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 왜 그래요 (6)
* * *
컵 두 잔을 챙긴 다음 피자를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윤가영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윤가영이 문을 등지는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자요?”
반응이 없었다. 다가가서 두 컵이랑 피자 한 판을 일단 침대에 내려놓고 무릎으로 기어올라 왼손으로 시트를 짚고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오른 어깨를 잡아서 약하게 흔들었다.
“일어나요.”
“으응...”
윤가영이 몸을 뒤척여 정자세로 누웠다. 두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피자 먹어요.”
윤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겠어...”
살폿 웃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컵 두 잔이랑 피자를 올려놓고 의자랑 물티슈를 가져왔다. 윤가영이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손 씻으려는 건가. 윤가영이 있던 자리 반대편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윤가영이 천천히 걸어와 침대에 올라가서 두 손등 두 발로 기어 안쪽으로 가고는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먹게요?”
윤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뇨 맞아요.”
윤가영이랑 내 사이에 피자를 옮겨놓고 바로 열었다.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토핑 중에 파인애플이 가장 눈에 띄었다. 윤가영이 콜라 뚜껑을 열어 컵에 따랐다.
“그런데 콜라 흘리면 어쩌려고요?”
윤가영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안 흘리면 되잖아.”
“그건 그렇죠.”
“그니까.”
윤가영이 피자 뚜껑 위에 컵을 올렸다.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그냥 쟁반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냐 괜찮을 거야.”
“... 난 몰라요.”
“응.”
“그럼 먹죠.”
“그래.”
윤가영이 그리 말하고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안 먹어요?”
“너 먼저 먹어야지.”
“뭘 그런 걸 신경 써요.”
윤가영이 히히 웃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피자 조각을 하나 잡아 올리고 한 입 먹었다. 달고 짭짤했다. 맛있기는 했다. 그런데 굳이 이 피자를 먹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피자를 만드는 집이면 다른 메뉴를 시켰을 때 더 맛있을 거 같은데.
윤가영이 빙긋 웃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맛있지?”
“... 네.”
“으음... 별로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당신도 먹어요 빨리.”
“알겠어.”
윤가영도 피자를 집어 들고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뭔가 되게 어려 보였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서른이 넘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드는 외모이기는 했는데 무얼 먹을 때나 웃을 때는 정말 이십 대로 보였다.
말없이 끝부분만 남긴 채 한 조각을 해치우고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윤가영 씨.”
윤가영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응?”
“...”
왠지 지금은 왜 술을 마셨는지 물어보기 좋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아뇨 그냥 불러 봤어요.”
윤가영이 눈웃음 지었다.
“뭐야 이상하게.”
“그럴 수도 있죠.”
“응.”
윤가영이 피자를 다시 한 입 베어 물었다. 갈릭디핑 소스에 피자 끝부분을 찍고 입에 넣었다. 질문은 그냥 피자를 다 먹고 나서 해야 할 듯했다.
윤가영이 피자 끝부분에 디핑 소스를 찍고 한 입 베어물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음?”
윤가영이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모르겠어.”
픽 웃었다.
“모른다는 게 뭐예요.”
“몰라. 할 말이 있던 거 같기도 한데 까먹은 건지 아님 원래 할 말이 없던 건지 뭔지...”
“복잡하네요.”
“그니까. 나 좀 이상하지.”
“아뇨 안 이상해요. 그냥 먹던 거 먹어요.”
“응.”
윤가영이 끝에 디핑 소스를 찍어 남은 부분을 먹어치우고 나를 쳐다보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마워 온유야.”
“뭐가요?”
“피자 사줘서.”
“더 안 먹어요?”
“더 먹을까?”
“먹어요. 당신 좋아하는 메뉴로 산 건데.”
“으응...”
“배부르기라도 한 거예요?”
“음, 약간?”
“억지로 먹지는 마요.”
“아냐. 억지로 먹는다고 할 수준은 아니야.”
“그럼 먹어요.”
“응.”
윤가영이 한 조각을 떼어놓고는 나를 바라봤다.
“근데 나 좀 사육당하는 거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니까, 아 근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이상한데.”
“그냥 말해요.”
“... 진짜?”
“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빨리 말해요.”
“으응... 나 약간 너한테 길들어지는 거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윤가영이 눈꼬리를 축 내렸다.
“나 괜히 말했지...”
“네.”
“...”
윤가영이 시선을 내리고 말없이 피자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피식 웃었다. 윤가영이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봤다.
“아뇨 그냥. 신경 쓰지 마요.”
윤가영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얕게 한 번 끄덕였다.
서로 말을 걸지 않고 피자를 한 조각 먹어치웠다.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윤가영도 콜라를 마셨다.
“다 먹었어요?”
“그치...?”
“왜 의문형이에요?”
“그냥 네가 먹으라고 하면 먹을 수는 있을 정도라서...”
“아뇨 저도 그만 먹을 거예요.”
“으응...”
피자 박스를 닫았다. 윤가영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치우는 거 내가 할까?”
“아뇨 제가 해요 손이나 씻어요.”
“알겠어...”
테이블에 컵이랑 콜라까지 다 치워놓았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윤가영이 수건에 손을 대서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고 손을 씻은 다음 수건으로 물기를 없앴다. 윤가영이 내 옆에 서서 마냥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왜 계속 여깄어요?”
“그냥 너 있어서.”
“...”
뭔가 싶었다.
“그럼 가요 이제.”
“응.”
윤가영이랑 같이 화장실을 걸어 나갔다. 윤가영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자를 잡고 약간 뒤로 물려서 다시 앉아 윤가영을 바라봤다. 윤가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단도직입적이네요.”
“아니 난 그냥 너 바로 내려갈 줄 알아 가지구...”
“당신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그래요.”
“뭔데...?”
“나 없을 때 술 왜 마셨어요?”
“...”
“말 못 하는 거예요?”
“...”
윤가영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말은 안 하고 왜 이럴까. 속이 답답했다.
“그러면 나 그냥 나가요.”
“... 안 돼...”
목멘 소리였다. 진짜 무슨 일이 있긴 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길래 그래요.”
“... 준권 씨가...”
목소리가 낮았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사람이 왜요.”
“...”
윤가영이 두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버린 거 같아...”
“...”
우리 엄마도 버려놓고 윤가영까지 버린다니. 숨이 턱 막혔다. 윤가영이 찾아왔을 때 내가 저주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 잘못 같았다.
“아닐 거예요. 예쁜데 왜 버려요 당신을.”
“근데... 통화 걸었을 때... 여자 신음 들렸단 말야...”
“... 뭐 야동이라도 봤을 수 있죠.”
“그 남자 헐떡이는 게, 준권 씨 거였어...”
“...”
위로할 말이 없었다. 의자에서 내려가 윤가영의 오른편에 앉아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쓸었다. 내가 어떡해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아줘야 할까. 아마 그래야 할 듯했다. 두 팔을 벌려 윤가영을 끌어안았다. 윤가영이 말없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면서 이마를 내 가슴에 박았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토닥였다.
“그 새끼가 버렸을 리 없어요.”
“근데, 버려졌잖아...”
“...”
뭐라 해야 할까. 뭐라고 하는 게 정답일까.
여자가 우는 상황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냥 여자가 우는 소리만 들어도 항상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싫어서라도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남자라는 생물은 애초에 그리 설계된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쓸었다. 윤가영의 흐느낌은 통곡이 아니어서 더 슬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어떡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윤가영의 울음을 그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윤가영이 이준권에게서 마음이 완전히 떠나게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그 새끼 빌어먹을 성벽 때문일 수 있어요. 자기 남한테 뺏긴 여자가 우는 모습 보고 좋아하는 쓰레기 성향 있으니까 당신 울면 더 좋아할 거예요. 울지 마요.”
“흡... 나빴어어...”
이준권이 나빴다는 걸까 내가 나빴다는 걸까. 어쩌면 중의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말해두는 게 옳을 거였다.
계속해서 윤가영의 등을 토닥이고 쓸었다. 윤가영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윤가영의 울음이 그치고 나서도 한동안 등을 쓸어주다가 고개를 내려 윤가영을 바라봤다. 윤가영은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울고 지쳐서 바로 잘까. 심란했다. 윤가영을 안아 들어 침대에 올려서 똑바로 눕히고 베개를 베게 한 다음 이불을 덮어줬다. 콜라랑 컵, 피자를 들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1층으로 내려가서 콜라를 냉장고에 넣고 싱크대에 컵을 놓았다.
테이블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 위스키랑 올드패션드 글라스를 가지고 도로 앉았다. 얼음도 없이 위스키를 붓고 한 모금 홀짝였다. 목이 타는 듯했다. 윤가영은 우리 엄마 절차를 밟을까? 희생양이 더 늘지 않았으면 했다.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우울감이 들었다. 술잔을 채우고 비웠다. 정신이 조금 멍해졌을 때 글라스를 싱크대에 놓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공허감이 찾아왔다. 난 이제 뭐를 해야 할까. 백지수가 보고 싶었다. 택시를 부르고 밖에 나가 백지수의 별장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소파에 누웠다. 일단 잤다가 백지수가 오면 일어나야겠다. 혼나지 않으려면 술 마신 티는 안 나야 할 텐데.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들이키고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한 다음 다시 소파에 누웠다. 바로 잠이 오지는 않아서 폰을 켰다. 목요일에 학교를 가니 밤낮을 바꿔야 할 텐데. 그럼 뭐라도 일정이 있어야 할 듯했다. 화요일이랑 수요일에 봉사활동이 할 게 있나 찾았다. 뭐 할 게 없었다. 그냥 강혜린한테 아침에 봉사활동 하러 가도 되겠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야.
야 이온유.
백지수 목소리였다. 느리게 눈을 떴다. 교복을 입고 있는 백지수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왔어...?”
백지수가 눈웃음 지었다.
“어 백수 새끼야.”
“왔으면 나랑 키스 좀 하자...”
“자기 전에 양치는 했어?”
“당연하지...”
백지수가 빙긋 웃고는 오른손으로 소파를 짚고 다리를 소파 위에 올려 그대로 내 몸 위로 올라탔다. 백지수의 머리카락이 내려와서 내 얼굴을 간질였다. 백지수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벌렸다. 백지수의 입술이 촉촉했다. 혀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움... 츄읍... 쮸읍... 츕... 헤웁... 쯉... 츄릅... 언제까지, 쮸읍... 할 건데? 츕...”
두 손으로 백지수의 가슴을 붙잡고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렸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오른 볼을 꼬집었다.
“손버릇 존나 무례하네? 고개 돌리는 것도 그렇고?”
“미안해요.”
“다시 키스해.”
“네.”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백지수가 내 입술을 덮쳤다.
“하움... 츄릅...”
“지수야.”
“츕... 응?”
“나 이틀 봉사활동 하기로 했어. 밤낮 바꾸려고.”
백지수가 빙긋 웃었다.
“그래.”
백지수가 다시 내 입술을 덮쳤다. 자지가 껄떡거려서 백지수의 오른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하웁... 츄릅...”
백지수가 입술을 떼고 나를 내려봤다.
“근데 나 아직 생리 중이라 섹스는 못 해준다?”
피식 웃었다.
“알겠어.”
“안 삐쳤지?”
“당연하지.”
“그럼 됐어.”
백지수가 조금 밑으로 내려가서 내 가슴에 왼 볼을 댔다. 두 팔로 백지수를 안았다.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백지수랑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졌다.
그냥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이렇게만 있으면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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