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장례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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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피곤한데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았다. 왜 난 하필이면 거기에서 자위해서 윤가영에게 들켰을까. 스스로 한심하고 창피해서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죽고 싶었다. 어머니를 그리고 또 그리며 슬퍼해도 모자랄 시간에 어떻게 성욕에 집중했을까. 자신이 너무 끔찍했다. 몸에서 땀이 뻘뻘 흘렀다. 좁은 방에서 나가 500ml 물 페트병을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시고 도로 안에 들어가 누웠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렸다. 몸을 비틀고 싶어도 억지로 참고 견뎠다. 수마가 느리게 찾아왔다.
덥고 몸이 무거웠다. 아니 몸이 무겁다기보다는 오른 가슴이랑 오른 허벅지에 뭔가가 얹혀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떠 오른쪽을 게슴츠레 바라봤다. 노란색의 짧은 머리카락, 아이 같은 하얀 피부와 긴 속눈썹, 가만히 있어도 살짝 올라가 있어서 장난스러워 보이는 입꼬리, 옷깃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검은 정장 속 검은 브라가 비쳐 보이는 하얀 교복 와이셔츠가 익숙했다. 정이슬이 왜 여깄지? 게다가 왜 나를 껴안고 있지? 숙취가 깨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멍해졌다.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자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을 건데. 그땐 막 취하지도 않았고. 얼떨떨했다. 정이슬의 오른팔이랑 오른 다리를 조심히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폰을 켜봤다. 6시 8분이었다.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피곤하지만 않으셨다면 두 분 다 깨셨을 거였다. 양손으로 정이슬의 왼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정이슬이 으음, 하고 낮게 소리 냈다. 최대한 낮은음을 낼 생각을 하고 성대를 울렸다.
“누나.”
“으응...”
“일어났어요?”
“일어났어...”
정이슬이 두 팔을 벌려왔다. 안아달라는 건가? 갑자기 왜?
“일으켜줘...”
“... 네.”
두 손으로 정이슬의 양손을 잡고 뒤로 당겼다. 정이슬이 눈 감은 채 상체를 세웠다. 답답했다. 외조부모님이 깨기 전에 빨리 일어나줬으면 했는데 정이슬은 이대로 느릿느릿 움직일 것만 같았다. 그냥 몸을 숙여 왼팔을 정이슬의 무릎 뒤로 넣고 오른팔을 정이슬의 등 뒤로 해 안아 들었다. 정이슬이 갑자기 두 눈을 떠서 동공을 확장시키고 입을 떡 벌렸다. 소리칠 것처럼 생긴 입은 다행스럽게도 음소거가 되어 있었다. 왼손으로 방문을 열고 나가 오른발로 도로 닫았다. 방문이랑 좀 멀어져서 입을 열었다.
“왜 있는 거예요 누나?”
“이유가 있지.”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정이슬을 조심히 내려주었다. 정이슬이 양반 다리를 하고 자기 앞 바닥을 오른손으로 탁탁 쳤다. 나도 앉아서 정이슬을 마주 봤다.
“뭔데요.”
“나 어제 집 돌아갔는데 생각할수록 너한테 너무 미안하고 창피해서 침대에서 이불킥하다가 이대로는 못 자겠다 싶어서 그냥 집 뛰쳐나와 가지고 택시 타고 와서 너 자고 있길래 나도 그냥 잔 거야.”
“... 미안하다고 하려고 왔고. 저 자길래 그냥 잤다고요?”
“응.”
“안 잤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돌아갈 거였어요?”
“음, 너무 시간이 늦었으니까 자고 가도 되겠냐고 하지 않았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진짜 미쳤어요?”
정이슬이 두 손으로 오른 다리를 잡아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기울이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
“아뇨 누난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미친 사람이에요.”
“그래? 그럼 그런 거로 해.”
“그런 거로 하는 게 아니라 누나 진짜 미쳤어요.”
정이슬이 흐응,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왜요?”
“네가 자꾸 미쳤다고 해서 조금 속상해가지고.”
“진짜요?”
“진짜지 그럼. 나 너한테 진심으로 미안해가지고 사과하려고 와서 아침까지 기다리고 사과한 다음에 학교 가려고 한 건데.”
“아침까지 기다렸다고요?”
“어?”
정이슬이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전에는 안 보이던 다크서클이 지금은 약간이지만 내려 있었다. 정이슬이 배시시 웃었다.
“말실수했다.”
“누나 저 깰 때까지 기다렸어요?”
“응... 깨우는 건 좀 그러니까... 향 계속 태워야 되니까 네가 중간에 일어나지 않을까, 했는데 계속 자서... 대신 내가 향 피웠어... 내가 다섯 시까진 버텼었는데, 그다음부터는 너무 졸려서 너 껴안고 잤어... 너 몸 되게 따뜻하더라...”
“...”
어지러웠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 몸 되게 따뜻하더라 같은 멘트를 마지막에 붙인 게 너무 기막혀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누나 진짜...”
“최고지?”
“... 네... 어떤 면에선 진짜 최고네요.”
정이슬이 생긋 웃었다.
“고마워. 그럼, 후, 말할게.”
“뭐를요?”
“미안하다고. 기다려 봐.”
피식 웃었다.
“미안할 거 없어요. 저 애초에 누나 때문에 마음 상하지도 않았어요.”
“... 정말...?”
“네. 누나 저 기분 풀어주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그 의도도 알고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아는데 기분이 왜 상해요. 전 오히려 고마워요. 누나가 나 생각해줘서.”
“...”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던 정이슬이 갑자기 두 손으로 내 목덜미를 붙잡고 입술을 덮쳐왔다.
“하움... 헤웁...”
두 손으로 정이슬의 가슴이랑 쇄골에 손을 대서 밀어냈다. 정이슬이 밀려나면서 두 팔로 가슴께를 감싸고는 엉덩이를 찧었다.
“아... 너 되게 변태다...”
어이없었다. 이렇게 털린 적은 처음이었다.
“제가 변태예요?”
“응...”
“제가 변태면 누난 뭐예요?”
“난 로맨티스트.”
“로맨티스트가 남의 키스 막 뺏어요?”
“키스라니, 뽀뽀지 이건. 그리고, 이건 백 명한테 물어보면 백 명이 뽀뽀 타이밍이라고 할 순간이었어. 내가 총대 매준 거고.”
“뽀뽀 타이밍 같은 게 어딨어요. 그리고 입술이랑 입술이 맞닿는 건 뽀뽀가 아니라 키스라고 하는 거예요 누나.”
“그래? 그럼 뽀뽀 타이밍 같은 건 없는 거로 하고, 우리는 키스한 거로 하자. 우리 진도 키스까지 나간 거다?”
“네?”
정이슬이 싱긋 웃었다.
“우리 키스까지 진도 나간 거 맞냐고 물어봤어.”
“... 아뇨. 전 정차했는데 누나가 혼자 과속해서 충돌사고 난 거거든요.”
“결과가 중요한 거지.”
“과실 비율이 중요한 거죠.”
“그거 따지면 너도 비율 진짜 커.”
“왜요?”
“네가 나 홀렸잖아.”
돌겠다. 시선을 위로 올려 천장을 봤다. 주변 시야로 정이슬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다시 시선을 내려 정이슬을 바라봤다.
“나 누나 진짜 무슨 생각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나 되게 순수하게 생각하는데?”
“무슨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너랑 사귀고 싶다.”
“...”
정이슬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왔다.
“나랑 사귈래?”
“... 아니요.”
정이슬이 순간 씁쓸하게 웃었다가 입을 열었다.
“왜? 이번엔 공개고백도 아니잖아.”
“저 그냥 누구 만날 생각 없어요 지금.”
“그럼 나중에는 사귈 생각 있는 거야?”
“그건 모르죠.”
“모솔될 건 아니잖아.”
멋쩍게 웃었다.
“그건 그렇겠죠.”
“그럼 나중에 누구 만나야겠다 생각들 때 제일 먼저 나 떠올리면 안 돼?”
“...”
“왜 대답 안 해줘?”
“그냥 좀.”
가슴이 답답했다.
“누난 왜 저 좋아해요?”
“왜냐니. 그냥 네 이것저것 보고 꽂힌 거지. 꽂히고 나선 네 모든 게 다 좋아졌고.”
“...”
정이슬이 미소 지었다.
“그럼 지금은 안 되는 거지?”
“... 네.”
“... 알겠어. 나중을 노릴게.”
“...”
“근데 나 지금 안에서 좀 더 자도 돼? 너무 졸려서.”
“네. 주무세요.”
“응. 고마워.”
정이슬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걸어가다가 휘청거리면서 오른발이 미끄러져 몸이 왼쪽으로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어서 빠르게 정이슬을 껴안아 붙잡아줬다. 정이슬이 고개를 들자마자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다. 정이슬의 눈매가 휘었다. 요망한 건 알았는데 원래 이렇게 예뻤나. 탄식을 흘릴 뻔했다. 정이슬이 입을 열었다.
“너 또 나 반하게 하는 거 알아?”
“그냥 손 놓을까요?”
“아니. 이대로 나 안아 들고 눕혀줘.”
“너무 떼쓰는 거 아니에요?”
“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무게가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힘을 아예 다 뺀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정이슬을 안아 들어서 오른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눕던 베개에 정이슬을 눕혔다. 내 목을 감싸 안고 있던 정이슬이 내 왼 볼에 뽀뽀를 한 번 한 다음 놓아줬다.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됐는데. 왼손을 들어 왼 볼을 한번 쓸었다. 정이슬이 히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 일곱 시 반에 깨워줄 수 있어?”
“알겠어요. 자요 누나.”
“응. 고마워.”
“네.”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수건이 없어서 화장실 티슈를 네 장 뽑아 물기를 닦아냈다. 거울로 내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불안해졌다. 내일도 누가 날 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제 송선우가 갑자기 고백해오고 오늘 정이슬이 입술을 덮쳐온 것처럼 또 입술을 뺏길 것만 같았다. 이마에 땀이 한 방울 맺혔다. 오른손으로 땀을 훔치고 손을 씻었다. 머리가 아팠다. 감이 망상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을 나서는데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침밥이나 먹고 와서 정이슬을 깨워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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