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아니 나 진짜 어떡해야 하지 (7)
* * *
더웠다. 여자 특유의 살 내음이랑 술 내가 동시에 났다. 눈 떴다. 왼편에 백지수랑 그 뒤에 정이슬이 백지수를 껴안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나가기 어려울 듯했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송선우랑 그 뒤에 송선우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서유은이 보였다. 다 자고 있었다. 곤란했다. 일단 상체를 일으켰다. 진짜 이게 뭔 상황일까. 한숨이 나왔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켜봤다. 다섯 시 이십구 분이었다. 저녁을 먹고 갈려나. 일단 잠금을 풀었다. 송선우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유은이랑 이슬 언니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고 여덟 시에 나가기로 했어]
뒤로 가기를 눌렀다. 백지수한테서도 문자가 와 있었다.
[저녁 바베큐 플래터 배달시켜서 먹을 거니까 뭐 준비하지 마]
응, 이라고 답장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나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가 난감했다. 송선우랑 서유은이 있는 쪽이 두 걸음이면 바닥을 디딜 수 있을 듯했다. 일어서서 왼발을 뻗어 서유은의 다리 뒤를 밟고 오른발을 뻗어 바닥을 디뎠다. 한숨이 나왔다.
“오빠...”
흠칫 놀랐다. 뒤돌아봤다. 서유은이 상체를 일으켜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지?”
“아뇨 저 안 자고 있었어요...”
“진짜?”
“네... 저 술 안 마셔서 그냥 언니들 따라서 누웠어요...”
“으응...”
“일단 나갈까요...?”
“그래...”
서유은이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같이 방을 나가서 문을 닫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서유은이 왼손으로 목을 잡고 큼큼거렸다.
“물 마셔야 될 거 같아?”
“네...”
“주방으로 가자.”
서유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층으로 내려가 유리컵을 잡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섞어 잔을 반 정도 채워 건네줬다. 서유은이 양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서유은이 꼴깍꼴깍 마셨다. 의자를 두 개 뽑아 먼저 앉았다. 물을 다 마신 서유은이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게 졸린 모양이었다. 귀여워서 미소 지어졌다.
“진짜 안 잤어?”
“어... 사실 살짝 잤어요...”
서유은이 배시시 웃었다. 문득 윤가영이 서유은한테서 뭔데 여기 있느냐고 하면서 빨리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눈매가 선한데. 마주하고 있어도 도저히 상상이 안 됐다.
“유은아.”
“네...?”
콧숨을 내쉬었다. 윤가영이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대놓고 물어보는 것도 조금 내키지 않았다. 오른팔을 테이블에 대고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너 말고 다 술 마셔서 지금 자고 있는 거지?”
“네.”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되죠. 근데 별 얘기 없었어요.”
“으응... 그래도 말해주라.”
“네. 일단... 이슬 언니랑 오빠가 방에 들어가서 뭔 얘기했냐고 물어보고 잡담 나눴어요.”
“응... 잡담 주제는 뭐였는데?”
“그냥 좀 일상적인 것들이랑... 화이트 보드 얘기했어요.”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화이트 보드...”
“네.”
“무슨 얘기 했는데?”
“이슬 언니가 이거 아침 점심 저녁 쓰여있는 거 뭐냐고 물어보고 지수 언니가 그냥 뭐 먹을지 써놓은 거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슬 언니가 폰으로 메모를 하면 될걸 왜 굳이 써놓냐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으응...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냥 그걸로 끝났어요. 지수 언니가 인테리어처럼 화이트 보드 놨는데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그거라도 써놨다고 해서.”
살짝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음...”
“오빠가 생각하기에 화이트 보드 왜 있는 거 같아요?”
“몰라...? 그냥 지수가 말한 게 이유 아냐?”
“음... 역시 그런 거겠죠?”
뭔가 느낌이 묘했다. 서유은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전혀 감이 안 왔다. 나는 서유은을 몰랐다. 입이 열렸다.
“유은아.”
“네...?”
“나 하나 궁금한 거 있어서.”
“네 물어보세요.”
“장례식장에서 내 새엄마인 사람한테 무슨 말 속삭였잖아.”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사실 그때 너 무슨 말 한 건지 궁금해서 그 사람한테 이미 먼저 물어봤거든? 근데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온다는 게 상상이 안 돼서 거짓말인가 싶고 그래 가지고...”
“...”
서유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황스러웠다.
“왜 울어?”
“죄송해요...”
“어...? 아냐...”
서유은이 고개를 숙였다. 왼손을 뻗어 서유은의 등을 토닥였다.
“아니 미안할 건 아냐 유은아.”
“아뇨, 흡... 죄송해요...”
“유은아. 진짜 괜찮아.”
“흐윽... 끕...”
서유은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런 애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을까. 의아했다. 그보다는 신기했다. 왼손으로 서유은의 등을 쓸었다.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 한 거야? 추궁하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저 그런 뻔뻔한 사람, 끅... 엄청 싫어서... 흡... 그랬어요...”
“으응... 그럼 그 싸늘하게 말하는 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이거 비꼬는 건 아냐 진짜.”
“저 그냥, 윽... 언니가 하는 거 보고, 그대로 따라 한 거예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 서예은 배우 말하는 거야?”
서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으응... 언니 분이 이미지랑 좀 다르시구나...”
“제 언니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거랑, 흡... 실제랑 좀 많이 달라요...”
“아 그래...?”
“네...”
“그렇구나...”
서유은의 울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서유은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살짝 부은 두 눈이 마냥 귀여웠다. 미소가 머금어졌다.
“목마르지.”
“조금요...”
“물 줄게.”
컵을 잡고 일어서서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이랑 섞어 반절 정도 채우고 자리에 앉아 있는 서유은에게 건네줬다.
“감사해요...”
“응.”
자리에 앉았다. 서유은이 꼴깍꼴깍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오빠...”
“응?”
“저 술 좀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갑자기 쥐어짜이기라도 하는 듯 체감상 두 배는 빠르게 두근거렸다. 갑자기 서유은이 다시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듯했다. 왠지 모르게 서유은이 마냥 순진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돼요...?”
“...”
“죄송해요...”
“아냐.”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후회가 몰려왔다. 그러다 술 좀 마시는 거 봐주는 게 뭐 그리 큰 죄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도 느껴졌다. 그냥 좀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래도 서유은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두고 생각만 할 순 없었다. 입을 열었다.
“뭐 마시고 싶은데?”
“음... 저 칵테일 마셔보고 싶어요...”
“무슨 칵테일?”
“그 예쁜 거 있었는데...”
“뭐 재료 기억 나는 거 있어? 색깔이랑?”
“어... 지수 언니가 오렌지 주스 넣고 뭐 또 넣어서 약간 붉게 되고 그랬어요...”
“으음. 보드카 선라이즈?”
“오! 그거 이름 맞는 거 같아요.”
“알겠어 만들어줄게. 앉아 있어 봐.”
“감사해요...”
“응.”
일어나서 보드카랑 그레나딘 시럽, 얼음을 다섯 개 넣은 하이볼 글라스 두 잔이랑 오렌지 주스, 그리고 지거를 가져왔다. 서유은은 술이 처음이기도 하니 세게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보드카를 1온스 넣고 오렌지 주스를 필업한 다음 유리 머들러로 섞어주고 그레나딘 시럽을 조금 넣었다. 시럽이 밑으로 흘러내려 가면서 붉은빛을 남겼다. 서유은이 턱을 테이블에 올리고 보드카 선라이즈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되게 예뻐요...”
너무 귀여웠다. 절로 미소 지어졌다.
“그치.”
다른 잔에도 똑같이 빌드했다.
“근데 오빠 마셔도 돼요...?”
“괜찮을 거야.”
“네... 막 많이 마시지 마세요...”
“알겠어. 고마워.”
유리 머들러로 섞은 다음 시럽을 넣고 한 모금 마셔봤다. 괜찮은 듯했다.
“마셔봐 유은아.”
“아! 네 감사해요...!”
“응.”
서유은이 오른손으로 잔을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냥 마시면 돼요...?”
“그치?”
“그 막 뭐 건배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안 해도 되지 않아? 그냥 허공에서 토스트하거나 하고.”
“으음... 그럼 해요. 허공에.”
살폿 웃었다.
“그래.”
잔을 들고 마주 보면서 잔을 앞으로 내밀다가 서로 부딪친 듯 모션을 취했다. 서유은이 히히 웃었다. 눈을 마주치면서 보드카 선라이즈를 한 모금 마셨다. 서유은이 눈을 찡그렸다.
“어때?”
“오렌지 주스에 약간 뭐 이상한 거 섞인 맛이에요.”
웃음이 나왔다.
“그치.”
“상상한 거랑 좀 달라요...”
“뭐 상상했는데?”
“그냥 뭐라 해야 되지... 환상적인 맛...? 그런 거 기대했는데 그냥 그래요...”
“음, 이해돼. 나도 술 처음 마셔봤을 때 딱 든 생각이 아 좀 실망스럽다 그런 거였어.”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저 근데 막 실망스럽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어, 어.”
웃었다.
“근데 반응이 그렇게 격할 일이야?”
“아 저 오빠가 만들어준 칵테일인데 실망했다고 그럼 오빠 마음이 그렇잖아요...”
서유은이 양손으로 자기 가슴 중앙을 가리켰다. 제스처까지 하나하나 다 귀여웠다.
“아냐 괜찮아.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술이니까.”
서유은이 살폿 웃었다. 보드카 선라이즈를 한 모금 마셨다.
“오빠 진짜 너무 착한 거 같아요.”
“음? 어디가?”
“그냥 말씀하시는 거랑 행동하시는 거 다 되게 배려심 느껴지고 그래요.”
“고마워 좋게 봐줘서.”
“이번엔 콩깍지라고 안 하시네요?”
“왜? 해줄까?”
“안 돼요.”
“그럴 거잖아.”
“히. 네.”
웃었다. 서유은이 잔을 들었다. 같이 잔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멈췄다. 액체가 잔 속에서 흔들렸다. 눈을 마주치면서 보드카 선라이즈를 홀짝였다. 술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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