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왜 그래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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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 노래방에서 나왔다. 이젠 노래 부르기도 질렸다. 무작정 걸었다.
할 게 도저히 없었다. 피시방에나 갈까. 막상 가면 할 게임도 없어서 멍하니 있기만 할 텐데. 만에 하나 친구라도 마주치면 재미도 없는 게임을 한동안 같이 해야 할지도 모르고.
책 읽을까. 생각해보면 요즘 본 게 전혀 없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운동도 좀 안 했다. 근데 운동이야 집에 가지를 않았으니 안 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냥 집에 돌아가서 뭐할지 생각이나 해봐야겠다. 주변을 둘러보고 머릿속으로 길을 떠올려봤다. 발은 이미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귀소본능인가. 분명 집이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왜 귀소본능 비슷한 것에 이끌릴까. 그냥 내 몸에 익은 버릇일까. 심란했다. 목이 말라 갔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열쇠로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했다. 윤가영이 평소에 혼자 있으면 조용한 성격인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자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주방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탁자에 두 팔을 얹고 엎어져 자는 윤가영이 보였다. 탁자에는 먹다 남긴 듯 양이 적은 스테이크 파스타와 반절 정도 남은 위스키병, 그리고 얼음 없이 잔의 1/4 정도 채워진 올드 패션드 글라스가 있었다. 아마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고, 얼음이 다 녹아버릴 정도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나? 한숨이 나왔다. 내가 걱정해야 할 사람인가. 냉장고를 열어 이온음료를 꺼내고 컵에 따랐다. 의자에 앉고 윤가영을 보면서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병원에서 내가 진료받고 나왔을 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 표정을 지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이수아랑 내가 같이 있을 때는 일부러 괜찮은 척 웃음도 짓고 하다가 지금 이렇게 혼자 술을 마시고 속을 썩게 두는 게 답답했다. 목이 멨다. 이온음료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깨워야겠다. 오른팔을 테이블에 대고 왼손을 뻗어 윤가영의 오른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흔들었다.
“윤가영 씨.”
윤가영이 아으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웃음이 나올 듯했다. 지금 웃으면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계속 흔들었다. 웃음기가 내려갔다. 입을 열었다.
“윤가영 씨.”
“아... 네...”
왜 존댓말 하지? 이해가 안 됐다. 윤가영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윤가영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얼굴이 붉은 윤가영은 두 눈을 감은 채 뚱하게 입술만 약간 내밀고 있었다. 술이 약한가? 느낌상 위스키 반절을 한 번에 마신 거 같은데. 무슨 이유로 마셔댄 걸까. 궁금했다. 윤가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윤가영의 반쯤 감긴 눈이 갑자기 커졌다.
“어...?”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 얼굴을 보고 어, 라고 하는 건 대체 무슨 반응일까.
“온유...? 왜 왔어...?”
“왜 왔다니요.”
“...”
윤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 안 오는 거 아니었어...?”
“왜요. 난 오면 안 돼요?”
“아니이... 그냥 난, 오늘 나 혼잘 줄 알고 마셨는데...”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얼굴은 왜 감싸요?”
“나 술 냄새 안 나...?”
“얼굴에 대고 말하는 거 아니면 안 나요.”
“그래도...”
“그래도 뭐요?”
“나 술 마신 얼굴 보여주기 창피해...”
어이없어서 웃었다.
“뭐가 창피한데요? 나한테 이미지 관리라도 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또 맞긴 맞아...”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나 너한테 이미지 관리는 해... 나 최대한 좋게 보이게...”
“... 내가 안 올 거란 생각은 왜 한 거예요? 여기 원래 내가 사는 집인데.”
“너 자주 돌아다니니까... 집 오는 것도 싫어하는 거 알고...”
“... 운동하러 온 거예요. 할 것도 없고.”
“으응...”
“...”
이온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윤가영의 두 손이 얼굴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했다.
“계속 얼굴 가릴 거예요?”
“응...”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뭔데 궁상맞게 혼자 술 마신 거예요.”
“나 그냥... 그냥 마셨어...”
“이준권 때문이에요?”
“아냐...”
“그럼 뭔데요?”
“그냥 혼자 안 좋은 생각해서 마신 거야...”
“뭔 생각이요.”
“나 버려졌나 하는... 그런 생각...”
“... 왜 그런 생각을 해요.”
“... 병원에서 네가 의사 보러 들어갔을 때 폰 켜봤는데, 준권 씨 해외 간 후로 연락이 안 왔다는 거 확인하고 나서 갑자기 그런 생각 들었어...”
“... 그 사람 당신 안 버릴 거예요.”
“...”
윤가영이 얼굴에서 두 손을 떼고 눈을 떠 나를 바라봤다. 윤가영의 두 눈은 서글픔을 빚어낸 듯한 처량한 빛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해...? 그 사람이 사람 막 버린다는 건 네가 말해줬던 거잖아...”
“그쵸. 그니까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당신 안 버릴 거라고요.”
“...”
윤가영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됐어요.”
“...”
“여기서 잘 생각하지 마요. 저 이따 밥 먹어야 되니까.”
윤가영이 배시시 웃었다. 평소랑 다르게 힘이 없는 느낌이었다.
“너 진짜 착하다...”
“... 헛소리 그만 해요.”
“헛소리라니...”
“군소리도 붙이지 마요.”
윤가영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알겠어...”
어, 라고 할 때 목멘 소리가 났다. 윤가영이 큼큼거렸다. 입을 열었다.
“물 줄까요?”
윤가영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아냐 내가 마실게...”
“준다면 마셔요.”
일어나서 컵을 꺼내 정수기 물을 따르고 뒤돌았다. 윤가영이 두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컵을 건네줬다. 윤가영이 양손으로 컵 몸체를 잡고 꼴깍꼴깍 마셨다. 멈출 생각을 않는 듯했다. 윤가영이 컵을 내려놓았다. 안을 봤는데 물이 아예 없었다.
“다 마셨네요?”
“목 말라서...”
“... 좀 더 마시고 싶어요?”
윤가영이 미소 지었다.
“주면 고맙게 마실게...”
“그래요.”
컵 손잡이를 잡았다.
“근데 있잖아...”
“말해봐요.”
“이온 음료 주면 안 돼...?”
피식 웃었다.
“알겠어요.”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따르고 윤가영에게 주었다. 윤가영이 이온 음료를 반 정도 마시고 오른손에 컵 손잡이를 잡은 채 왼손으로 테이블을 짚어 일어났다. 서 있는 자세가 불안정한 게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왜 일어나요?”
“여기에서 자면 안 되니까...”
“... 내가 부축해줄게요.”
오른편으로 가서 컵을 빼앗고 왼팔로 윤가영의 등을 감았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왼 옆구리를 잡았다. 윤가영이 오른손으로 내 목 오른쪽을 잡았다. 천천히 걸었다. 계단을 하나씩 차근차근 밟았다. 윤가영이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온유야...”
“당신 넘어져서 이빨 깨지기라도 하면 이수아가 나 엄청 욕할 거 같아서 도와주는 거예요.”
윤가영이 빙긋 웃었다.
“알겠어...”
방으로 들어갔다. 윤가영을 침대로 끌고 가듯 했다. 윤가영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컵을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윤가영을 봤다. 앞으로 엎어져서 베개도 베지 않은 게 퍽 불편해 보였다. 설마 저대로 잘 생각인가. 마음에 안 들었다. 침대에 올라 무릎으로 기고 두 손으로 윤가영의 어깨랑 배 밑을 비집고 들어갔다. 윤가영의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미치겠네. 윤가영의 몸을 뒤집었다. 윤가영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오른손으로 베개를 잡고 왼손으로 윤가영의 뒤통수를 잡아 위로 들어 올린 다음 베개를 밑에 놓았다. 왼손을 뺐다. 윤가영의 머리가 베개에 파묻혔다.
“그렇게 자지 마요.”
“으응...”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발을 뒤로 빼 침대에서 내려갔다.
“목마르면 여기에 이온 음료 컵 뒀으니까 마시고요.”
“고마워...”
“...”
한숨이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윤가영이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왜...?”
“... 아니에요. 자요.”
“응...”
뒤돌아서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 1층으로 내려가 주방에 갔다. 윤가영이 썼던 의자를 밀어 넣고 내가 앉았던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윤가영은 아직도 이준권이 좋은 걸까? 그렇게 마음 아프게 하는데 대체 왜 좋아할까. 미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냥 위에 있었을 때 아직도 이준권이 좋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말하지 않고 그냥 나온 게 후회스러웠다. 이미 나와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생각을 비우고 싶었다. 땀이나 빼야 할 듯했다. 일어서서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꺼내고 홈짐으로 향했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 전원을 켰다. 폰으로 pbr&b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 소리를 크게 키워 내려놓은 다음 러닝머신 속도를 높였다. 벽지를 보면서 발만 놀렸다. 체온이 서서히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마에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왼눈을 감고 왼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폰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 내 숨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러닝머신 전원을 껐다. 꽤 많이 뛴 듯했다. 폰이랑 이온 음료를 챙겨 벤치로 가 앉았다. 폰을 켜 플레이리스트를 외국 힙합으로 바꿨다. 숨을 고르다 뚜껑을 열어 입을 대고 마셨다. 오늘은 이 이온 음료가 다 비워질 때까지만 운동해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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