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수아 오디션 (1)
* * *
폰이 진동했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확인했다. 김민준 실장이었다. 온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저 지금 집 앞 다 와 가요. 지금 여동생분이랑 같이 있어요?
“바로 옆에는 안 있고요.”
ㅡ그럼 같이 집에 있는 거예요?
“네.”
ㅡ그럼 한 3분 있다가 밖에 나와주세요. 너무 좀 여유 없게 전화했나? 미안해요.
“아뇨 괜찮아요. 이미 준비 다 마쳤어요.”
ㅡ좋아요 그럼. 근데 옷은 평소 입는 느낌대로 입은 거예요?
“그렇죠?”
ㅡ그래요. 이따 봐요.
“네.”
ㅡ끊을게요.
“네.”
전화가 끊겼다. 먼저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노크했다.
“나와요.”
“알겠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물러섰다. 곧바로 문이 열리면서 윤가영이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면서 입을 얼였다.
“이수아 나와!”
“이미 나왔어.”
거실에 교복을 입은 이수아가 서 있었다.
“지금 온대.”
“그럼 바로 나가는 거야?”
“3분 정도 있다 나오라던데.”
“그럼 나가 그냥.”
“어. 근데 왜 교복을 입고 있냐?”
“학생 역이니까. 가자 엄마.”
이수아가 윤가영의 왼팔을 잡아서 팔짱을 꼈다. 윤가영이 미소 지으면서 이수아를 봤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옆으로 와줄 수 있어?”
“싫어요.”
이수아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쏘아봤다.
“말본새 보소.”
피식 웃었다.
“너 사극 준비해?”
“뭐래 존나.”
윤가영이 왼손으로 이수아의 등을 약하게 한 대 때렸다.
“너 엄마가 욕하지 말랬지.”
“아 쟤가 화나게 하잖아.”
“오빠한테 쟤라고 할 거야?”
“아 미안해.”
“오빠한테 말해.”
이수아가 뚱한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미안 오빠.”
“응.”
신발을 신고 나가 문을 잠그고 대문을 나섰다. 익숙한 검은색 승합차가 보였다. 이수아가 차를 봤다가 나를 쳐다봤다.
“저 차야?”
“응.”
다가갔다. 앞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내렸다. 김민준 실장이었다.
나를 본 김민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면서 마주 걸어왔다.
“온유 학생.”
김민준 실장이 오른손을 뻗었다. 악수했다. 이수아가 내 왼편에 섰다. 김민준 실장이 이수아를 바라봤다. 이수아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아 학생.”
김민준 실장이 오른손을 뻗었다. 이수아가 손을 잡고 대충 두 번 흔든 다음 손을 놓았다. 김민준 실장이 눈썹을 들었다가 도로 내리고는 윤가영을 바라봤다.
“온유 새어머니 되시죠?”
“네...”
윤가영이 먼저 오른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김민준 실장이 악수하고 손을 놓아줬다.
“타시죠.”
“네.”
김민준 실장이 뒷문을 열었다. 이수아가 먼저 오르고 윤가영이 내 눈치를 보다가 다음으로 올랐다. 이수아가 가운데 좌석을 펴주고 윤가영이 서지도 앉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채 아직 차에 오르지 않은 나를 바라봤다.
“온유 네가 가운데 앉을래...?”
“아뇨 그냥 앉아요.”
“알겠어...”
윤가영이 엉덩이를 붙였다.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서 안전벨트를 메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 모습을 보고 있던 김민준 실장이 정면을 봤다.
“출발할게요.”
“네.”
이수아가 답했다. 김민준 실장이 아, 하고 소리 내고는 콘솔박스를 뒤졌다.
“잠깐만요.”
김민준 실장이 셋톱박스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서 윤가영에게 건넸다. 윤가영이 두 손으로 받았다. 김민준 실장이 다시 정면을 봤다.
“이번에 오디션 보러 가는 거 대본이에요. 세 개 있으니까 하나는 본인이 보시고 옆에 자녀분들한테 나눠주세요.”
김민준 실장이 말하고 나서 백미러로 내 쪽을 봤다. 왜 말해놓고 눈치를 볼까. 어이없는데 밉지는 않았다. 윤가영이 양손에 대본을 잡아 이수아랑 나한테 동시에 나눠줬다. 오른손을 받았다. 차가 출발했다.
첫 장에 설정 같은 게 주욱 쓰여 있었다. 가제는 ‘두 바보’, 장르는 러브 코미디였다.
[기획 의도
아이 내지는 청소년 특유의 소심함. 게임 아이템을 강화하면 더 좋은 성능을 발휘할 걸 알지만 혹시라도 부수어질까 차마 용기 내지 못하는 어린 심정. 연인이 되고 싶어도 지금의 소중한 친구를 잃을까 더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 미련하지만 풋풋한, 그런 어린 가슴들이 그려내는 사랑 이야기다.
두 아이는 서로의 마음을 떠보려 하고, 자신이 고백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들면서 짓궂게 몽니 부리기도 한다. 자격이 부족한 두 선원이 이끄는 사랑의 배는 위태로이 항해를 이어가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금 방향을 잡아나가고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 드라마는 그 같은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두 청소년이 부인??을 통한 유예, 여지를 남겨두는 것에서 벗어나, 시인??함으로써 미래의 불안정함을 끌어안고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이가 어색해질 가능성을 무릅쓰고 두려움을 이겨내 고백하는 것은 곧 어린 마음을 극복해내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태도를 갖췄음을 의미하기에.
어른, 달리 말하면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을 사랑이라는 영원한 소재로써 그려낸 이 드라마는 만인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인 만큼 단연코 시청자의 이목을 잡아끌 것이다.
줄거리
고등학교 2학년인 이윤우와 정하윤은 소꿉친구 사이로, 서로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둘 다 마음을 감추고 있다. 두 주인공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 하면서도 고백이 실패하면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윤우는 정하윤의 심중을 떠보고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정하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정하윤은 마음을 숨기는 데 도가 트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한다. 심술이 난 이윤우는 정하윤에게 그 여자아이가 그녀의 절친인 이서은을 꼬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한다. 이서은과 쌓은 우정도 포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이윤우를 포기할 수도 없는 정하윤은 이윤우에게 썸을 완벽하게 망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조언한다.
이윤우는 정하윤의 앞에서 이서은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려 하다가 어느 날 이서은에게 나 좀 보자는 문자를 받는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품고 이윤우는 이서은을 만난다. 알고 보니 이서은은 이윤우가 자신의 친구인 정하윤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날로 윤우의 진정한 ‘러브 코치’가 되어 본격적으로 정하윤의 질투심을 유발한다. ……]
피식 웃었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윤가영이랑 이수아를 바라봤다. 둘 다 아직 대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표정이 비슷한 게 모녀 관계인 걸 티라도 내는 듯했다. 실장이 교통 신호에 멈춰 서고는 백미러를 흘깃 쳐다봤다.
“다 첫 장 읽었어요?”
윤가영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네. 읽었어요.”
“그 드라마 대본이 투고해서 나온 건데, 고등학생이 쓴 거래요.”
“진짜요? 몇 살인데요?”
“1학년이니까, 17살이네요.”
“와. 대단하네요. 수아보다 한 살 언닌 건데 그럼.”
이수아가 계속 대본을 보다가 윤가영을 쳐다보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윤가영이 미소 짓고 이수아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김민준 실장이 입을 열었다.
“그쵸. 근데 이게 ‘다섯 이야기’ 연출한 오지윤 감독님이 대본 재밌다고 자기가 맡겠다 나서 가지고 제작 결정된 거라, 한번 가보면 꽤 얼굴 알려진 사람도 있을 거고 경쟁이 꽤 셀 거예요.”
“상관없어요.”
이수아가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툭 말했다. 김민준 실장이 미소 지었다.
“좋네요.”
이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대본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 대본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
차에서 내리고 김민준 실장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윤가영이 저는 카페에 가 있을까요, 라고 말했다가 왼팔이 이수아의 두 손에 붙잡히고 팔짱 끼워져서 결국엔 함께 가고 말았다.
스튜디오의 대기실에는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한 번쯤 봤던 것 같은 얼굴도 많았다. 안쪽으로 걸어가니 시선이 이수아랑 나, 그리고 윤가영한테 다다닥 붙었다가 떨어졌다. 작게 탄식하는 소리랑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준 실장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FD가 대본을 가져다줄 거라고 말하고 대기실을 벗어났다. 일단 의자에 앉았다. 이수아가 내 왼편에 앉고 윤가영이 내 오른편에 앉았다. 윤가영이 왼손으로 내 오른 허벅지를 약하게 툭툭 쳤다.
“왜요?”
“나 화장실 좀 갈게...?”
헛웃음이 나왔다.
“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해요?”
“얘기해야지...”
“수아한테 해도 되잖아요.”
“대본 보고 있으니까...”
“네.”
윤가영이 일어섰다. 대본을 보던 이수아가 윤가영을 쳐다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윤가영이 멋쩍게 웃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왠지 엄마 안 올 거 같지.”
피식 웃었다.
“아마?”
“흐응...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FD가 뭐야?”
“나도 몰라.”
폰을 켜고 ‘FD’라고 써서 구글링했다. FD는 Floor Director의 약자였다.
“플로어 디렉터. 뜻은 무대 감독이고... 사실상 잡일들 다 맡는다는데?”
왼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왼쪽 위로 들어 누군지 쳐다봤다. 며칠 안 깎았는지 얼굴에 턱수염이 살짝 나 있는 남자가 종이를 양손에 쥔 채 서 있었다.
“맞아요 잡일하는 거.”
FD구나. 두 손을 올려 손바닥을 내보이며 이수아를 가리켰다.
“오디션은 얘가 보는 거예요.”
“네.”
FD가 이수아를 봤다.
“수아 학생이죠? 정하윤 역 지원한.”
“네.”
FD가 종이를 건넸다. 이수아가 양손을 뻗었다.
“대본이에요. 오디션 곧 시작할 거니까 대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FD가 나를 봤다. 눈썹을 올렸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그, 학생도 배우죠?”
“네? 아뇨.”
“으음... 알겠어요.”
FD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수아가 FD를 봤다가 나를 흘깃 보면서 웃음을 흘리더니 오디션용 대본을 봤다. 첫 장에는 설정 같은 게 있었다. 이수아가 대충 훑어보다가 장을 넘겼다. 뒷장에는 대사가 쓰여 있었다.
뭔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떨림에 가까운 듯했다. 아주 처음 느껴보는 감각은 아니었다. 왜 이럴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이랬다.
내가 오디션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느낌을 받을까. 괜히 폰을 켜서 봤다. 집중은 잘 안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