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왜 그래요 (8)
* * *
점심을 먹고 종이컵을 찾아 물을 2/3 정도 채운 다음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들어와서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컵을 왼손에 옮기고 오른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꺼내 바로 뜯은 다음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오른손에 든 유강은이 왼편에 왔다.
“무슨 약이에요?”
“그냥 진통제예요.”
“어디 아파요?”
“저 팔이요. 그냥 근육통이라 하루 치만 처방받았어요.”
“으음... 아프면 안 되는데. 피아노 칠 때 괜찮았어요?”
“괜찮아요.”
“그래요.”
뭔가 대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조금 어색했다. 유강은이 입을 열었다.
“이제 바로 가는 거죠?”
“그쵸. 원장실 들어가서 써야 하는 것만 쓰고 가야죠.”
유강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커피를 홀짝였다. 시선은 계속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거 같아 가만히 기다렸다. 유강은이 눈을 크게 떴다가 눈웃음을 짓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잘 들어가요.”
마주 미소 지었다.
“네. 강은 쌤도요.”
“그래요.”
먼저 뒤돌아서서 원장실을 향했다. 느리게 걷는 중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뒤를 봤다. 유강은이 반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유강은이 고개를 왼쪽으로 획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멋쩍게 웃었다. 유강은도 웃음 지었다. 몸을 약간 돌려 괜히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유강은도 나랑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열었다. 뒤돌아 다시 원장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렸다.
“저 들어갈게요.”
응, 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있던 강혜린이 종이랑 볼펜을 잡고 일어나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상체를 기울여왔다. 안 그래도 커서 잘만 보이는 가슴이 더 부각 되었다. 억지로 시선을 올려 강혜린의 얼굴을 보며 걸어갔다. 강혜린이 눈살을 찡그렸다. 왠지 야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윤가영이 떠올랐다. 강혜린의 옅은 분홍색 입술이 열렸다.
“빨리 받아.”
“아. 네.”
양손으로 받고 익숙하게 써 내렸다. 강혜린이 팔짱을 끼고 내가 종이를 채워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급한 일 있어?”
“아뇨 딱히 없어요.”
“그럼 왜 그렇게 빨리 써?”
“저도 모르겠어요.”
“으응.”
종이랑 볼펜을 강혜린에게 건넸다. 강혜린이 볼펜을 연필꽂이에 놓고 서랍을 열어 종이를 집어넣었다. 강혜린이 두 손을 책상에 대고 나를 쳐다봤다.
“잘 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느껴졌다. 강혜린이 이상한 듯 왼눈을 치켜세웠다.
“왜 놀라?”
“아니 그냥 누나가 저 붙잡고 얘기 조금 하다가 보낼 줄 알고요.”
“나도 눈치는 있어.”
“눈치라뇨?”
“너 뭐 일 있는 거 아냐?”
“딱히 없는데요?”
“그래?”
강혜린이 컴퓨터 의자에 털썩 앉고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친 다음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상하네...”
“뭐가요?”
“너 순간 표정 되게 안 좋았어.”
“그래요?”
“어. 내 얼굴 보고 표정 안 좋아진 건가 싶어서 순간 가슴 철렁였어.”
“...”
윤가영을 떠올렸을 때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나. 그럴 수도 있을 듯했다. 괜히 걱정되고 마음 쓰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뇨 저 일 없어요.”
“그럼 암울한 표정 짓지 마. 나 심장 떨려.”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안 지을게요.”
“그래.”
강혜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원장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이 안 돼서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강혜린이 내 앞에 멈춰 서고 나를 쳐다보면서 두 팔을 벌렸다.
“누나가 안아줄게.”
웃음이 나왔다. 강혜린이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까지 나와줬는데 성의 무시할 거야?”
“아뇨. 여기까지 나와준 거랑 말해준 것만으로 감사해요.”
“아냐 됐어. 기왕 나왔는데 포옹 받아.”
“알겠어요.”
두 팔을 벌려 강혜린을 안았다. 강혜린이 나를 꼬옥 안아줬다. 커다랗기 그지없는 가슴이 살짝 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부드럽기도 엄청 부드러웠다. 내가 본 중 가장 큰 가슴답다고 말해도 부족함 없는 수준이었다. 자지에 신호가 갔다. 오른손으로 빠르게 강혜린의 등을 톡톡 쳤다. 얇은 옷을 입었는지 아주 짧은 순간만 닿았는데도 브라 뒷부분이 느껴졌다.
“위로됐어?”
“차고 넘쳐요.”
강혜린은 나를 빨리 놓아야 했다. 위기의식이 머리를 지배했다. 두 발을 조금씩 뒤로 옮겨 몸을 억지로 뺐다. 자지가 꼿꼿이 발기했다. 다행히 귀두가 강혜린의 다리에 닿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한숨이라도 쉬고 싶었다.
“진짜 충분해요.”
“그래 그럼.”
강혜린이 나를 풀어줬다. 나도 강혜린을 놓아줬다. 강혜린이 나를 올려봤다.
“잘 가.”
“네.”
“일 잘 해결하고.”
웃었다.
“저 진짜 일 없어요.”
“알겠어. 너무 마음고생만 하지 마.”
“진짜 없다니까요.”
“그래.”
강혜린이 오른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내심 위로되는 느낌이었다. 조금 놀랍기도 했다. 강혜린은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러운 통찰력도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게 어른이 하는 거지.”
“누나 좀 달라 보이네요.”
강혜린이 피식 웃었다.
“너 나 몇 번 봤다고 그런 얘기를 해?”
“그러게요?”
“너 진짜 웃긴다.”
“감사해요.”
“뻔뻔하기도 하고. 근데 밉지 않아. 진짜 사람이 잘생기고 봐야 하나?”
“금칠해주지 마요.”
“아니 너 잘생겨서 팩트 말하는 거야. 금칠 아니고.”
“부끄러워요.”
강혜린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오른손을 말아쥐어 내 가슴을 약하게 한 대 툭 쳤다.
“그게 부끄러운 얼굴이야?”
“네.”
“진짜 모르겠다.”
“뭐를요?”
“너 여친 사귄 적 없다고 한 거.”
멋쩍게 웃었다. 강혜린이 팔짱을 끼고 팔을 가슴 위에 얹었다.
“사실 연애한 적 있구나?”
“아니에요.”
“거짓말한다.”
“누나 또 어린애 말투 나왔어요.”
“에, 말 돌린다.”
웃음이 나왔다. 강혜린이 입술을 내밀었다. 이 모습도 애들 같았다.
“왜 또 웃는데?”
“누나 너무 귀여워서요.”
“어?”
강혜린의 두 눈이 커졌다.
“너 또 큰일 날 소리 한다?”
“이게 왜 큰일 날 소리예요?”
“나 너한테 반하고 잘못 저지르면 감옥 들어가잖아.”
“어머.”
강혜린이 쿡쿡 웃으면서 왼손으로 약하게 내 가슴을 때리고 그대로 대었다.
“어머는 또 뭐야.”
“누나가 감옥 갈 정도의 죄를 저한테 저지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제 안의 여성성이 튀어나와 버렸어요.”
강혜린이 왼손을 스르르 내리고 시선을 올려 천장을 보고 아, 하고 소리를 낸 다음 다시 내 얼굴을 마주 봤다.
“너 때매 진짜 미치겠다 내가.”
“미치지 마요.”
“그럼 안 미칠 수 있게 조절 좀 해줘.”
“노력해볼게요.”
강혜린이 빙긋 웃었다.
“그래. 나 많이 가지고 놀았으면 이제 가 봐.”
“가지고 놀았다뇨. 함께 즐긴 거죠.”
“그래 나도 즐거웠으니까 이제 작별하자.”
“그래요.”
“잘 가. 일 잘 해결하고.”
“알겠어요.”
강혜린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결국엔 인정했구나.”
“누나가 몰아가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일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어요.”
“알겠어. 믿어줄게.”
“네.”
강혜린이 픽 웃고는 시선을 밑으로 내리고 왼손 검지, 중지, 약지로 테이블을 쓸면서 천천히 자리로 걸어갔다. 나도 문 쪽으로 걸어가고 뒤돌아봤다. 어느새 의자에 앉은 강혜린이 나를 쳐다보며 두 손을 흔들었다.
“진짜 잘 가 온유야.”
마주 두 손을 흔들었다.
“누나도 잘 있어요.”
“응.”
밖에 나가고 원장실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반 앞에 멈춰 서서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멍하니 있던 김정수와 눈이 마주쳤다. 김정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유 선생님!”
반에 있는 애들과 유강은의 시선이 다 나를 향했다. 유강은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하고 가려고요.”
“아 네.”
유강은이 미소 지었다.
“잘 가요.”
책을 읽고 있던 성하윤이 두 팔을 벌린 채 도도도 달려왔다.
“저 안아주고 가요!”
미소 지어졌다.
“알겠어.”
무릎을 꿇고 하윤이를 안아 들면서 일어났다. 저도 안아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결국에는 다가온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 들어주고 나서야 뒷걸음질 칠 수 있었다.
“강은 선생님도 안겨요!”
김정수가 유강은을 쳐다보며 외쳤다. 정리를 하느라 일어서 있던 유강은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김정수가 이번에는 나를 쳐다봤다.
“온유 선생님 우리 반 애들 다 안아줬는데 강은 선생님만 안 안아주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아는 단어 내에서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말하려 한 노력이 느껴졌다. 가상스러웠다. 안쪽으로 도로 들어가 허리를 약간 숙이고 왼손으로 정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허리를 펴 유강은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렸다. 아이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유강은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왼손으로 부채질했다. 얼굴이랑 목이 붉어진 것이 눈에 보였다.
“빨리 와주세요. 저 갈 수 있게.”
“아니...”
유강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유 선생님은 안 창피해요?”
“창피해요. 선생님이 창피해할수록 더 창피해져요.”
“... 알겠어요.”
유강은이 두 손을 살짝만 내려서 눈만 보이게 한 채 내게 걸어왔다.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듯 쳐다봤다. 유강은이 내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송선우랑 비슷한 크기의 부드러운 가슴과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순간 당황해서 눈이 크게 떠졌다. 뒤늦게 유강은을 껴안았다.
“안아 들어요!”
김정수가 외쳤다. 얜 또 왜 이렇게 적극적이래.
“잠깐만 들게요.”
“네에...”
두 팔로 유강은의 허리를 감았다. 허리를 살짝 뒤로 젖혀 유강은을 들었다. 유강은이 두 발을 바닥에서 떼고 내게 몸을 맡겼다. 유강은의 가슴과 배가 내 상체에 완전히 맞닿았다. 자지가 꼿꼿해졌다. 빠르고 안전하게 유강은을 내려놓았다. 유강은이 팔을 풀고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아이들을 내려보았다. 하윤이가 얼굴을 찡그린 채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괜히 찔려서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됐지 얘들아?”
“네!”
“온유 선생님 강은 선생님이랑 사겨요!”
“사겨요!”
“사겨요!”
멋쩍게 웃었다. 두 손으로 양쪽 뺨을 감싸고 있는 유강은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저 이제 가볼게요.”
“네... 잘 가요...”
“잘 있어 얘들아.”
“잘 가요!”
“도망가지 마요!”
“얘들아 내일 봐!”
“네!”
“내일 봐요!”
오른손을 흔들어주고 뒷걸음질을 친 다음 달려서 유리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 그대로 계속 뛰어서 달아났다. 적당히 멀어졌을 때 속도를 줄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유강은은 애들한테 계속 시달릴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미안했다. 폰을 켜고 케이크랑 커피 세트를 찾아서 메시지는 죄송해요, 라고 써서 기프티콘을 보냈다. 내용이 너무 짧다 싶어서 내일 봬요, 라고 쓴 것을 하나 더 보내고 저 대신 정수 혼내주세요, 라고 쓴 것을 하나 더 보내서 기프티콘을 총 두 개 더 보냈다.
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사이가 더 어색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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