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화요일 (4)
* * *
ㅡ난 겨우 내 앞가림하는 이기적인 애예요. 완벽하지도 않고.
ㅡ지금 그쪽 모든 게 맘에 들어요.
ㅡ지금이야 그렇죠. 근데 곧 거슬려 할 테고 난 자기를 지루해할 거야.
조엘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ㅡ괜찮아요.
ㅡ좋아요.
클레멘타인이 울상을 짓고 소리 내어 웃었다.
ㅡ뭐 어때...
ㅡ괜찮아요.
조엘이 낮게 속삭였다. 클레멘타인이 울상을 걷어내고 큭큭대며 웃기 시작했다. 조엘도 마주 웃으며 클레멘타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오른손을 주먹 쥐어 입을 가렸다. Change your heart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가 배경음으로 흐르면서 장면이 바뀌었다. 눈 덮인 몬타우크 해변에서 조엘이 뒤를 돌아보며 엉거주춤 달리고 클레멘타인이 휘청이며 그를 뒤쫓아 뛰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멀어지면서 화면이 하얗게 아득해졌다. 그러다 한 순간 검은색으로 암전하고 크레딧이 올라갔다.
고개를 돌려 송선우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건드리면 안 될 거 같아서 다시 고개를 화면으로 돌리고 송선우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온유.”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했는데 송선우가 왼손을 들어 내 오른 볼에 대서 고개를 돌리는 걸 막았다.
“잠깐 나 보지 마봐.”
“응.”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넌 어떡했을 거야? 네가 조엘이었으면?”
송선우가 물었다.
“영화랑 똑같이 했을 거 같은데.”
“왜? 결국엔 실망할 확률이 백 퍼센트인데도?”
“근데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걸 외면할 수는 없잖아.”
“무조건 헤어진다고 해도?”
“헤어진다는 생각을 안 하지 않을까? 지금은 모든 게 맘에 들고 안 좋은 점을 찾을 수 없으니까. 나중엔 서로가 원해서 헤어지고 마는 결과가 나올 게 확실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믿을 거 같은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상대라고 해도.”
“그래?”
“어.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질 생각을 하고 사겨? 그럼 그건 사랑을 안 한 거지.”
“... 넌 누구 사랑해본 적 있어?”
“왜 분위기 잡아 갑자기. 오글거리게.”
“아니 그냥 궁금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길래.”
말투가 약간 퉁명스러웠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 너 지금 봐도 돼?”
“안 돼 너 그럼 내가 너 목 졸라서 죽여버릴 거야.”
“너무 사나운 거 아냐?”
“몰라 나 화장실 갈 거니까 볼 생각하지 마.”
“응.”
“눈 감아.”
“알겠어.”
눈을 감았다. 송선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는지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잠깐 떴다가 다시 감았다. 송선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울었나? 모솔이 보고 울기에는 적절한 것 같지 않은데. 아무래도 감수성이 풍부한 듯했다. 입을 열고 크게 소리냈다.
“나 눈 떠도 돼?”
“떠.”
화장실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눈을 뜨고 폰을 켜 봤다. 한 시 이십칠 분이었다. 대충 영화 한 편 더 보고 나가면 될 듯했다. 폰을 끄고 도로 내려놓은 다음 송선우를 기다렸다. 금방 화장실을 나온 송선우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건지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고 입을 열었다.
“울었어?”
송선우가 내 오른편에 앉고 리모컨을 잡았다.
“안 울었어.”
“그럼 왜 화장실 가서 얼굴 닦고 와?”
송선우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래 나 울었다. 꼽냐?”
“아니.”
“... 야.”
“응?”
송선우가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한숨을 폭 쉬고 고개를 돌려 화면을 봤다.
“아냐. 됐다.”
“이상하네?”
“됐다고.”
“...”
나도 고개를 돌려 화면을 봤다. 송선우가 리모컨을 조작해 검색창에 들어갔다.
“이번엔 뭔 영화 보게?”
“어바웃타임.”
“복습하게?”
“어.”
“너 지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배고파?”
“응.”
“난 딱히 없는데.”
“가라아게 할까?”
“좋지. 몇 조각 만들어줘.”
피식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닭다리살을 꺼내고 2인분을 가늠해 도마에 올려 한 입 크기로 잘라줬다. 남은 닭다리살은 도로 냉장고에 넣고 잘라낸 고기는 보울에 넣어 진간장, 청주, 다진 마늘, 생강가루, 설탕, 후추를 넣고 조물조물거렸다. 랩을 씌우고 냉장고에 넣었다. 거실에서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영화를 안 보나? 주방을 나가 확인해봤다. 송선우가 폰을 만지고 있었다.
“왜 영화 안 봐?”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너랑 같이 보려고.”
“이거 고기 진짜 최소한 십 분은 냉장고에 둬야 되는데. 기름에 두 번 튀기는 것도 기다려야 되고.”
“그럼 기다리지 뭐.”
“알겠어.”
주방으로 돌아갔다.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리고 기름을 부어놓았다. 바로 반죽을 하고 달궈진 기름에 빠뜨려야 하니 냉장고에서 전분을 꺼내놨다. 또 뭐 할 게 없을까 하다가 점심 대신으로 먹는 건데 가라아게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판 케이준 양념감자를 꺼내놓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온도가 올랐을 때 양념감자를 크게 한 줌 집어 채에 올리고 기름에 조심히 넣었다. 젓가락을 가져왔다. 감자튀김이 적당히 익었을 때 채로 건져내고 젓가락으로 약하게 쳐서 기름을 빼고 공기랑 살짝 닿게 한 다음 다시 기름에 빠뜨렸다. 몇십 초가 지나 먹음직스러운 색이 났을 때 채로 건져올리고 큰그릇에 옮겼다. 기름이 온도만 유지되게 불을 줄였다. 감자튀김 부스러기를 채로 건져 싱크대에 버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감자튀김이 바삭하니 가라아게는 식감이 약간 부드러울 게 좋을 것 같아 보울과 함께 계란도 하나 꺼냈다. 랩을 벗겨내고 전분을 넣고 계란도 까서 넣은 다음 조물조물거렸다. 불을 다시 키워주고 반죽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곧바로 떠올랐다. 고기를 하나씩 들어 살살 흔들어주며 기름 속으로 떨어뜨렸다. 노란 빛이 날 때 채로 건져올리고 젓가락으로 탁탁 쳐준 다음 손을 바꿔들어 젓가락으로 가라아게를 하나씩 들어주면서 공기랑 닿게 했다. 그러고 다시 기름에 가라아게를 빠뜨리고 갈색빛이 돌 때 다 건져올려 그릇에 옮겨담았다. 하얀 소스볼을 둘 꺼내 하나에는 마요네즈를 담고 하나에는 케챱을 담았다. 마요네즈에 설탕을 한 큰술 넣고 레몬즙을 뿌려 섞어주고 맛봤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컵 두 개를 테이블에 놓고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가득 부어줬다. 다 쟁반에 올리고 포크를 둘 놓은 다음 조심히 들어서 거실로 가져갔다. 송선우가 나를 쳐다보고 폰을 꺼 내려놓고는 오른편에 바짝 붙어 앉았다. 송선우가 왼손으로 소파 가운데를 톡톡 치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에다가 놓고 먹자.”
“그래.”
소파 가운데에 조심히 내려놓고 왼편에 앉았다. 별 생각 없다 했으면서 자기도 배고프긴 배고팠는지 송선우가 바로 포크를 들고 가라아게를 하나 찍어 레몬마요를 살짝 묻힌 다음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어때?”
송선우가 왼손을 들어 엄지를 세워 보여주고 다시 펼쳐 입을 가렸다.
“개 맛있어.”
미소 짓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들었다. 가라아게를 하나 찍고 레몬마요에 반쯤 담그듯이 하고 입에 넣었다. 바삭한 듯 눅눅한 식감에 새콤달콤하면서 짭쪼름한 맛이 났다. 감자튀김을 세 개 동시에 찍어 케챱을 바르고 입에 넣었다. 새콤한 케챱이 제일 먼저 혀를 건드리고 바삭한 식감이 입을 즐겁게 해주다가 케이준 스파이스의 살짝 매콤한 맛이 입에 감돌았다. 감자튀김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라아게만 했다면 금방 질렸을 거였는데 감자튀김이 있으니 서로를 보완하며 시너지를 내는 느낌이었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영화 보자 이제.”
“아 그치.”
송선우가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틀었다. 처음 몇 십 초는 넘겨 놓았는지 검은 화면에 ABOUT TIME이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암전됐다가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나오기 시작했다.
ㅡ우리 가족이 좀 이상하다는 건 항상 알고 있었다. 우선 나부터 그렇다.
*
정장을 빼입고 파란 넥타이를 멘 팀이 연신 뒤돌아 보는 딸을 보며 손인사했다. 팀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ㅡ우린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항상 함께 시간 여행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나레이션이 끝나고 장면이 바뀌어 여러 사람의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나왔다. 발로 물을 튀기며 또래 아이와 장난을 치는 아이, 자유투를 시도하는 머리 묶은 여자, 책을 보고 함박웃음지으며 간식을 먹는 남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 짓는 선글라스를 낀 여자, 테라스에서 키스하는 연인, 아기를 쇼핑카트에 태우고 해맑게 웃으며 함께 카트를 미는 부부, 보호 장구를 모두 착용하고 자전거를 타는 남자, 돌로 된 의자에 서류가방을 베개 삼고 푸른 하늘을 천장 삼아 누운 남자, 서로의 반려견이 눈이 맞아 똑같이 쪼그려 앉아 두 강아지가 노는 모습을 보는 두 여인 등. 여러 장면이 지나고, 핸드폰을 오른 귀 가까이에 댄 채 거리를 걷는 메리가 등장한다.
ㅡ그래, 그럼 그때 보자.
팀이 미소 지으며 거리를 걷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ㅡ안녕. 나중에 봐.
팀이 오른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보며 걷다가 그대로 프레임을 벗어난다. 검은 화면으로 바뀌고 그 중앙에 THE END라는 글자가 반짝인다. 노래 How long will I love you가 흘러나오며 크레딧이 나온다.
“보고 또 봐도 개 달다 진짜...”
송선우가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너 근데 언제 나가야 돼?”
“좀 있으면.”
“으음... 그럼 영화 관련해서 아무 말이나 해보세요.”
“음... 전엔 안 보였던 건데, 마지막에 팀이 거리 걸으면서 전화 받고 폰 내려보잖아.”
“응.”
“그때 팀이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고 딱 그 순간에 검은 화면 되고 ‘디 엔드’가 뜨는 게, 약간 팀이 정말 시간 여행이라는 초능력을 넘어서서 일상에 편입됐다는 느낌? 대충 그런 생각 들었어.”
“오. 오!”
송선우가 왼손으로 내 오른 어깨를 팍팍 때렸다. 왼손으로 오른 어깨를 감쌌다.
“아파.”
“진짜 미쳤냐 이온유? 개 지리네.”
피식 웃었다. 일어서서 쟁반을 들었다. 송선우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어디서 영화보는 법 배워?”
“그냥 영상 찾아보는데요?”
“누구누구 보는지 나 알려줘 구독 박게.”
“시간 나면 톡으로 보낼게.”
“오키 감사. 뽀뽀라도 해줄까?”
“됐어.”
“내숭은.”
송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갔다.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허리를 폈는데 송선우가 뒤에서 갑자기 와락 안아와서 내 오른 볼에 입 맞췄다. 오른손으로 볼을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봤다.
“어? 그걸 지운다고?”
“지움 안 돼?”
송선우가 히히 웃었다.
“응. 포상이니까 감사히 여기고 내버려둬야지.”
“됐습니다.”
송선우가 옆에 다가왔다. 또 입술 박치기를 할 거 같아서 살짝 뒷걸음질 치면서 손으로 막을 준비를 했다. 걱정이랑 다르게 송선우가 그릇을 쌓아 들고 싱크대에 가져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네가 요리했으니까.”
“어 고마워.”
“응.”
송선우가 물을 틀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약간 신기했다. 분명 제멋대로인데 아주 막나가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미성년자 섹스는 안 된다는 거랑 비슷한 기준선이 아마도 송선우한테는 여럿 있는 모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