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장례식 (19)
* * *
[또 보러 갈게]
백지수가 보내온 문자였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 지났으니 얼마 안 가 올 거였다.
[알겠어]
폰을 오른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윤가영이 벽에 등을 기대 두 손으로 폰을 잡고 양손 엄지로 화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백지수도 윤가영을 아니꼽게 볼 게 뻔했다. 지수는 정이슬처럼 난리를 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였다. 윤가영이 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마주 봤다.
“왜 온유야?”
“윤가영씨.”
“응?”
“잠시만 도망가 있을래요?”
윤가영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애들 온다 그러는데 윤가영씨 옆에 있으면 또 봉변당할 수 있잖아요.”
“으음... 괜찮아, 그래도.”
“아뇨. 제가 안 괜찮을 거 같아요.”
“으응...?”
일어섰다.
“빨리 일어나요. 애들 와서 보면 저 피곤해져요.”
“어... 알겠어...”
윤가영이 에코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얀 문을 열었다. 윤가영이 외조부모님한테 이제 곧 내 친구들이 와서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고 말하고 신발장 쪽으로 갔다. 윤가영이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나가던 윤가영이 갑자기 뒷걸음질을 쳤다. 윤가영이 마루에 발뒤꿈치가 걸려 털썩 주저앉아 엉덩이를 찧었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흰 교복 와이셔츠에 검은 교복 바지를 입은 정이슬이랑 송선우, 그리고 그 뒤에서 서로 팔짱을 낀 검은 교복 치마에 검은 스타킹 차림의 백지수랑 서유은이 보였다. 폰을 너무 늦게 본 듯했다. 정이슬이 윤가영의 코앞에 와서 윤가영을 내려봤다.
“그쪽이 왜 있어요?”
“...”
망했다. 오른편으로 고개 돌려 외할아버지를 봤다. 외할아버지도 나를 보고 있었다. 할 말을 잃으신 듯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냥 윤가영이 잘 대처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을 듯했다.
“온유 새어머니죠?”
백지수 목소리였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이슬, 송선우, 백지수, 서유은이 주저앉아 있는 윤가영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서 있었다.
“응...”
“...”
백지수가 입을 다무니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나가려 하신 거예요?”
“그치...?”
“그럼 나가요 빨리.”
“알겠어...”
서유은이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요.”
“으응...”
윤가영이 두 손으로 서유은의 오른손을 잡았다. 서유은이 뒤로 당기면서 윤가영을 일으켜줬다. 윤가영이 두 손으로 엉덩이를 털었다.
“고마워...”
서유은이 빙긋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서유은이 윤가영의 두 팔을 잡으면서 고개를 들어 윤가영의 오른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입술을 열었다. 몇 초 뒤 서유은의 입이 닫혔다. 말을 들은 윤가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라 했길래 저럴까. 눈치 상 서유은이 한 말은 다른 여자애들은 못 듣고 윤가영만 들은 듯했다. 욕이라도 했을까? 서유은이 욕을 한다니, 상상도 안 됐다. 감이라고 할 게 하나도 오지 않아서 뭐라 했을지 극도로 궁금했다. 윤가영이 돌아오면 물어봐야 할 듯했다.
윤가영이 장례식장을 걸어 나갔다. 정이슬, 송선우, 백지수, 서유은이 다 같이 와서 영좌에 절하고 몸을 돌려 나랑 외조부모님을 향했다. 맞절했다. 다 같이 일어나고 정이슬이 제일 먼저 달려들어 나를 껴안아 몸을 밀착해오며 등을 토닥였다. 부드러운 가슴이 짓뭉개져서 자지에 반응이 왔다. 평소에 자지를 위로 올려놓는 이상한 습관을 들여놓은 게 다행 아닌 다행이었다. 마음속으로 초를 셌는데 30이 지나도 정이슬이 나를 놓지 않았다.
“언제 놓아주실 거예요?”
“지금.”
정이슬이 떨어졌다. 송선우가 바로 나를 껴안았다. 정이슬이랑 비슷한 크기의 가슴이 부드럽게 짓눌렸다. 송선우의 단단한 팔뚝이 나를 꽉 조여왔다. 오른 귀에 송선우의 입술이 스쳤다. 자지가 껄떡거렸다. 일부러 한 걸까? 한숨 쉬고 싶었다.
“필요하면 얘기해줘 온유야, 옆에 있어 줄게.”
“... 고마워.”
송선우가 팔을 풀고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백지수가 다가와서 까치발을 들고 나를 안았다. 송선우랑 정이슬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해질 정도로 커다란 가슴이 눌려왔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을 거였다. 백지수가 내 등을 툭툭 토닥이고 물러났다. 주춤거리며 다가온 서유은이 까치발을 들고 나를 안았다. 백지수랑 방금 껴안아서 그런가 송선우랑 정이슬과 가슴 사이즈가 비슷한 것 같은 서유은의 가슴이 그리 크지 않게 느껴졌다. 서유은이 내 왼 귀 가까이에 입을 댔다.
“힘내세요...!”
“응. 고마워.”
서유은이 뒤로 물러났다. 다들 나랑 거리가 조금 있는 좌식 탁자로 가서 앉았다.
“온유야.”
외할아버지 목소리였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참 친구들을 잘 뒀구나...”
멋쩍게 웃었다.
“감사해요.”
“근데 왜, 여자애들만 두 번씩 오냐...?”
“글쎄요...”
외할아버지가 입을 다물었다. 외할머니가 오른손으로 내 등을 툭 쳤다.
“친구들한테 가서 앉아.”
“... 네...”
백지수랑 송선우가 약간 사이를 띄워서 같이 앉아 있고 맞은편에 정이슬이라 서유은이 앉아 있었다. 굳이 돌아가서 앉는 것보다는 가까운 데 앉는 게 낫겠다 싶었다. 송선우 오른편에 앉았다. 백지수가 나를 노려봤다.
“가운데로 와. 그러라고 자리 만든 건데.”
송선우가 백지수를 봤다.
“그냥 앉고 싶은 대로 앉게 하자.”
“...”
“아냐 옮길게.”
일어나서 백지수랑 송선우 사이로 가서 앉았다. 다 나를 바라봤다. 부담스러웠다. 서유은이 입을 열었다.
“오빠.”
목소리가 조용했다.
“응?”
“근데 새어머니는 여기 왜 온 거예요?”
“아, 그 사람... 자기가 내 엄마라고 옆에 있겠다고 그래서 온 거야.”
백지수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거 아냐? 낯짝 얼마나 두꺼우면 그래?”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긴 해.”
“개 미쳤네 진짜...”
송선우가 탁자에 오른팔을 대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째려봤다. 왜 이러지? 내가 자기는 돌아가라고 보냈는데 윤가영은 옆에 있어서 그런 건가. 화날 만은 한 거 같았다. 나중에라도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둘이 왜 그렇게 아이컨택해?”
정이슬이 물었다. 고개 돌려 미소 지은 정이슬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우 시선 느껴져서 뭐 할 말 있나 궁금해서 본 거예요.”
“으응... 그래?”
“네.”
“그럼 선우야, 말할 거 뭐였어?”
“그냥, 딱히 없었어요.”
정이슬이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기가 빨리는 듯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백지수를 바라봤다. 김세은 얘기도 해야 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또 다 같이 와서는. 앉아서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힘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면면을 둘러 보면서 입을 열었다.
“콜라 마실 사람?”
정이슬이 오른손바닥을 내보였다.
“나.”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마실래.”
송선우가 말했다.
“그럼 제가 가져올게요.”
서유은이 말했다. 정이슬이 서유은을 바라봤다.
“너는 안 먹어?”
“저도 마실 거예요.”
“으응.”
서유은이 일어나서 음료수 냉장고를 열어 콜라 캔을 다섯 개 꺼내 품에 안아 들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들 서유은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콜라 캔을 하나씩 잡았다. 나도 콜라 캔을 하나 잡아 바로 따고 벌컥벌컥 마셨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가 콜라 캔에서 입술을 뗄 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야.”
“응?”
“내일은 그 화장하는 거지...?”
“그치. 그리고 산소 가서 납골묘에 놓는 거고...”
“으응...”
송선우가 내 오른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렸다.
“나 그때 너랑 같이 있어도 돼...?”
“... 안 될 거 같아.”
“... 알겠어...”
“내일 토요일이죠...?”
서유은이 말했다.
“응.”
내가 답했다.
“음, 그럼 오빠 내일 산소 가시고 나면 바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바로 돌아간다니?”
“아 그게, 그니까, 오빠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냐구요...”
“음... 모르겠어.”
“돌아가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요...? 그 새어머니도 있고 해서 되게 불편하실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그럼 내 집에서 잘래?”
송선우가 물었다. 난감했다.
“언니 집에서 잔다구요...?”
“안 될 거 없잖아.”
“아, 안 되지 않아요...?”
“부모님한테 얘 사정 설명하면 봐주실걸.”
“그래도요...”
“내 집 와도 돼 온유야.”
정이슬이 말했다.
“아빠랑 내 동생도 너 좋아하니까 진짜 상관없어 우리 집은.”
“...”
“오빠 저 집에 남는 방도 있으니까 저희도 괜찮아요...!”
“다 마음만 받을게요...”
“아뇨 아뇨, 정 그러시면 연습실도 정리해서 주무실 수 있게 할 테니까 진짜 부담 없이 오셔도 돼요...!”
“아냐 나 진짜 그렇게 신경 안 써줘도 돼...”
정이슬이 백지수를 봤다.
“근데 지수는 온유한테 제안 안 해? 사실 제안하기에는 지수가 제일 좋잖아, 별장 있으니까.”
“헉... 별장이요...?”
“응.”
정이슬이 답했다. 백지수가 나를 봤다.
“나한테 와서 잘래?”
멋쩍게 웃었다. 모두 정답이 아닌 상황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 그럼 하루만 재워주라...”
“허어업...!”
서유은이 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꾹 다물더니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뭔가 잘못한 것 같았다. 바로 후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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