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수요일 (1)
* * *
야 씨 빨리 일어나아...!
몸이 흔들렸다.
일어나라고오...!
백지수 목소리였다. 눈을 감은 상태인데 빛이 눈두덩이를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아마 형광등을 켠 듯했다. 전등을 켠 거면 아침이 아닌 건가? 왜 일어나서 날 깨우는 거지? 눈을 반만 떴다. 금방 머리를 감고 말린 듯한 촉촉한 머리카락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찌푸려 초조한 표정을 한 백지수가 보였다. 왜 또 머리를 감았을까. 표정은 왜 또 이렇게 불안해 보이고.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야 빨리 일어나.”
“왜...?”
백지수가 얼굴을 가까이해왔다. 키스하자는 건가? 입을 벌렸다. 백지수가 입술을 안 포개오고 내 왼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나 아빠 왔어.”
“어...? 너한테 온다고 하셨었어...?”
“아니. 그냥 갑자기 쳐들어오신 거야.”
백지수가 허리를 펴고 나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고 주방으로 와.”
“어, 어...”
이불을 발치로 밀어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충전해둔 폰을 들어 켜봤다. 다섯 시 사십일 분이었다. 백지수 아버님은 왜 이런 시간에 아무 말도 없이 오신 걸까. 아니 그보다 딸의 자취방에서 소파에 누워있는 남자애를 발견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속 자게 내버려두셨을까. 대체 왜 날 안 죽였을까. 하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주방으로 오랬는데 가기 무서웠다. 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말을 맞추지도 않은 채로 가야 해서 더 가기 꺼려졌다. 일단 화장실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얼굴을 닦았다. 백지수는 내가 남자친구라고 했을까?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눈을 떴다. 세면대 거울로 다크서클이 옅게 진 내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다시 물을 틀어 오른손으로 이마에 물을 여러 번 묻힌 다음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머리는 여전히 뜨겁고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가글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크기가 꽤 큰 사각형의 4단 도시락이 있었다. 테이블 앞 의자에 적당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포마드로 고정하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을 한 중년 정도 돼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오른편에 백지수가 앉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머리를 깍듯이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백지수 아버님이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 몸을 내 쪽으로 약간 돌려 오른손을 내게 내밀었다.
“백도식이네.”
이름을 말해야 하나? 일단 두 손으로 백지수 아버님의 오른손을 잡았다. 답할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온유라고 합니다.”
“그래. 자리에 앉지.”
“알겠습니다.”
백도식을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백도식이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기보다는 표가 안 날 정도로 느리게 훑고 있었다. 머리부터 천천히 뜯어보는 시선이 집요하고 매서웠다. 숨 막혔다. 만약 어제 뒷정리를 안 하고 잠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몸이 눈에 뜯기는 게 아니라 손아귀에 뜯기지 않았을까? 숨을 입으로 조용히 들이쉬었다. 백도식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쌓여있는 4단 도시락을 테이블에 하나씩 늘어놓고 뚜껑을 열었다. 하나에는 잡곡밥이 들어있었고, 또 하나에는 과일이 있었다. 다른 두 개에는 반찬거리가 담겨있었다. 백도식이 갑자기 일어나서 수저통에서 숟가락 세 개랑 젓가락 세 쌍을 가져와 백지수에게 한 세트를 주고 자기 앞에 한 세트를 놨다. 일어서서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식 좀 들게.”
“... 감사합니다.”
백도식이 젓가락을 들어 치즈 돈까스를 한 조각 집어 반절을 베어 물었다.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계속 보기만 하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일단 일어서서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꺼내고 오른손 약지 중지 검지에 컵 손잡이를 하나씩 끼워 세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은 다음 콜라를 따랐다. 잔을 백도식이랑 백지수 앞에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백도식이 남은 돈까스 조각도 씹어 넘기고 입을 열었다.
“꽤 익숙한 모양이구나.”
“...”
백도식이 컵을 들었다.
“지수가 했어도 되는 일인데 말이야.”
백도식이 말하고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아빠 그러지 마...”
“음? 무얼 두고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거냐?”
“막 이상하게 말하잖아 지금...”
“글쎄. 내가 말한 게 못할 말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아니 그래도 좀...”
“알겠다.”
백도식이 밥을 한술 뜨고 갈치 조림의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 입에 넣었다. 백지수를 바라봤다. 백지수가 눈을 마주쳐왔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릇을 세 개 가져와 각자의 앞에 놓았다. 백지수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제 엉덩이를 때린 것 때문에 앉을 때 엉덩이가 따끔한 모양이었다. 신음을 참아주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해서 입가에 미소를 띄울 뻔했다. 고개를 돌려 백도식을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이 주방을 맴돌았다. 입안에 든 걸 꿀꺽 삼킨 백도식이 숟가락을 자기 그릇 안에 내려놓았다.
“이거 내가 식객이라도 된 거 같군. 내 방문 경위라도 읊어줘야겠나?”
“...”
식객은 나를 겨냥하고 하는 말일 거였다.
“아 아빠... 왜 혼내... 얘 그냥 내 친구야...”
친구라고 했구나. 잡아떼야 할 거였다. 근데 머릿속 한편으로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도 했다. 백지수가 아버지한테 내가 남자친구라는 걸 고백하고 백도식이 백지수를 붙잡아서 본인이 남자친구이기를 자처하는지 확인해보자고 흉계를 꾸민 거 아닐까. 아무래도 의심암귀일 확률이 높았지만 불안했다.
“아니 혼내기는 무슨. 그냥 운만 좀 띄운 건데.”
느껴지기로는 엄청 강압적이었다. 백도식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일과를 새벽부터 시작하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시간대라 혼자만의 일을 할 수 있거든. 그때 운동도 하고 조금 이르게 식사도 하고, 명상도 하고. 해가 밝으면 그런 일은 할 시간이 없지. 그래서 굳이 새벽인 지금 찾아온 이유는, 달리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네.”
“...”
백도식이 나를 보고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조소 같았다.
“과묵한 친구구나. 내 하나만 묻지. 왜 굳이, 오늘이었을까?”
변덕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그리 단순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하필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뭘까. 아마 백지수 자취방에 같이 사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러 온 거일 거였다. 자취방에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백지수가 말해줬나? 아닐 거였다. 지금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면 백도식에게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는 듯했다. 결국엔 백도식이 스스로 알아냈을 거였다. 그걸 스스로 알 방법이 있나? 굳이 말 사이에 텀을 줘서 오늘을 강조한 걸 고려하면 날짜랑 관련된 것일 듯한데.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입을 열었다.
“... 세금이 많이 나왔나요?”
백도식이 미소 지었다.
“그래. 수도세가 많이 나왔길래 동성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더군. 우리 지수가 동성애자는 아니라는 소리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진짜 좀 적당히 해 아빠아...”
백도식이 지수를 무시하고 나를 바라봤다.
“요즘 애들이 다 빠르긴 하다던데... 동거도 서슴치 않을 줄이야.”
백도식이 콜라를 한 입 마시고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둘이 섹스는 했나?”
“아 아빠!”
“안 했습니다.”
“넌 그걸 뭘 대답하고 있어!”
“안 했다니 다행이구나. 근데 자네는 가출한 건가? 집안에 문제는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어디 눈에 보이는 곳에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면 학대도 안 당한 듯하고. 뭐 하나 모자람 없이 큰 거 같은데.”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 있었다라... 그럼 자네는 무슨 일이 생기면 아는 여자애부터 찾아가는 건가?”
백지수가 아, 하고 탄식하면서 테이블에 두 팔을 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빠 그만 좀 하면 안 돼...?”
“지수야. 네가 그만하래서 내가 관둘 거 같아 보이냐?”
“아 그냥 좀 봐줘...”
“누굴 봐달라는 거냐? 너? 아니면 저 친구?”
“아 진짜 왜 그래...”
백도식이 말없이 백지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미 똑바로 앉고 있는데 자세를 고쳐앉아야 할 것 같았다.
“자리가 불편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
백도식이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안하네. 늘그막에 가진 딸내미라 아무래도 마음이 많이 쓰여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게.”
“괜찮습니다.”
“그래.”
백도식이 도시락 뚜껑을 도로 덮기 시작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빨리 돌아가게. 동성이 룸메이트여도 일이 생기는데 남녀 둘이 같은 집을 쓰면 무슨 문제든 생기니까.”
“... 알겠습니다.”
백도식이 도시락을 도시락 가방에 하나씩 넣었다.
“만일 이다음에 마주하게 된다면 그땐 내가 와서 우연히 보는 게 아니라 자네가 찾아온 거였으면 하네.”
“... 네...”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 못 했는데 백도식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백지수가 먼저 일어나서 뒤따랐다. 뒤늦게 뒤따라갔다. 백도식이 신발을 신고 뒤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한마디만 하고 가지. 백가는 한번 문 건 놔주지 않네.”
“...”
“말 끝났음 빨리 나가 아빠.”
“... 그래.”
백도식이 또 나를 바라봤다.
“잘 있게.”
“네. 안녕히 가세요.”
백도식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을 나섰다. 백지수가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가 대문을 닫고 안에 들어와 현관문을 잠갔다. 같이 거실로 걸어갔다.
“미안해. 아빠가 원래 저런 사람이라.”
“괜찮아. 오히려 난 안 죽어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하는데.”
백지수가 느닷없이 현관이 안 보이는 벽에 등을 기댔다. 멈춰섰다. 백지수가 두 팔을 벌려왔다. 미소 짓고 다가가서 얼굴을 가까이해 입술을 포갰다. 백지수가 눈웃음 지었다. 발기했다.
“하움... 츄읍... 쮸읍... 츄릅... 헤웁...”
백지수가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바지 위로 내 자지를 잡아 주물러댔다.
“너 더 자야 되는 거 아냐?”
“쮸읍... 몰라. 하움... 잠 다 날아갔어.”
“나도.”
“츄읍.., 서로 두 번씩만, 헤웁... 갈까?”
“그래.”
얼굴을 떼고 백지수를 안아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오른 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화장실에서 하자.”
“침대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응.”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자취방을 기습해온 아버지가 가시자마자 보지를 푹푹 적실 생각으로 가득 차서 남자친구를 유혹해대는 성욕에 지배된 고2 자위중독녀라니. 존나 야하고 사랑스러웠다. 잠시 멈춰서서 왼팔을 조금 올려 2초 정도 백지수의 왼 볼에 입술을 맞췄다. 백지수도 내 왼 볼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백지수 아버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으로 가득해야 할 순간인데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어쩌면 백지수는 내 마음이 가라앉을 걸 예상하고 서로 자위를 도와주자고 한 걸지도 몰랐다. 물론 성욕을 해소하려는 것도 있었을 거였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지수가 내 목에 두 팔을 감아와 얼굴을 가까이 해서 내 오른 볼에 입술을 맞췄다. 미소 지어졌다. 야하고 사랑스럽고 사려 깊은 백지수가 한없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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