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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247화 (247/438)

〈 247화 〉 왜 그래요 (12)

* * *

알람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가 섞여 들었다. 느리게 눈을 떴다. 어두운 창밖으로 빗방울을 쏟고 있는 먹구름이 보였다. 비는 싫은데. 왼쪽에 백지수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학교로 갔나. 옆으로 구르고 오른손을 뻗어 폰을 잡았다. 알람을 끄고 잠금을 푼 다음 바로 문자 앱을 켰다. 백지수부터 찾았다.

[진짜 ㅈㄴ 잘 자시네요]

[그러다 나중에 가수 되면 스케줄 소화 가능하겠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할 수 있습니다.]

뒤로 가기를 눌렀다. 문자를 훑어보는데 새벽에 온 윤가영한테서 문자가 있었다. 괜히 놀라서 한 번 더 뒤로 가기를 눌렀다. 한숨 쉬었다. 왜 윤가영은 나한테 자위하는 모습을 들켜서는. 도로 문자 앱을 켰다. 볼까. 어차피 보라고 보낸 문자이니 그냥 보면 될 텐데 괜히 고민됐다. 일단 침대에서 벗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 마냥 화면을 내려봤다. 문자를 본다고 답장할 의무도 없는데 그냥 보면 될 듯했다. 눌러봤다.

[미안해 온유야.

그런 추태를 보였으면 안 됐는데 보게 해서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몇 번이고 나를 위로해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는 너한테서 은혜만 입는데, 반대로 나는 너에게 자꾸 실수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해. 더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할게.

정말 미안해 온유야. 엎드려 빌게. 진짜 미안해.]

잘못인 줄 알면 왜 그런 걸까. 한숨이 나왔다. 냉장고에서 어제 먹다 남긴 떡볶이를 꺼내 냄비에 옮겨 불을 켜 데웠다. 배를 채우고 씻은 다음 우산을 챙겨 유치원으로 향했다. 애들 볼 때 심각한 표정이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표정을 풀어야 할 듯했다. 정문 앞에 서서 우산을 접고 바닥으로 툭툭 내려쳐 빗물을 약간 털어낸 다음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꽂이에 우산을 꽂고 원장실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라고 강혜린이 말하는 소리가 문을 넘어왔다.

“네.”

문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있는 강혜린이 나를 쳐다보았다.

“너 비 오는데 어떻게 왔어?”

“그냥 걸어왔죠.”

“너 어디서 살아?”

“안 알려줄 거예요.”

강혜린이 씨익 웃었다.

“아깝다.”

픽 웃었다.

“누나 진짜 큰일 나려고 그래요?”

“무슨 소리야?”

“이제 또 순수한 척하려고 발뺌하신다.”

“어? 너 어른 가지고 그렇게 말할래?”

“죄송해요.”

“넌 사과하는 게 빨라서 좋아.”

“저는 누나 화법이 좋아요.”

강혜린이 눈웃음 지으면서 오른팔을 테이블에 댄 채 오른손 검지로 나를 삿대질했다.

“너, 너. 너 그러다 2년 뒤에 어떻게 되나 봐.”

“누나 서른 살 되는 해에요?”

“이 씨.”

강혜린이 왼손으로 테이블을 약하게 탁, 하고 쳤다.

“너 진짜 죽을래?”

웃음 지었다.

“잘못했어요.”

“왜 잘못을 해.”

“재밌어서요.”

“넌 내가 웃기니?”

“네. 엄청 웃겨요.”

“아.”

강혜린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의자가 뒤로 젖혀졌다. 강혜린이 오른팔을 들어서 눈앞을 가렸다.

“누나 왜 그래요?”

“갑자기 현타 와서.”

“왜요?”

“너 때문이지.”

“네?”

“네가 나 나이든 모태솔로인 거 상기시켜버렸잖아. 30년 모솔이면 진짜 대마법사 되는 거 아니야 나?”

“어머.”

강혜린이 오른팔로 눈을 가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

“누나 웃는 거 보여요.”

“나는 웃으면 안 돼?”

“아뇨. 누나 웃는 거 보기 좋아요.”

“너 진짜... 말 잘 골라서 해.”

“저 말 예쁘게 하지 않아요? 보통 그렇다고 듣는데.”

“그래. 말 예쁘게 하는 거는 맞는데, 그런 말 들을 거 같은데, 예쁘게 해도 너무 예쁘게 해서 문제야.”

“어렵네요.”

“난 네가 더 어려워.”

“네.”

강혜린이 오른팔을 걷고 눈을 떠서 나를 쳐다봤다. 황당한 듯 보였다.

“아니 대화를 이렇게 뚝 끊어버린다고?”

“딱히 답할 말이 없어서요. 그리고 애들 봐야 되잖아요.”

“으응...”

강혜린이 두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의자 각도를 원래대로 돌렸다.

“애들 봐야 되는 거는 맞지...”

강혜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픽 웃었다. 반응이 너무 귀여웠다.

강혜린이 나를 올려봤다.

“왜 웃어?”

“누나 귀여워서요.”

“... 너 2년 뒤에 봐. 폰 번호 바꾸지 말고 있어야 돼.”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떡하시게요?”

“몰라. 나중의 내가 생각하겠지.”

“안 바꿀게요.”

“그래. 고마워.”

“네.”

강혜린이 살폿 웃었다.

“너 진짜 나 갖고 노는 느낌이다.”

“아니에요.”

“아니야. 네가 나 이겼어.”

“그냥 얘기한 거인데 이기고 지고가 어딨어요.”

“네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졌다 이 말이지.”

“너무 과장이에요.”

“어른 말씀인데 이렇게 토 다는 거 보면 내가 맞아.”

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강혜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피식 웃었다.

“네. 누나가 이겼어요.”

“좋았어.”

강혜린이 뒤돌아서 두 발로 바닥을 차 의자 바퀴로 이동해서 냉장고를 열었다. 강혜린이 콜라를 꺼내서 한 모금 마시고 크, 소리를 내며 눈을 찡그렸다. 강혜린이 콜라를 도로 넣고 냉장고를 닫은 다음 원래 자리로 돌아와 나를 쳐다봤다.

“뭐 한 거예요?”

“그냥 청량감 즐기기.”

웃음이 나왔다. 강혜린은 웬만한 아이보다도 순수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누나 왜 여태 남친 없던 거예요?”

“너 그런 거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한테는 굉장히 큰 상처가 된다는 거 알아요?”

“아니 저 진짜 누나 매력 너무 넘치는데 왜 없나 궁금해서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예요.”

“궁금해?”

“네.”

“그걸 알았으면 내가 모솔이었겠니?”

“아니 정말 모솔될 만한 사람은 본인이 다 알죠.”

“그럼 나는 내가 왜 모솔인지 알겠네?”

“아뇨. 누나는 제가 알 거 같아요.”

“뭔데?”

“그냥 누나가 오는 남자들 다 쳐내고 쳐내다가 이제 옆에 애들밖에 없는 거예요.”

강혜린이 콧숨을 내쉬었다.

“근데 맘에 안 들면 쳐내야지.”

“그러니까요.”

“... 근데 그러고 보니까 너도 애네.”

“아뇨. 저는 애 아니죠.”

“너 애 아니면 네가 내 남자친구라도 되어줄래?”

“생각해보니까 저 애 맞는 거 같아요.”

“그럴 줄 알았어.”

강혜린이 입술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빙글빙글 웃었다. 강혜린이 오른손 검지를 세워 나를 가리키고 허공을 휘둘렀다.

“너 나가!”

나가라고 말하는 발성마저도 애가 떼쓰는 것 같았다.

“네. 이따 봐요.”

“그래. 이 나쁜 녀석아.”

“네. 잘 있어요.”

“어.”

뒷걸음질 쳐서 원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바로 반으로 향했다. 왼손으로 입 쪽을 살짝 쓸어서 웃음기를 지워내고 문 앞에 섰다. 여자가 피아노 반주에 동요를 부르는 소리에 이어서 아이들이 따라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강은이 선창하고 아이들이 따라부르는 건가? 오른손으로 문을 열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유강은이랑 옹기종기 모여서 유강은을 쳐다보는 애들이 보였다. 유강은이 노래 부르며 피아노를 치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유강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강은이 바로 입을 꾹 다물고 피아노 연주를 멈췄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계속 불러주세요 강은 선생님.”

“...”

“온유 쌤!”

하윤이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내게 도도도 달려왔다. 무릎을 굽히고 자연스럽게 하윤이를 안아 들면서 일어났다.

“흐흫!”

발뒤꿈치를 써서 신발을 벗고 바닥으로 올라왔다. 두 팔에 반동을 주면서 하윤이의 몸을 들썩여줬다. 하윤이가 까르르 웃었다. 애들이 나를 쳐다보며 안녕하세요 온유 선생님, 이라며 인사해왔다.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일일이 이름을 불러 답해줬다. 인사를 다 나누고 유강은을 바라봤다.

“빨리 이어서 노래 불러주세요.”

“저 노래 잘 못 부르는데...”

“밖에서 들었어요. 노래 잘 부르시던데.”

“...”

“맞아요! 강은 선생님 노래 잘 불러요!”

김민정이 말했다.

“으아! 강은 선생님 얼굴 빨개!”

김정수가 말했다. 홍시가 된 유강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유 선생님이랑 사겨요!”

김정수가 또 말했다. 맥락 없는 몰아가기였다.

“사겨요!”

“사겨요!”

“사겨요!”

이번에는 물타기였다. 김정수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자기가 주도해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나중에 뭐가 돼도 크게 될 것만 같았다.

성하윤이 두 손으로 내 볼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하윤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윤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윤이 왜 화났어?”

“저 안 봐주구, 들썩들썩도 안 해줘서요.”

“미안해. 까먹었다.”

두 팔에 반동을 줘 하윤이를 들썩여줬다. 하윤이의 구겨진 얼굴이 차츰 풀렸다. 얼마 안 가 하윤이의 입가에 미소가 띠어졌다.

“흐흫...”

하윤이가 웃으면서 이마를 내 왼 어깨에 박았다. 고개를 돌려 유강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유강은의 입이 벌어졌다가 도로 다물렸다.

“말씀하세요.”

“아...”

유강은이 잠시 눈을 굴려 애들을 보다가 나를 쳐다봤다.

“저만 부르기 창피해서 그런데... 같이 부르실래요...?”

“네 좋아요.”

유강은이 오른손으로 피아노 의자의 옆쪽을 톡톡 내려쳤다.

“그럼 이리로 와주세요...”

옆에서 앉아 가지고 같이 부르자는 건가. 눈이 크게 떠졌다.

“싫으면 말구요...”

“아뇨. 그래요. 불러요, 노래.”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하윤이를 바라봤다.

“하윤아 내려가자.”

“싫어여...”

“선생님 노래 불러야 돼요.”

“히잉... 그럼 이따가 안아줘야 돼요...”

미소 지어졌다.

“그래요.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네...”

하윤이를 밑에 내려주고 유강은의 오른편에 앉았다. 피아노의 보면대에 동요 ‘참 좋은 말’의 악보가 프린트된 a4 용지가 있었다. 유강은이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피아노 쳐주실 수 있으세요...?”

“네. 제가 칠게요.”

유강은이 왼쪽으로 살짝 엉덩이를 옮겼다. 유강은의 옆에 붙고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어디부터 부를까요?”

“어...”

유강은이 고개를 내려 아이들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할까 얘들아?”

아이들이 다 같이 네, 라고 답했다. 유강은이 흡족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봤다.

“처음부터 하죠. 한 줄 부르고 애들 따라 부를 수 있게 똑같은 반주 쳐주면 돼요.”

“네. 바로 할게요.”

“네,”

반주를 시작했다. 유강은을 바라봤다. 유강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같이 입을 열고 성대를 울렸다.

ㅡ사랑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이어서 같은 멜로디를 쳤다. 아이들이 바로 따라 불렀다. 듣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ㅡ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 뛴대요

익숙한 멜로디에 가사라서 그런지 처음 쳐보고 선창하는 것인데도 너무 쉬웠다. 악보를 보다가 한 번씩 고개를 뒤로 돌려 아이들을 봤다.

ㅡ나는 나는 이 한마디가

정말 좋아요

아이들을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서 유강은을 보았다. 유강은이 날 계속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유강은이 수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모르는 척하고 다음 라인을 피아노로 치면서 불렀다. 유강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같이 불렀다.

ㅡ사랑 사랑해요

아이들이 반만 노래를 따라불렀다. 나머지 반은 노래는 안 따라부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유강은이 뒤를 보면서 오른손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얘들아, 노래 따라 불러야지, 라고 말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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