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196화 (196/438)

〈 196화 〉 장례식 (11)

* * *

김세은이 매니저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는 나를 껴안아 몇 번이고 등을 토닥이고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준 부원들도 차차 일어나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가장 늦게 일어난 송선우가 신발을 신고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남겠다고 하는 걸까. 고개 저었다. 입을 옴싹여 고맙다고 했다. 송선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장례식장을 나갔다. 뒤돌아 영좌 앞에 갔다. 향을 새로 하나 꺼내 불을 붙인 다음 꽂고 외할아버지 옆에 갔다.

“외할머니는 주무시는 거예요 지금?”

“그래. 넌 지금 안 피곤하냐?”

“조금 피곤해요.”

“그럼 자기 전에 병원이나 갔다 와라.”

“네.”

“친척 중에 아무나 좋으니 도와달라고 하고 부축 받아서 가라.”

“알겠어요.”

“아니다 그냥 내가 말하마.”

“네.”

외할아버지가 체격이 나랑 비슷한 중년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끄덕인 아저씨가 이내 외할아버지랑 함께 내게 다가왔다.

“네 외당숙되시는 분이다. 이름은 정숙영이고.”

“그냥 아저씨라 불러주라.”

“네. 숙영 아저씨.”

숙영 아저씨가 웃었다.

“그래.”

마주 웃었다. 숙영 아저씨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업혀.”

“아, 네. 감사합니다.”

“응.”

등에 업히고 두 팔로 목을 감싸안았다. 아저씨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장례식장을 나가 계단을 밟았다. 숙영 아저씨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말을 매우 아꼈다. 병원에 접수를 하고 나를 의자에 앉혔을 때에야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온유야.”

“네.”

“그, 네 아버지 기사로 낸다고 들었는데, 맞아?”

“네.”

숙영 아저씨가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겠어?”

“제가 불이익받을 게 있냐요?”

“글쎄... 딱히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드는데, 뭔가... 아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예요. 오히려 저 불쌍하다 생각해줄 사람이 많겠죠.”

숙영 아저씨가 눈을 감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불편했다.

“아저씨가 생각하시기에 걸리는 거 있나요?”

“없어, 그냥 너무 생각을 한 거 뿐이지, 너 관련해서 걸리는 건 없었어.”

“그럼요? 따로 뭐 있나요?”

“응. 근데 너랑은 별 상관없어서.”

“그래도 얘기해주세요.”

“... 네 새엄마랑 새여동생.”

“...”

“불륜녀 되고 불륜녀 딸 되는 건데, 그럼 당사자들은 많이 속 썩이겠지... 만약 네가 새엄마랑 여동생이랑 사이 좋았으면 안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사이가 좋을 리가 없으니까... 그치?”

“... 네.”

“그럼 다행이고.”

내 이름이 불렸다. 숙영 아저씨가 다시 나를 업고 진료실로 데려갔다. 발목 통증을 얘기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 의사는 약 먹고 고통이 가라 앉을 때까지 이틀이나 사흘을 냉찜질해주고 다음날에 온찜질만 잘하면 나을 거라 말했다. 발목에 가볍게 붕대를 감고 또 다시 숙영 아저씨가 나를 업어서 밖으로 나섰다. 밤공기가 싸늘했다.

“아저씨는 언제까지 있으세요?”

“나? 나... 너 장례식장에 내려놔주고 가야 될 거 같아. 내일 가게 일도 있고 하니까...”

“괜찮아요.”

숙영 아저씨가 살폿 웃었다.

“그래...”

숙영 아저씨가 장례식장에 들어가 비좁은 방안에 나를 내려놓아주셨다. 외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셔서 그런지 나를 내려주실 때 끄응거리는 소리도 꾹 참으셨다. 참 보면 볼수록 좋은 분인 것 같았다. 숙영 아저씨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가볼게.”

“네. 안녕히 가세요.”

“응.”

숙영 아저씨가 방에서 나가고 가겠다고 하면서 외할아버지랑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같이 계셔줬던 외가 친척분들도 차차 가시는 듯했다. 멍하니 벽지를 봤다. 얼마 안 가 방문이 열리고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미셨다.

“온유야.”

“네?”

“나와봐라.”

“네.”

일어나서 나가고 소리가 안 나게 방문을 조심히 닫았다. 외할아버지가 소주랑 막걸리를 두 병씩 꺼내 양손에 두 병씩 들고 좌식 탁자에 내려놓으셨다. 외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시고는 종이컵을 둘 꺼내 하나를 반대편에 놓았다.

“와서 앉아라.”

“네...”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외할아버지가 소주를 흔들고 뚜껑을 열어 내 종이컵에 반절이 넘게 따랐다.

“술은 속 안 버리게 안주 먹으면서 마셔야 된다.”

“... 네.”

외할아버지가 소주병을 건네서 두 손으로 받고 외할아버지의 종이컵에 조심히 따랐다. 외할아버지가 젓가락을 들어 애호박전을 한 입 먹고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요 외할아버지...”

“응?”

“편지 안 보셔도 돼요?”

외할아버지가 다시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됐다. 딸이 얘기한 게 있는데 볼 수 없다.”

“네...”

소고기 버섯 볶음에서 소고기 한 점이랑 표고 한 점을 같이 집어 먹고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외할아버지가 나를 흘깃흘깃 보시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그, 온 애 중에 좋아하는 여자애, 그니까 여자친구 있냐?”

“네.”

“그래 그럼...”

외할아버지가 눈을 찡그리고 막걸리를 따서 그릇에 꼴꼴 따랐다.

“잘해라. 후회하지 않게. 책임지고. 그것밖에 말해줄 게 없다.”

“... 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오른손으로 그릇을 들고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셨다. 정말 해줄 말이 그것밖에 없으셨던 건지 아니면 할 말이 많아도 억지로 참으신 건지 눈이 풀릴 때까지 쭉 안주를 먹고 술을 마시기만 하셨다.

“온유야. 나 자러 가야겠다.”

“네. 부축해드릴게요.”

“너 다리 삐었잖냐.”

“괜찮아요 이틀이면 낫는 거래요.”

“... 그래. 고맙다.”

일어나서 외할아버지 왼편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외할아버지의 왼 겨드랑이 밑으로 오른팔을 넣고 오른 겨드랑이 밑에 오른손을 넣었다. 외할아버지가 일어나는 순간에 맞춰 일어나고 방안으로 외할아버지를 데려가 바닥에 눕혔다. 외할아버지가 금방 잠드셨다. 베개를 밑에 깐 다음 누워 두 눈을 감았다. 등이 따뜻했다. 보일러를 아주 강하게 틀지는 않은 듯했다. 잠들기 좋은 온도인데 졸리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잡생각이랑 슬픔이 찾아올 게 뻔했다.

잠을 억지로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면제가 있기는 하지만 약물은 별로 꺼려졌다. 아, 시작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붙잡고 씨름해야 할 거였다. 옆으로 누워 눈을 떴다. 외할아버지의 형체가 보였다. 후회하지 않게 잘하고 책임지라 하셨는데. 여자친구가 둘이면 어떻게 잘하고 책임져야 하는 걸까. 백지수를 포기해야 할까? 그럼 백지수에게는 상처만 주는 것이니 잘하는 것도 아니고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백지수를 잃을 테니 후회도 할 거였다. 그렇다면 둘 다 책임져야 하는 걸까. 김세은은 어느 정도 인정해준 거 같긴 한데, 백지수는 과연 그걸 받아줄까. 어려웠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흐음,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다면 둘 다 사랑하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서, 욕심만 따지자면 모두를 원했다. 외할아버지가 내 마음을 알았다면 분명 미쳤냐며 타박하셨을 테지만, 내가 느끼는 것을 억지로 교정할 수는 없었다.

내 이기적인 생각을 백지수에게도 고백해야 할 거였다. 백지수는 절대 기뻐하지 않을 테지만 기만하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더 잘 대해주는 것일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백지수에게 내가 여태 김세은이랑 섹스까지 하면서 사귀어 왔으며 김세은과의 관계를 끊지 않은 채로 너랑도 사귀고 싶다고 얘기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맨정신으로 말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해야만 했다. 다시 백지수를 볼 때가 언제일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벌써 엄청 걱정스러웠다.

하얀 문이 열렸다. 장례지도사가 연 건가 싶었는데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윤가영이었다. 멍했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입이 벌어졌는데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누가 봐도 미안한 표정을 한 윤가영이 입을 열었다. 온유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화가 치밀다 못해 정신을 잃기라도 할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어머니의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화가 나는 순간은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켜서 문을 열고 신발을 대충 구겨 신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왼 발목의 통각 신경이 자꾸만 자극돼서 내가 속도를 못 내게 했다. 유리문을 당겨서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계속 뛰었다. 뒤에서 온유야, 온유야, 하고 윤가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졌다. 다리만 안 삐었으면. 붙잡힐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내 두 팔에 크지 않은 두 손이 얹혔다. 등에 누군가의 이마가 붙은 느낌이 났다. 헤엑, 온유야, 헥, 발목에 붕대도 감았으면서, 학, 왜 뛰었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기증이 났다. 윤가영은 얼마나 우리 모자를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이마에 오른손을 얹었다. 이마가 뜨거운 건지 손이 뜨거운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뜨겁다는 것만 확실했다. 숨을 헐떡였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편히 숨 쉬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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