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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208화 (208/438)

〈 208화 〉 장례식 (23)

* * *

챙겨야 할 게 있나 다 확인하고 병실을 나서서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에 있는 의자에 에코백을 오른손에 쥔 윤가영이 앉아 있었다. 굳이 말을 안 걸고 고개를 돌려 주욱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왼편에 윤가영이 섰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다. 병원을 나서니 진짜 하얀 택시가 보였다. 뒷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얼굴이 익숙했다.

“몸은 괜찮냐 온유야.”

“쌩쌩해요.”

친척 아저씨가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

“안녕하세요...”

윤가영이 고개를 숙이고 택시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면서 내 오른편에 앉았다. 친척 아저씨가 윤가영을 흘겨보고는 앞을 봤다.

“네.”

택시가 출발했다. 네비게이션을 봤는데 화장시설로 찍혀 있었다. 거리가 꽤 멀었다. 바로 산소를 향하지 않는 걸 보면 어떻게 운 좋게 타이밍이 맞은 듯했다.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누구든 내게 아무 말도 시키지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 차에는 숨소리만 들렸다. 차가 가끔 덜컹거리고, 멈춰 서면서 몸이 살짝 뜨거나 앞쪽으로 쏠렸다. 차창으로 햇살이 들어와서 따뜻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대로 몸을 맡겼다.

온유야 다 왔어...

윤가영 목소리였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눈 떴다. 많은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차문을 열고 나갔다. 외벽이 하얀 화장시설은 그리 우중충해 보이지 않았다. 윤가영이 내 왼편에 섰다. 친척 아저씨가 택시에서 나와서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말씀하시다가 폰을 오른 주머니에 넣고 내 오른편에 섰다.

“따라와라 온유야.”

“네.”

친척 아저씨를 따라 건물 안에 들어가 주욱 걸었다. 거의 끝까지 갔을 때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와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가 여섯 명 보였다. 앉아 계시던 외할머니가 나를 보시고는 일어나서 내게 다가오며 두 팔을 벌렸다. 외할머니를 안았다. 외할머니가 두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몸은 괜찮니...?”

“괜찮아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렴...”

“... 알겠어요...”

고개를 돌려 왼편을 봤다. 시뻘건 글자로 드높은 온도가 쓰여 있는 계기판이랑 그 밑에 있는 회색 벽면이 보였다. 외할아버지랑 친척분들이 내게 다가와 나를 다독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 모든 신경은 화구에 쏠려 말을 잘 듣지 못했다. 얼마 안 가 외할아버지가 항아리를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외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소중히 든 항아리는 굉장히, 정말 굉장히 자그마했다. 아무 전조 없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가 들어도 돼요...?”

“그래.”

받아들고 품으로 끌어들였다. 외할아버지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산소로 가야 한다고 말을 꺼냈다. 바닥을 보면서 외할아버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영구차에 올라탔다. 화장시설에서 산소는 멀지 않았다. 가는 동안 항아리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없이 작아진 어머니의 몸이 담긴 항아리를 보다 보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어떤 악감정도 들지 않았다. 왼팔이 아프지도 않았다. 마치 항아리가 내가 느껴야 할 모든 고통을 가져간 듯한 느낌이었다.

차에서 나오고 친척 아저씨가 문을 여는 걸 기다려서 산을 올랐다. 발길을 옮기며 복수를 떠올렸는데, 화도 나지 않았고 필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준권, 윤가영, 이수아, 강성연의 면면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나를 떠올렸다. 이준권은 죽일 놈이었고, 윤가영은 많이 잘못했으니 죗값을 치러야 할 테지만 용서해도 될 법한 사람이었다. 이수아한테는 내가 한 잘못이 컸고, 강성연은 내게 나쁘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해할 만했다. 학폭위는 결정적으로 내가 주먹을 휘둘렀고 원인 제공도 다 내가 했으니 내 죄였고 내 지분도 컸다.

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다. 평평한 곳에 여러 항아리를 넣을 수 있을 듯한 납골묘가 많이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항아리를 내려놓으라는 곳에 내려놓았다. 친척 아저씨 한 분이 납골묘를 여는 기구를 가져와서 열었다. 외할아버지가 항아리를 안에 집어넣고 블록을 도로 끼워서 글루건을 짜 붙였다. 친척 아주머니들이 돗자리를 깔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 준비를 했다. 누가 내 등을 쓸었다. 왼편을 봤는데 윤가영이었다.

“뭐 해요?”

“...”

윤가영이 오른손을 내려 두 손을 모아 맞잡았다. 고개를 돌리고 높지 않은 바위 위에 선 외할아버지의 오른편으로 다가섰다. 눈을 찡그리고 산 아래를 내려보던 외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봤다.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지.”

“왜 그러냐 온유야.”

“저 물어볼 거 있어서요.”

“물어봐라.”

“... 만약에 엄마가 살아계셨으면요, 제가 따로 복수하는 걸 달갑게 여기셨을까요?”

“네가 복수한다고?”

“네...”

“... 네가 생각해도 절대 안 좋아할 거 같지 않냐.”

“그렇긴 해요.”

“나도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네...”

외할아버지가 원래 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 마라.”

“... 알겠어요.”

“... 근데 너 계속 거기서 살 거냐?”

“그러려고요...”

“알겠다.”

한숨을 폭 내쉰 외할아버지가 쪼그려 앉았다. 나도 쪼그려 앉았다.

“가끔 내려와라. 힘들 때면 전화하고. 이따금 네 외할머니랑 찾아가기도 하마.”

“... 감사해요...”

“항상, 큼, 항상 좋은 거, 기쁜 거에만 열중해라. 슬픔에 빠져서 앓지 마라. 소연이 몫까지 다 더해서, 살면서 많이 웃어라.”

“... 네...”

외할아버지가 뒤돌아서서 500ml짜리 물 페트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고개를 돌려 외할아버지가 보던 곳을 내려봤다. 우거진 나무들이랑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회색 포장도로가 보였다. 멍하니 나뭇가지들을 훑으며 다람쥐나 새가 없나 보다가 포장도로에 차가 다니면 그게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제사가 끝나면 또 차를 타고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럼 백지수를 만나고 나와 김세은의 관계에 대해 고백해야 할 거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처 주기 싫은데, 최대한 충격적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걱정스러웠다. 한숨이 나왔다. 왼편에 윤가영이 와서 양반다리로 앉았다. 내가 피해야 하나. 피해도 내가 굳이 피해야 할 건 아니다 싶었다. 윤가영이 오른 다리 바짓단을 올리고 파스가 붙은 오른 발목을 주물렀다. 어제 나를 찾아 뛰거나 한 게 발목에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윤가영이 눈을 찌푸려 내가 보는 쪽을 보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너무 신경 쓰였다.

“온유야.”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뭐요.”

“... 그냥.”

윤가영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통화를 들은 걸 고백하려는 거 같았다. 오른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어봤다. 청심환이 만져졌다. 꺼내서 왼손에 옮겨 들어 윤가영의 얼굴 옆에 흔들었다. 윤가영이 청심환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제 내가 전화하는 거 들었어요?”

“... 응... 미안해... 너랑 같이 가려다가 들어버렸어...”

“됐어요.”

“... 고마워.”

“뭐가요.”

“우리 수아 생각해줘서... 그리고 나도 구해줘서...”

“구해줬다고까지 표현할 건 아니에요.”

윤가영이 고개 저었다.

“아니야 구해준 거지...”

“...”

“서울로 돌아가면, 집에 올 거야...?”

“몰라요.”

“... 너 안 오면 내가 네 방 먼지 쌓인 거 청소해도 돼?”

“맘대로 해요.”

“고마워.”

“네.”

윤가영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근데 물 있어요?”

“물? 으음...”

윤가영이 왼손으로 바위를 짚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뒤를 봤다. 두 손으로 윤가영의 에코백을 잡고 벌려서 안을 들여다봤다. 폰, 지갑, 폰 충전기, 청심환,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붙이는 파스가 들어있었다. 왜 피임약이 없을까. 에코백을 내려놓고 윤가영을 바라봤다. 일어서려는지 두 손으로 바위를 짚은 윤가영의 양 옆구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윤가영이 바위에서 오른손을 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려 하다가 균형을 잡지 못해 뒤로 누워버렸다. 윤가영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피임약 왜 안 샀어요?”

“사면 네가 버리잖아.”

“그래서 임신하고 싶어요? 그 새끼 애를?”

“... 넌 내가 애를 가졌으면 하는 거야 안 가졌으면 하는 거야...?”

“그냥 심술부린 거예요, 당신 곤란해지라고.”

“...”

윤가영이 살폿 웃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했다.

“이미 충분히 곤란한데...?”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피임약 안 먹을 거예요?”

“... 몰라...”

“... 이준권 애 가지지 마요. 부탁이에요.”

“... 그럼 피임약 버리지 마...”

“사지도 마요. 이것도 부탁이에요.”

윤가영이 살폿 웃었다. 밝은 햇살 아래 그림자 하나 없는 윤가영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도저히 이준권이 윤가영을 버렸을 것 같지 않았다. 윤가영이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너 진짜 이상한 거 같아.”

“...”

윤가영이 몸을 왼쪽으로 돌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더니 검은 정장을 벗고 바위에 올렸다. 윤가영이 물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얀 와이셔츠로 검은 브라가 비쳐 보였고 낭창한 허리가 두드러졌다. 분명 정장 바지를 입었는데도 윤가영이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발기했다. 고개를 돌렸다. 짜증 났다. 스스로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포장도로에 검은 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빨리 백지수를 보러 가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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