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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234화 (234/438)

〈 234화 〉 수아 오디션 (2)

* * *

이수아가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옆에 와봐.”

“왜?”

“아 일단 와봐.”

일어서서 의자를 이수아 옆으로 옮긴 다음 다시 앉아서 왼팔을 이수아의 오른팔에 딱 붙였다.

“존나 너무 가까운 거 아냐?”

“밖인데 욕 빼.”

“아.”

이수아가 왼손으로 입을 약하게 한 대 쳤다.

“실수.”

피식 웃었다.

“실수 좀 줄여.”

“아 알겠어. 이거나 봐봐.”

이수아가 대본을 두 손으로 잡아 빳빳하게 했다. 들여다봤다.

해가 저무는 시간대, 이윤우와 정하윤이 하굣길에 같이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나 대사 치는 거 맞는지 확인하면서 상대 역도 해줘.”

“너 외웠는지 봐달라는 거지?”

“어.”

“그럼 내가 옆에 안 붙어도 됐잖아.”

“일일이따지지 말고 걍 하기나 해.”

살폿 웃었다.

“알겠어. 그냥 읽기만 하면 돼?”

“어.”

“근데 나 창피한데.”

“창피하기는. 그럼 너 연극부는 왜 하냐?”

“너 나 연극부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몰라. 넘어가.”

“수상하네.”

이수아가 표정을 찡그리더니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좆 까.”

피식 웃었다. 이수아가 머리를 뒤로 물려 다시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오른손을 내밀었다.

“줘봐.”

“가져가.”

이수아의 손에서 대본을 받아가서 나만 볼 수 있게 들었다. 이윤우의 대사가 시작이었다.

이수아를 흘겨봤다. 이수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감정을 잡는지 평소랑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조금 차분했다. 건성으로 읽으면 안 될 듯했다.

“나 잠깐만 상황 좀 볼게.”

“빨리 봐.”

“응.”

앞장을 봤다. 이미 이서은에게 들킨 지 오래이고, 그녀에게서 조언을 받으며 정하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를 다양하게 해본 상황이다. 수년을 연기해온 정하윤은 마음이 찢기면서도 이윤우가 뭘 하든 별 내색이 없었고 이윤우는 그 모습을 보고 초조해한다. 서로 속이 곪아간다. 해가 저무는 시간대에 둘은 평소처럼 하굣길을 같이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원래보다 한 발짝 멀다.

다시 뒷장을 봤다. 대사 지문을 담는 괄호 속에 ‘느닷없이’라는 지시가 쓰여 있었다. 툭 내뱉듯이 말하면 되나. 입을 열었다.

“걔가 나랑 영화 보재.”

이수아, 아니 정하윤이 나를 보며 픽 웃는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윤우, 오기 생긴다. 얼굴을 티 안 나게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펴고,

“그린라이트지? 이거.”

정하윤 퉁명스럽게,

“그린라이트지.”

“나 걔한테 뭐라고 고백하면 돼?”

“뭐?”

정하윤 아까보다 더 크게 웃는다. 오른손을 들어 이윤우의 왼팔을 한 대 툭 친다.

“네가 그러니까 여태 여친이 없던 거야.”

“뭔 소리야 뜬금없이.”

“그 정도면 그냥 대충 사귀자고만 해도 돼.”

“아니 좀 로맨틱한 말들 있잖아.”

“아 그딴 거 좀 묻지 마. 나도 모솔이니까.”

이윤우 정하윤을 바라보며 웃는다. 정하윤도 웃는다. 다소 씁쓸한 감이 돈다. 이윤우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면서 걷다가 입을 연다.

“야.”

정하윤 눈을 크게 뜨고 이윤우를 바라본다.

“어?”

“우리 친구 그만할래?”

깨끗한 정적. 이윤우 바보같이 마음 졸인다. 억지로 웃음 짓는다.

“방금 멘트 어땠어?”

정하윤 헛웃음 터뜨리고,

“그게 고백 멘트야?”

“별로였어?”

“진짜 별로니까 나 말고 딴 사람한테 그 멘트치지 마라.”

“알겠어.”

정하윤 이윤우를 바라보면서 멈춰선다. 이윤우도 멈춰서 정하윤을 마주 본다. 정하윤 까치발을 들고 두 손을 들어 이윤우의 머리를 마구 헝클인다.

“이 귀여운 새끼.”

이윤우 피식 웃는다. 정하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윤우 가볍게 뛰어서 왼편에 따라붙는다.

“왜 나 버려.”

“버리긴 뭘 버려. 오바하지 마.”

이윤우 다시 미소 짓는다. 정하윤 이윤우의 얼굴을 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획 돌린다. 윤우와 함께하는 즐거움, 윤우를 좋아하는 마음, 그런 자신의 속을 알아주지 않는 윤우에 대한 야속함, 그리고 서러움, 자신의 절친에게 다가가는 윤우를 보며 느끼는 곤란함,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에 대해 느끼는 우울함이 뒤섞여 정하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다. 다물린 입술. 입꼬리와 눈가를 올린 것 같지도 내린 것 같지도 않은 뜻 모를 표정을 지은 얼굴 속에서 다만 커다란 눈망울이 정하윤의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정하윤이 오른손을 들어 눈물 한 방울을 훔치고 입을 열었다.

“어땠어?”

“... 어?”

“어땠냐고.”

“어... 좋았어.”

이수아가 미소 지었다.

“그럼 됐어.”

“...”

주변이 조용했다. 시선이 쏠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이유 모를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조용히 소리를 냈다.

“나 지금 좀 창피한데 나가도 돼?”

“왜 네가 창피해?”

“사람들이 보니까.”

“그니까 연기는 내가 했는데 왜 네가 창피하냐고.”

“몰라 나 화장실 갈게.”

의자에서 내려갔다. 이수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 대본 내놔.”

“응.”

대본을 건네주고 문 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겨우 떨어졌다. 가볍게 뛰었다. 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두리번거리면서 화장실을 찾고 변기가 있는 칸에 들어가 커버 위에 휴지를 깐 다음 바지를 내리지 않은 채 앉았다. 폰을 꺼냈다. 이수아에게서 문자가 두 개 와 있었다.

[ㅈㄴ 그렇게 쪽팔려 할 거면 버스킹은 어떻게 하는 거?]

[ㅃㄹ 돌아와 나 혼자 있기 쪽팔려]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왜 쪽팔려 함?]

읽었다는 표시가 금방 떴다. 작성 중이라는 표시가 나왔다.

[난 지금 혼자 있으니까 ㅂㅅ아]

[그래 잘 견뎌봐]

[너 설마 지금 똥 싸냐?]

[그럴 생각하고 있는데?]

[아 존나 더러워]

[싸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생각 좀 해보고]

[닥치고 빨리 와]

[실장님은 옆에 있어?]

[어]

[와라]

[수고]

뒤로 가기를 누르고 알고리즘을 타고 영상들을 조금 보다가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휴지를 변기에 넣어 물을 내렸다. 손 씻었다.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봤다. 이수아였다.

“왜?”

ㅡ안 올 거야?

“당장은?”

ㅡ아 됐어 끊어.

전화가 끊겼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 의아했다. 폰으로 맵 어플을 켜서 근처에 있는 카페 위치를 지정하고 그쪽으로 가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다시 문자앱을 확인했다. 김민준 실장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지금 여동생분 오디션 시작했어요]

내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던 건가? 조금 마음이 걸렸다. 근데 이수아 오디션 내가 같이 들어가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이수아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할 수 있을 거였고.

문자라도 보내야 할까? 지금 연기 중일 텐데 혹시라도 폰을 안 꺼두거나 해서 진동하기라도 하면 몰입이 깨지지 않을까.

그냥 이따가 오디션이 끝났을 때 봐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 듯했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받고 빨대를 꽂아 한 번 섞고 바로 물어 빨아들였다. 뒤돌아봤는데 윤가영이 있었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수아는?”

“나 사레들릴 뻔했어요.”

“아 그래...? 미안...”

“됐어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왼 손목이 붙잡혔다. 윤가영이 두 손으로 나를 붙잡은 거였다.

“왜요 또.”

“급한 거 아님 같이 앉아 있자.”

“어디요?”

윤가영이 왼손 검지로 안쪽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둘이 앉는 자리였다. 테이블에는 반절이 사라진 치즈케이크랑 다 식은 듯 보이는 커피가 1/3 정도 채워진 머그잔이 있었다.

“저기.”

“알겠으니까 손 놔요.”

“응...”

윤가영이 나를 놔줬다. 빠르게 걸어서 머그잔이랑 치즈케이크가 있는 자리 반대편 의자로 가 앉았다. 윤가영이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커피는 뭐예요?”

“이거 그냥 카페라떼.”

“네.”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씁쓰름했다. 윤가영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잔 손잡이를 잡고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테이블에 도로 내려놓았다.

“온유야 치즈케이크 먹을래...?”

“당신이 먹던 걸 내가 먹으라고요?”

윤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먹기에 맛있어서 그냥 사줄 마음으로, 그래서 그냥 먹고 싶은지 물어본 거야...”

“... 됐어요.”

“...”

윤가영이 카페라떼를 마셨다. 윤가영한테는 커피가 무안함을 넘기는 수단인 모양이었다.

“먹을래요, 치즈케이크.”

“응? 알겠어 잠깐만...”

윤가영이 일어섰다.

“포크만 가져와요.”

“어...?”

“당신 남길 거 아니에요?”

“그럴 생각이긴 했지...?”

“아까우니까 먹을 거예요.”

“으응...”

윤가영이 카운터로 가서 포크를 하나 가져와 자리에 앉으면서 내 쪽에 놓아줬다.

“고마워요.”

“응...”

오른손으로 포크를 잡고 치즈케이크가 있는 접시를 끌어왔다. 한 입 먹어봤다. 익숙하게 맛 있었다.

“어때...?”

“맛있네요.”

“다행이다...”

피식 웃었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윤가영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수아는 어떻게 된 거야...?”

“오디션 보고 있대요.”

“응... 잘 될 거 같아?”

“저는 모르죠.”

“그래도 뭔가 느낌 같은 거 있지 않아...?”

“느낌이요.”

“응.”

대기실에서의 이수아를 떠올려봤다. 내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몰입도 빨랐고 짧은 시간 만에 대사 숙지도 완벽했다. 아침에 대본을 처음 본 것 치고는 캐릭터 해석도 훌륭했던 듯했다.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뭐...?”

“잘 될 거 같아요. 제 느낌은 그래요.”

윤가영이 빙긋 미소 지었다. 표정이 너무 밝아서 누가 봐도 기뻐 보인다고 말할 듯했다.

“그래?”

“네.”

윤가영이 히 웃었다.

사람이 웃는 게 어떻게 이렇게 어울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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