네...”
목멘 소리가 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서울로 올라가면 우선 지수랑 선우한테 다 털어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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