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아니 나 진짜 어떡해야 하지 (6)
* * *
떡볶이를 다 먹었다. 정이슬이 치우는 건 다 우리가 할 테니 나는 그냥 소파에 앉아 있으라 했다. 말을 따라서 잿더미를 안아들고 소파의 오른 가장자리에 눕듯이 앉았다. 오른손으로 잿더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잿더미가 내 허벅지 위에서 편히 드러눕고는 골골거렸다. 백지수가 가장 먼저 와서 내 왼편에 앉았다. 이어서 온 송선우랑 서유은이 소파에 앉고 마지막으로 온 정이슬이 내 오른편의 팔걸이에 앉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왜 팔걸이에 앉아요?”
“자리가 없어서.”
“언니 자리 만들어줄게요.”
송선우가 말했다. 서유은이 엉덩이를 들어 송선우에게 바짝 붙어 앉으면서 왼편을 내려봤다.
“이슬 언니 자리 생겼어요...”
“음, 좀 이따 갈게.”
“왜요...?”
“잠깐만.”
정이슬이 나를 봤다.
“온유야.”
“네.”
“당장은 막 나가서 놀 생각 같은 거 안 들지?”
“네 저 그냥 쉬고 싶어요.”
“으응... 알겠어.”
정이슬이 일어나서 서유은의 왼편에 앉았다. 뭔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네 명이랑 같이 있으면서 분위기 자체가 묘해지는 탓에 자리가 불편하기도 했다. 정이슬이 몸을 앞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온유야. 잠깐만 할 얘기 있는데 일어나줄래?”
백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언니 그냥 여기서 말해요.”
정이슬이 멋쩍게 웃었다.
“아냐.”
“...”
“언니 온유한테 고백하게요?”
송선우가 물었다.
“아니?”
“근데 왜 엄청 수줍다는 듯이 그래요 언니답지 않게.”
“그냥 좀 부끄러워 가지고.”
“뭐가요?”
“아니 나 사과하려는 거야.”
“...”
“아 창피해.”
정이슬이 일어나고는 나를 바라봤다. 잿더미를 백지수의 무릎에 옮겨주고 나도 일어섰다. 다 나를 쳐다봤다. 정이슬이 백지수를 바라봤다.
“어디 방음 되는 데 있어?”
“여기 다 방음 잘 돼요.”
“음, 그래도 제일 잘 되는 데 있지 않아?”
“... 기타랑 베이스 있는 방 있어요. 현관 들어오면 첫눈에 보이는 방이에요.”
“오케이. 고마워.”
“네.”
“가자 온유야.”
“네.”
정이슬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문을 연 정이슬이 안에 들어가고는 나를 기다렸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이슬이 문을 닫아 잠그더니 오른손 검지로 안쪽을 가리켰다.
“좀만 더 구석으로 가자 온유야.”
“... 네.”
정이슬이 먼저 발을 디뎠다. 뒤따라갔다. 정이슬을 바라보면서 팔짱을 꼈다. 기색이 평소랑 다른 게 뭔가 묘했다. 입을 열었다.
“누나. 장례식장에 누나 찾아와서 자고 일어났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죠?”
“... 누구 사귈 맘 없다고...?”
“네.”
“... 그건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
“... 할 말이 뭐예요?”
“그냥... 손편지 써온 거 있거든...? 그거 읽어주면 돼... 잠깐만...”
정이슬이 청바지 오른 뒷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았다.
“지금 읽어요?”
“읽어도 되는데... 일단 나 말할 거 좀 있어서 그거 먼저 들어주라.”
“네.”
“고마워. 그, 온유야.”
“네.”
“...”
정이슬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너 나 있음 피곤하다 했잖아... 그리고 지금은 쉬고 싶고... 그치...?”
“... 네.”
“원랜 너 슬픈 생각 잊게 해주고 같이 있어서 위로해 주려고 온 건데... 네가 나 부담되고 그러면... 그냥 가는 게 낫겠지...?”
미안해졌다. 지레 으르듯 말한 게 후회됐다.
“... 아녜요 누나.”
정이슬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냐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줘...”
“... 진짜 아니에요...”
“...”
정이슬이 시선을 내렸다.
“나 눈치 되게 없어서 남들이 막 겉치레로 하는 말도 진심인 줄 알고 그래... 그니까 거짓말 없이 얘기해줘...”
“거짓말 아니에요 누나.”
“... 나 지금도 너 거짓말하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구분 안 돼...”
“진짜라고요.”
“...”
“솔직히 누나가 저 곤란하게 해서 피곤한 건 좀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고. 그래도 그게 내가 누날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
“나 누나 좋아해요. 싫어했으면 싫어하는 티 나서 누나 제 얼굴 보고 기겁했을걸요? 근데 여태 제가 누나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지 않았어요?”
“그건 아니었지...”
“그니까요.”
“...”
“얼굴 들어봐요 누나.”
“응...”
정이슬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울어요.”
“몰라... 미안해...”
정이슬이 오른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 지금 누나 편지 읽어봐도 돼요?”
“... 안 돼...”
“왜요? 누나 할 말 다 듣고 나면 읽어도 된다 했잖아요.”
“으응...”
“할 말 남은 거예요?”
“... 그런 것도 아냐...”
“그럼 저 읽어요?”
“... 응...”
“입으로 읽어도 돼요?”
정이슬이 두 손으로 내 오른팔을 잡았다.
“안 돼...”
“왜요?”
“밖에 애들 있음 들릴 수도 있잖아...”
웃었다.
“알겠어요.”
“... 너 좀 나빴어.”
“미안해요.”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DPR LIVE의 Jasmine이 첫곡이었다.
ㅡYou know I can paint the world
볼륨을 최대한 키워 기타 케이스 위에 내려놓았다.
ㅡSitting there in black and gold
“목소리만 작게 내면 되겠죠 이제?”
“응...”
ㅡYou're the perfect chemical
“읽을게요.”
ㅡI gotta test, I gotta know
“... 소리는 내지 마...”
살폿 웃었다.
“네.”
편지 봉투를 열었다. 가로로 두 번 접힌 분홍색 편지지를 꺼내고 펼쳐봤다. 글 전체를 몇 번이고 쓰고 지웠는지 지운 자국이 눈에 띄었다. 첫머리로 온유에게, 라고 쓰인 줄도 눌린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천천히 살펴봤다.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겼고 매력적인 온유에게, 라고 쓴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귀여워서요.”
“...”
“미안해요 이제 안 웃고 읽을게요.”
“약속해...”
정이슬이 오른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마주 오른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고리 걸었다. 두 번 흔들고 새끼손가락을 놓아서 다시 양손으로 편지지를 잡았다. 문득 내가 눈으로 읽을 동안 정이슬은 마음 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이슬을 바라봤다.
“그냥 누나가 읽어주면 안 돼요?”
“...입으로 읽어달라고...?”
“네.”
“너 너무 짓궂은 거 아냐...?”
살짝 미소 지었다.
“저도 이렇게 누나한테 한 번만 실수할게요. 이러다 보면 서로 죄 지은 게 상쇄되지 않을까요?”
정이슬이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 같은 느낌이 살짝 돌아온 듯했다.
“너는 진짜... 하... 알겠어. 읽을게.”
살폿 웃고 편지지를 건넸다.
“네.”
정이슬이 나를 올려보며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편지지를 양손으로 잡아 펴고 고개를 살짝 숙여 편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이슬이 입을 열었다.
“온유에게.
사과문이어서 존댓말로 써야 할지 아니면 평소 말 거는 투로 써도 될지 고민하다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반복하면서 그냥 말 걸듯이 쓰기로 했어.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온 마음을 담아 쓰는 거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어머님 장례식장에서 부적절하게 말하고 행동해서 미안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데 돌이켜볼수록 부끄럽고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져.
여자를 몰고 다닌다고 발언한 거랑 유은이 잡고 너한테 데려간다고 한 건 정말 잘못했어. 어머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고 앓으신 이유도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니. 끔찍하게 경솔했어.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어.
사과하러 가서 다음 날 아침에 너한테 갑자기 키스한 것도 미안해.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고, 장소랑 상황도 고려하면 더더욱 하면 안 됐는데 너무 내 감정에만 집중했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게 할게.
공개고백해서 곤란하게 했던 것도 잘못했어. 가볍게 행동하고 장난만 치는 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장난이 아니었어.
너한테 장난스럽게 공개고백하면서 웃어넘기던 건 실은 차이는 게 무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너랑 내가 관계가 그리 깊은 것도 아니고 나한테 막 반하거나 한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네가 누구랑 사귄다면 나보다는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나보다 훨씬 예쁘고 오랫동안 알아온 선우나 금수저인 지수 같은 애랑 사귈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견제하는 느낌으로 미리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출해둔 거야. 그럼 널 좋아해도 단념하는 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했어. 공개고백 때문에 곤란해하고 괴로웠을 너한테 미안해.
주제넘게 네 새어머니를 내쫓으려 한 것도 사죄할게.
이 편지를 주려고 만났을 때는 일단 평소처럼 대하려고 해. 만약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얘기해줘. 최대한 진중한 태도로 대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편지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다시금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이만 마칠게. 잘못했어 온유야. 그리고 미안해.
정이슬이.”
편지를 다 읽은 정이슬의 얼굴이 엄청 붉었다. 귀여웠다. 정이슬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고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 온유야...”
“괜찮아요.”
“... 고마워...”
“누나 왜 이리 생각이 많아요?”
“여태 너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살폿 웃었다.
“근데 누나. 내가 누나보다 선우가 훨씬 예쁘다 한 적은 없지 않아요?”
“그 칵테일 마셨을 때 선우가 더 예쁘다 말했잖아...”
“알아요.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훨씬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 응...”
“저 누나 안 싫어해요.”
“... 진짜...?”
“네. 그때 내가 말했죠? 예쁜 건 선우가 더 예쁜데 누나가 더 내 취향이라고.”
“... 너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이상하게 몰아가지 말고요.”
“알겠어...”
픽 웃었다.
“아무튼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막말로.”
“... 너 그 말한 건 진짜 네 죄다...?”
“죄라뇨?”
“네가 그런 말 하면 내가... 아냐 됐어...”
“뭐 반한다고요?”
“응...”
“솔직히 말하면 누나 손해예요, 저한테 반하면.”
“왜...?”
“그냥 그런 게 있어요.”
“...”
“이제 나갈래요?”
“... 나 너랑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이상한 의미로 말한 거 아니죠?”
“아니야...”
“그럼 돼요.”
“응... 그럼 나 평소처럼 너 대해도 돼...?”
“완전 평소처럼은 말고 좀 많이 진중하게 대해줘요.”
정이슬이 미소 지었다. 봐도 봐도 웃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알겠어. 노력할게. 고마워.”
“네. 나가죠?”
“응.”
폰을 주워 노래를 끄고 문을 열었다.
“앗!”
뒷걸음질 치던 서유은이 엉덩이를 찧었다. 그 양옆에 송선우랑 백지수가 서 있었다. 눈이 크게 떠졌다. 일단 오른손을 뻗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좀 아픈지 눈살을 찌푸린 서유은이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일어나 두 손으로 엉덩이를 문질러댔다. 정이슬이 내 왼편에 섰다.
“너희 우리 얘기하는 거 다 들었어...?”
“아뇨 하나도 안 들렸어요.”
팔짱을 낀 백지수가 답했다.
“그럼 왜 여깄었어...?”
“그냥 저희끼리 할 것도 없고 뭔 얘기 하나 궁금해서 있었어요.”
“언니 울었어요 근데?”
송선우가 물었다.
“아니 나 안 울었어.”
백지수가 눈을 찌푸렸다.
“이온유가 울렸어요?”
“안 울었다니까.”
백지수가 나를 째려봤다.
“아니 나 억울해.”
“나 진짜 안 울었으니까 추궁하지 마.”
“... 알겠어요.”
정이슬이 나를 쳐다봤다.
“우리 이제 뭐 할까 온유야?”
“저 쉬고 싶어요.”
팔짱을 낀 송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잔다고?”
“가능하면 자고 싶어.”
“어디서 잘 건데?”
“소파에서 자야 하지 않아?”
“아냐 너 환잔데 침대에서 자.”
백지수가 말했다.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좀 에바 아냐?”
“뭐가 에반데?”
“침대가 아무리 커도 다섯 명은 눕기 좀 그럴 거고 나 혼자 남자니까 소파에서 자는 게 맞지. 소파가 막 불편한 것도 아닌데.”
“음...”
“맞는 말이지?”
“아냐 잠만.”
백지수가 면면을 둘러봤다.
“온유 빼고 졸린 사람 없죠?”
송선우가 손을 들었다. 백지수가 송선우를 봤다가 나를 쳐다봤다.
“너 걍 침대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어. 선우는 일단 자지 말고.”
“왜 난 침대에 누움 안 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야. 그전에 우리끼리 뭐 얘기 좀 나누고 그러자는 거지.”
“흐음... 알겠어.”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넌 올라가 있어.”
“어... 네.”
“빨리.”
“응... 근데 잿더미는 어딨어...?”
“잿더미 밥 다 먹고 밖에 나갔어.”
왠지 내보낸 것 같았다.
“으응...”
“올라가.”
“알겠어...”
정이슬이랑 서유은이 나를 바라봤다.
“잘 자 온유야.”
“잘 자요 오빠.”
“내 꿈 꿔 이온유.”
송선우가 말했다. 피식 웃고 잘 잘게요, 라고 말한 다음 뒤돌아 계단을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 백지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곤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으니 수마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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