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아니 나 진짜 어떡해야 하지 (13)
* * *
송선우가 신발을 신고 고개를 들었다.
“잘 있어.”
“잘 가.”
백지수가 말했다.
“잘 가.”
“응.”
정이슬이 백지수를 보며 두 팔을 벌렸다.
“난 허그로 인사할래.”
백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바 아니야 언니?”
“그럴 수도 있지.”
정이슬이 백지수를 안았다가 다시 놓아주고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려왔다. 정이슬을 안고 등을 툭툭 쳤다.
“너무 매정한데?”
“죄송해요 매정해서.”
정이슬이 나를 놓아주고 두 손을 흔들었다.
“진짜 갈게.”
“네.”
“잘 가요. 선우도 잘 가.”
백지수가 두 손을 흔들었다.
“응. 잘 있어.”
송선우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정이슬이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지수 온유 바이.”
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잘 가요. 선우도 바이.”
송선우가 싱긋 웃었다.
“응.”
정이슬이랑 송선우가 같이 밖에 나갔다. 백지수가 팔짱을 끼고 잠시 나를 보다가 문을 잠그고 뒤돌아 걸어갔다. 뒤따라 갔다. 조용한 실내 안으로 발소리만 나직이 들렸다. 아까 주방에서 이상한 침묵이 깔렸던 게 떠올랐다. 입을 열었다.
“지수야.”
백지수가 계단을 밟았다.
“나 화장실 갔을 때랑 음식 받으러 나갔을 때 유은이한테 뭐라 했어?”
“아니.”
진짜겠지? 근데 뭔가 찝찝했다.
“근데 왜 표정이...”
백지수가 멈춰 서서는 뒤돌아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왼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야.”
“... 응...?”
백지수가 왼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너 뒤질래 진짜?”
“...”
“너한텐 서유은이 그렇게 중요해?”
“... 아냐... 궁금해서 그랬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 안 하고 물어봐서 미안해...”
“그럼 왜 두 번 물어보는데.”
“...”
“나 못 믿어?”
“아냐... 내가 생각이 짧았어...”
“... 개새끼...”
백지수가 뒤돌아서 계단을 계속 밟았다. 2층으로 따라 올라가 뒤에서 껴안았다. 백지수가 어깨를 흔들었다. 계속 백지수를 붙잡았다.
“놔.”
“안 돼...”
“놓으라고.”
“...”
“그냥...”
백지수가 콧숨을 내쉬었다.
“그냥 하루만 여기에서 꺼져. 나 지금은 너 미워서 뒤질 거 같으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말이 안 나왔다.
“나 놓고 나가라고.”
“...”
백지수를 풀어줬다. 백지수가 앞으로 다섯 걸음을 걷고 멈춰섰다.
“내일 봐.”
“... 응... 잘 자...”
“너도.”
“...”
백지수가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머리가 하얬다. 계단을 내려갔다. 정말 가라는 걸까. 맞을 텐데 발이 안 떨어졌다. 외투를 걸치고 폰을 내려봤다. 백지수한테서 문자가 안 왔다. 현관으로 가 신발을 구겨 신고 나섰다. 도로로 나가면서 집 주소를 찍어 택시를 불렀다. 백지수한테 전화 걸고 싶었다. 괜히 백지수랑 나눴던 문자만 다시 봤다. 백지수는 내가 돌아오길 바랄까. 아님 정말 마음을 추스르려 하루만 나를 안 봤으면 하는 걸까. 택시 뒷좌석에 올랐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기사가 대답하고 택시가 출발했다. 차가 신호에 걸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기사가 물었다. 시선을 올려 백미러를 봤다. 내 안색이 안 좋았다. 아뇨 딱히 없었어요. 표정이 안 좋아서요. 그냥 고민 있어서요. 네.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택시가 집 앞에 멈췄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내렸다.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열쇠가 없었다. 벨을 울렸다.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얼마 안 가 ROKA 티를 입은 이수아가 보였다. 안 그래도 큰 이수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수아가 아래로 사라졌다. 무릎을 굽힌 모양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벨을 눌렀다. 화면에 이수아도 안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ㅡ열쇠 없어...?
“응.”
ㅡ... 알겠어. 기다려 봐.
시선을 거둬 가만히 대문을 바라봤다. 머릿속이 지저분했다. 입으로 호흡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한숨이 나왔다. 대문이 열리고 검은 브라가 비치는 흰 반팔 티셔츠에 분홍색 돌핀팬츠 차림을 한 윤가영이 보였다. 왜 이수아가 아니라 윤가영이 나오지. 윤가영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내가 안 들어가는 이유가 안 비켜줘서라고 생각했나. 근데 복장은 또 왜 이럴까.
“... 이수아 옷 뺏어 입었어요?”
윤가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냐... 편해서 나도 종종 입어...”
“그건 그렇다 치고요. 왜 이수아가 안 나오고 당신이 나와요?”
“수아가 나 보러 온 사람이라 해가지고 내가 나온 건데...?”
“... 헛소리예요 그거.”
“... 응... 빨리 들어와...”
“...”
안으로 발을 뻗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윤가영이 대문을 닫았다.
“밥은 먹었어?”
“네.”
빨리 걸어서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주방으로 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냉동고에서 컵에 들어있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테이블에 놓고 숟가락을 집어 박아넣었다. 한술 뜨고 입에 넣었다. 차가운 단맛이 입속을 가득 채웠다. 윤가영이 내 왼편에 멀찍이 서서 나를 쳐다봤다.
“왜요?”
“무슨 일 있어...?”
“아뇨. 상담 안 필요해요. 그냥 방으로 올라가요.”
“... 필요하면 말해줘...”
싫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럼 그냥은 안 넘어갈 것 같았다.
“네.”
“...”
윤가영이 주방에서 벗어났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크림을 다시 퍼먹었다. 우울할 때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는 게 원래 내 습관 같지는 않은데 누구한테 배운 걸까. 곧바로 이수아가 떠올랐다. 딱 들어왔을 때 보이지는 않았으니 어디 몸을 감춘 듯했다. 거의 다 녹인 아이스크림을 씹어 삼켰다. 숟가락을 싱크대에 놓고 아이스크림을 도로 냉동고에 넣었다. 이수아의 방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이수아.”
다시 똑똑 노크했다.
“이수아.”
“왜...?”
“문 열어봐.”
“...”
문이 느리게 열렸다. 검은 ROKA 티에 검은 돌핀팬츠를 입은 이수아가 시선을 밑으로 떨구고 있었다. 왠지 위축되어 보였다. 왜 이럴까. 그냥 묻는 게 상책이었다.
“왜 그래?”
“... 나 안 미워...?”
“내가 왜 널 미워해야 되는데?”
“... 나...”
이수아가 목 막힌 소리를 내고는 침을 삼켰다.
“나 오빠 학교에서 평판 좆되게 하고... 학교폭력 일으키게 했고... 그래서 어머님 마음고생도 가중시켰잖아...”
“응.”
“... 나 때려도 돼... 다섯 대 정도까지는, 전력으로 때려도 맞을게...”
헛웃음이 나왔다.
“야.”
“응...?”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
한숨 쉬었다.
“너 장례식장에 안 온 게 내가 너 미워할까 봐 안 온 거야?”
이수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대문 직접 안 열어주고 방으로 도망쳤던 것도?”
“응...”
이수아의 몸이 한껏 움츠려져 있었다. 가시를 많이 품은 이수아는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것도 모자라 미숙하기까지 했다. 이수아의 정수리에 오른손을 얹고 그대로 쓰다듬었다. 이수아가 아 씨, 라고 쌍시옷 발음을 내면서 두 손을 올리다가 도로 밑으로 내렸다. 피식 웃었다.
“아 씨?”
“뒤에 안 끝냈잖아...”
“그래.”
오른손을 이수아의 머리에서 내렸다.
“이수아.”
“응...”
“동생아.”
“... 응...”
“나 너 안 미워해.”
“...”
이수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왜...?”
“나도 잘못한 거 있었으니까.”
“... 그래도 미울 순 있잖아...”
“그치. 근데 안 미워. 왠진 나도 모르겠어.”
“...”
“그냥 장례식장 와주지.”
“... 미안해...”
“괜찮아. 장난이야. 이해해. 아무리 생각해도 날 미워할 사람 같은데 보러 가려면 진짜 힘들지. 마음 크게 먹어야 되고.”
“... 고마워...”
씁쓸하게 웃었다.
“됐어. 괜찮아. 마음 안 써도 돼.”
“...”
“잘 자.”
대답도 안 듣고 돌아섰다. 내 방쪽으로 발을 뻗는데 오른 손목이 두 손에 붙잡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뒤를 봤다. 내 손을 붙잡은 이수아가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 잠깐만...”
몸을 돌려 이수아를 마주봤다.
“왜?”
“... 고마워...”
이수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당황스러웠다. 일단 두 팔을 들었다가 껴안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그냥 두 손으로 이수아의 양팔을 두 번 토닥인 다음 붙잡았다.
“왜 울어 갑자기...?”
“나, 흡... 오빠 인생 망치고... 흑... 사과하는 것도 겁나서, 윽... 장례식장도 안 갔는데... 나 기회도 주고, 읍, 우리 엄마도 봐주고 했는데... 흑...”
이수아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나를 껴안았다. 이수아의 가슴이 짓뭉개져왔다. 진짜 왜 이럴까. 엄마를 봐줬다는 건 또 뭐고. 기사 얘기를 하는 건가. 그런 듯했다. 이수아를 마주 안아서 등을 토닥였다.
“미안하다고도 안 하고, 흡... 고맙다고도 안 하고 도망만 치고...”
“...”
“미안해... 고마워... 이제 말해서 미안해...”
“...”
“잘못했어 오빠...”
오른손을 들어 이수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괜히 나도 눈물이 차올랐다.
“괜찮아...”
“으흐응...”
“... 너 계속 나 붙잡고 있음 다 울었을 때 쪽팔려 죽을걸.”
“아 몰라아... 윽...”
“... 알아서 해.”
“흡... 응...”
“...”
왼손으로 이수아의 등을 쓸었다. 이수아의 울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 놔줘...”
“... 응...”
두 팔을 놓았다. 이수아도 나를 놓았다가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이수아의 가슴이 짓뭉개져왔다. 자지가 갑자기 발기해서 이수아의 오른 허벅지를 건드렸다. 이수아가 흠칫 놀랐다. 그러면서도 나를 놓지 않았다.
“아니 왜 그래...?”
“나 방 들어갈 때까지 눈 감고 있어줘...”
“알겠어 빨리 놔.”
눈을 질끈 감았다.
“나 눈 감았어.”
“응...”
나를 껴안은 두 팔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한숨 쉬었다. 다시 보면 엄청 어색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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