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왜 그래요 (13)
* * *
점심을 먹고 원장실 앞으로 가 노크했다.
“혜린 쌤.”
어, 온유 들어와, 라고 강혜린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손잡이를 잡고 열어 안에 들어갔다. 강혜린이 소파에 앉아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종이랑 볼펜이 있었다. 반대편 소파로 가 앉아 종이에 글자를 채워나갔다.
“온유야.”
“네?”
고개를 들어 강혜린을 쳐다봤다. 강혜린이 종이컵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나중에 또 올 계획 있어?”
“계획은 없고 의향은 있어요.”
“와야 돼. 너 안 오면 삐칠 애들 되게 많아.”
“봉사활동 가야 되면 다른 데보다 여기 고려할게요.”
“가야 할 때만 오겠다?”
“말실수했네요. 봉사활동 장소는 주로 여기로 고려한다는 정도로 바꿀게요.”
“그냥 종종 오겠다고 하는 건 어때?”
“장담하기는 어려워서요.”
“왜?”
“그냥 일정 많으면 못 오고 그럴 수 있으니까요.”
“으음... 그러고 보니까 연예인 한다 했지.”
“네.”
강혜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알겠어. 종이는 다 썼어?”
“거의 다 썼어요.”
“그럼 마저 써.”
“네.”
종이에 휘갈기듯 글씨를 써 내렸다. 볼펜을 놓고 상체를 일으켜 소파에 등을 묻었다. 강혜린이 오른손 손끝으로 종이를 끌어와 반대로 뒤집어 내려보다가 소파에 등을 붙이고 나를 쳐다봤다.
“온유야.”
“네.”
“입구 정문에 우리 언니 있을 거거든?”
강혜린의 언니면 강성연 어머니인가.
“왜 있는데요?”
“그게, 말하면 약간 길거든? 잠깐만 정리 좀 해볼게.”
강혜린이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닥을 내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어젯밤에 나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눈 감고 있을 때였거든? 그때 우리 언니가 나한테 전화해서 너 어딨는지 아냐고 갑자기 물어봤어. 약간 어이없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되물었는데, 그나마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편히 질문할 수 있고 너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고 했고. 그래서 당장 어딨는지는 당연히 모른다고 했고 너 유치원 왔다는 거까지만 얘기했어. 너랑 상의 안 하고 멋대로 말해서 미안해.”
“그건 괜찮아요.”
“고마워. 근데 언니가 그럼 내일도 유치원 오냐고 물어봐 가지고, 온다고 얘기를 해버렸거든. 점심 먹고 간다고까지 말했고. 그러고 언니가 점심 시간대에 딱 오겠다고 하고 얘기 좀 하다가 끊었어.”
“... 네.”
강혜린이 멋쩍게 웃으면서 상체를 기울여와 두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잡았다. 강혜린의 서글서글한 얼굴과 함께 내가 살면서 본 가슴 중 가장 커다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설 것만 같아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강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미안.”
“됐어요.”
“미안해.”
“괜찮다니까요.”
“근데 너 내 눈도 안 봐주고 있잖아.”
민망해서 그런 건데. 억지로 고개를 돌려 강혜린의 얼굴을 마주 봤다. 강혜린이 빙긋 웃고 몸을 뒤로 물렸다. 콧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나 언니는 왜 왔는데요?”
“몰라. 언니가 그거는 얘기 안 해줬어.”
“...”
“그런데 일단 너 기다리겠다고 말로 못 박아두기는 했어. 뭔가 할 말은 있는 거 같은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요.”
“너는 언니한테 별말 듣고 싶지 않은 거야?”
“네.”
“으음... 그럼 뒷문으로 나갈래?”
“뒷문 있어요?”
“응. 급식실 조리하는 곳에 빠져나가는 길 있어. 거기로 갈래?”
“네. 거기로 갈래요.”
“그래. 일어나. 가자.”
강혜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났다.
“누나 근데 저 우산 유리문 쪽에 있는 우산꽂이에 뒀는데.”
“내가 가져와 줄게. 일단 급식실 쪽으로 가 있어.”
“고마워요.”
“그래.”
같이 원장실을 나섰다. 급식실에 가서 강혜린을 기다렸다. 대충 2분이면 오겠지, 하고 예상했는데 도통 오지를 않았다. 불길했다. 설마 강혜린이 강예린을 데리고 오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 강혜린이 내 우산이랑 다른 우산을 가져왔다. 조용히 한숨을 흘리고 강혜린에게 다가갔다.
“왜 우산 두 개예요?”
“내 우산도 가져왔어. 나 좀 늦었지.”
“네.”
“정문에서 언니 딱 마주쳐서 둘러대느라 그랬어.”
“어떤 식으로 말했는데요?”
“너 점심도 안 먹고 가버렸다고 했어. 못 붙잡아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연기 펼치고.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피식 웃었다.
“잘했어요.”
“그럼 이걸로 내 잘못 퉁 친 거로 해주는 거다?”
“네.”
“좋았어.”
강혜린이 내 우산을 건네줬다. 양손으로 받았다.
“근데 우산 두 개 가져온 거는 뭐라 안 했어요?”
“했어. 왜 두 개 가져가냐고. 그거는 급식실 음식물 쓰레기 뒷정리하는 거 도와주려고 우산 두 개 들고 가는 거라고 했어.”
“으음... 누나 언니 급식실 뒤로 오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너 이미 갔다고 했는데 그러겠어?”
“엄청난 직감으로 와서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아냐 아무리 언니래도 그러지는 않을 거야.”
“혹시 모르잖아요.”
강혜린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흐응,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나가서 확인하고 말해줄게.”
아이가 투덜대는 말투였다. 귀여워서 절로 미소 지어졌다.
“감사해요. 근데 누나 나갔을 때 누나 언니가 유치원 안으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아냐 언니 유치원 들어오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해.”
“왜요?”
“애 별로 안 좋아하거든. 아니, 안 좋아하지는 않는데 약간 어쩔 줄 모른다고 해야 하나. 대충 그래서.”
“으음. 네. 그럼 나가서 확인해주세요.”
“그래.”
강혜린이 조리실 쪽으로 가다가 뒤돌아서 나를 봤다.
“근데 너 나 되게 잘 다룬다?”
“무슨 소리예요.”
“뭔 소리기는. 모르는 척하네.”
픽 웃었다.
“누나 지금 진짜 애 같은 거 알아요?”
“그래 어른 갖고 애니 뭐니 해라.”
“지금도 애 같아요.”
“애는 너거든.”
강혜린이 뒤돌아서 조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다가 같이 가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멈춰섰다. 강혜린이 문을 열고 밖에 나서 문을 닫았다. 얼마 안 가 문이 다시 열리고 강혜린이 내게 다가왔다.
“언니 없어.”
“진짜죠?”
“어. 내가 언니를 얼마나 배신해봤는데.”
피식 웃었다. 강혜린도 눈웃음 지으면서 왼손으로 입을 가려 킥킥 웃었다. 강혜린이 워낙 아이스러운 순수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강혜린이랑 있으면 나도 어려지는 느낌이었다. 강혜린이 오른손으로 손 부채질했다.
“근데 나 사실 언니 처음 뒤통수쳐보는 거야.”
“그래요?”
“응. 그래서 지금 되게 신나고 떨려. 흥분돼.”
“위험하네요.”
“위험하다 이러네.”
강혜린이 왼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툭 쳤다. 강혜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가슴 운동도 해?”
“하죠?”
“대박이네.”
“겉으로는 안 보여요?”
“아니 보이긴 보이지. 근데 또 막상 손대보니까 다른 느낌이야.”
“위험하네요.”
강혜린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강혜린이 아이처럼 웃었다.
“너 말하는 거 진짜 웃기다.”
“고마워요. 저 이제 가볼게요.”
“그래. 이제 나한테 빚졌으니까 갚아야 돼.”
“무슨 소리예요?”
“언니한테 처음으로 통수도 쳤고 심부름도 다 일일이 했는데 빚진 거지.”
“억지잖아요.”
“그래도 설득력은 있잖아.”
“그럼 뭐로 갚아야 하는데요.”
“몰라. 나중에 내가 한 번 부르면 와주는 거 어때?”
“유치원으로요?”
“그렇게 쓸 수도 있고?”
“장소 안 정해두는 건 너무한데요? 거의 백지수표 수준인데?”
강혜린이 히 웃었다.
“장난이야. 웬만하면 애들이 너 보고 싶다 할 때 유치원으로 부를 거야.”
“유치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네요?”
“에이.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착취는 안 할 거야.”
“그런 말 덧붙이니까 더 무서워요.”
“괜찮을 거야.”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강혜린이 어, 하고 소리내며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ㅡ날 향해 던져준 너의 다정한 그 말에
나도 한순간에 주연이
투바투의 ‘drama’, 내가 부른 버전이었다. 유치원에서 부르던 것을 음원으로 바꿔서 쓴 모양이었다. 강혜린이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화면을 봤다. 언니, 라고 떠 있었다. 강혜린이 나를 쳐다보고 오른손 검지를 자기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고개만 끄덕였다. 강혜린이 통화를 연결하고 오른 귀 가까이에 댔다.
“왜?”
ㅡ나 유치원 안에 들어가도 돼?
“응?”
강혜린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며 왼손으로 휘휘 손짓했다. 가라는 것 같았다.
“응. 들어와.”
ㅡ알겠어.
강혜린이 왼손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우산을 왼손목에 걸고 양손을 마주 흔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어?”
ㅡ응. 네가 혹시라도 나한테 그냥 가버렸다고 거짓말했을까 봐.
강혜린이 나를 보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멈추라는 듯했다. 그대로 멈춰섰다.
“나 언니한테 거짓말한 적 없잖아.”
ㅡ그치. 그래도 의심해서 안 좋을 건 없잖아.
“손해 있지. 언니 시간만 버리는데.”
ㅡ그래도... 온유 볼 가능성 생기는 거면 감수 가능하지.
강예린은 뭔데 온유라고 되게 친숙하게 얘기하는 걸까.
“그럼 애초에 들어오든가 하지.”
ㅡ그렇긴 한데, 용기가 좀 안 서서.
“무슨 용기?”
ㅡ그냥... 막상 오니까 온유 마주하기 무섭고 해서.
“으응... 알겠어. 원장실로 와.”
ㅡ응.
“끊을게.”
ㅡ그래.
강혜린이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넣고는 양손을 흔들었다. 마주 두 손을 흔들고 낮게 고마워요, 라고 했다. 강혜린이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리실 뒷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바로 우산을 펼치고 빗속을 걸어갔다. 빗방울이 투두둑 바닥을 때렸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폰을 가져오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게 생각났다. 빗소리를 노래 삼아 걸어야 할 듯했다.
토도독, 토독, 하고 작게 터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자꾸만 강예린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왜 나를 다그칠 때와는 사뭇 다른 음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을까. 왜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왜 굳이 찾아왔으면서 막상 마주하기 무섭다고 했을까.
한숨을 내쉬었다. 비 탓에 기온이 찬 것인지 입김이 생겼다. 피어오른 김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