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월요일, 근데 이제 학교를 안 가는 (11)
* * *
백지수가 아일랜드에 두 손을 짚고 느리게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이온유나 머리 감겨줘.”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백지수를 바라봤다.
“머리를 감겨 달라고?”
“응.”
백지수가 휘청휘청 걸었다. 송선우가 일어나서 백지수의 왼 겨드랑이로 오른팔을 넣고 부축했다. 나도 일어나서 백지수의 반대편에 갔다.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부축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애.”
“알겠어.”
“근데 뭔 소리야? 머리 감겨 달라는 게?”
백지수가 송선우를 바라봤다.
“그냥 말 그대로.”
“음,좀그런데...?”
“뭐가.”
“혼자서도 머리 감을 수 있잖아.”
“근데 미용실에서 머리 감겨주는 거 좋잖아.”
“그렇긴 한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걸 진짜 집에 들여놨구나...”
송선우가 말했다.
“응.”
백지수가 답했다. 송선우가 백지수를 곱게 눕혀줬다. 그림이 너무 이상해서 이게 진짜 뭔가 싶었다. 걸어가서 발걸이를 올리고 샤워기 헤드를 잡았다. 송선우가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섰다가 살짝 왼쪽으로 휘청였다. 헤드를 놓고 바로 두 손으로 양옆 팔을 붙잡아 몸을 세워줬다.
“고마워.”
“많이 취했어?”
송선우가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 웃음이 나왔다.
“뭐야, 고개 젓다가 마는 건.”
“고개 젓는데 어지러워서 취했구나 싶었지.”
“으응...”
“머리 안 감길 거야?”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백지수가 차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감겨야지.”
다시 샤워기 헤드를 잡았다. 물을 틀고 온도를 확인했다. 조금 얼떨떨했다. 아무래도 나도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송선우를 봤다가 백지수를 봤다. 백지수는 평소 머리 감기는 걸 내게 맡길 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백지수의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설마 지금 키스를 요구하진 않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약간 두려워졌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고막에 느껴졌다. 샴푸를 해주고 나서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물로 거품을 씻어내린 다음 이윽고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귀 만져줘.”
그냥 귀만 만져달라는 거겠지? 왼손으로 먼저 왼 귀를 만져줬다. 헤드를 바꿔 들어 오른 귀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송선우 쪽을 흘깃 봤다. 송선우가 졸린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서도 계속 어떻게 하나 관망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백지수가 말했다. 물을 잠그고 헤드를 내려놓은 다음 양손으로 귀를 만졌다. 백지수가 두 손으로 팔걸이 끝부분을 꽉 잡고 몸을 비틀어댔다.
“으응... 흐읏... 흐음...”
아니 좋아도 송선우도 있는데 좀 참지. 그렇다고 타박할 수는 없었다.
“흥... 으음...”
“나도 부탁해도 될까요 온유씨?”
송선우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송선우를 바라봤다.
“네?”
“나도 머리 감겨주세요.”
백지수가 눈을 뜨고 송선우를 쳐다봤다.
“이용료 받을 거예요.”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얼만데요?”
“십억이요.”
“십억은 에바잖아.”
“십억 아니면 안 팔 거야.”
“그래?”
송선우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나 공짜로 해줘 온유야.”
“거래는 저를 통해서 하셔야 되는데요?”
송선우가 미소를 머금고 백지수를 바라봤다.
“중간에 매개하는 분이 너무 폭리를 취해서 공정무역 좀 해야겠는데요?”
“폭리 취하는 건 너 아냐? 공짜로 요구하는 거면.”
“가격 조정은 온유랑 나 사이에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얘들 진짜 왜 이러지?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싶었다. 근데 내가 말을 섞어도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아냐. 됐어. 안 감겨줘도 돼.”
백지수가 송선우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왜?”
“안 감겨줘도 상관없으니까.”
“너 나 잘 때 감겨 달라고 하려는 거지.”
송선우가 씨익 웃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왤케 똑똑해 지수야?”
“안 돼.”
백지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절대 안 돼. 해주지 마.”
“...”
송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머리 감겨주는 게 뭐라고 그렇게 과민반응해?”
“...”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선우도 머리 감겨줘.”
“네.”
왜 존댓말이 튀어나왔지? 스스로 이해가 안 됐다. 수건으로 백지수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새로운 수건을 하나 꺼내왔다.
“지수야 몸 일으켜봐.”
“응.”
백지수가 몸을 일으켰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다시금 닦아내주고 수건을 목에 걸쳐줬다. 백지수가 샴푸 의자에서 나와서 왼 팔걸이에 두 손을 얹은 채 구부정하게 섰다. 송선우가 샴푸 의자에 눕고 눈을 감았다. 샤워기를 틀고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온도 괜찮아?”
“응. 적당해.”
천천히 머리를 감겨주고 샴푸를 했다. 거품을 씻어낼 때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귀 만져줘 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려 백지수를 바라봤다. 백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만요.”
거품기가 완전히 없어진 걸 확인한 다음 헤드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귀를 만져줬다. 송선우는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고 두 손을 쫙 폈다가 팔걸이를 붙잡고 움켜쥐는 정도의 움직임만 보였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이게 그렇게 신음 흘릴 일이야 지수야?”
“흘릴 수도 있지. 넌 기분 안 좋아?”
“좋긴 좋은데, 신음까지 흘릴 건 아니라고.”
침묵이 화장실을 채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거니까...”
송선우가 눈 감은 채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온유야, 걍 넌 말하지 마.”
“...”
백지수가 미소지었다.
“왜 그래 온유한테.”
송선우가 왼 눈만 뜨고 백지수를 쳐다봤다.
“너 아까만 해도 온유 발언권 같은 거 아예 없는 것처럼 묵살했으면서 갑자기 온유 말 존중해주는 척해?”
“너무 공격적이지 않아 지금 말투?”
“미안, 그냥 궁금해져서.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하고.”
“그런 거 없어 딱히.”
숨 막혔다. 뭐 때문에 이렇게들 화나 있는 건지. 잘못했다고 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집주인도 아니면서 제멋대로 선우를 들여보낸 걸 백지수한테 사과하면 백지수는 그걸 알면서 그랬냐고 열을 낼 것 같았고 송선우는 그게 뭐가 사과할 일이냐며 역정을 낼 것 같았다. 백지수를 편들어 준 걸 송선우한테 사과하면 송선우는 지수 편들어 줬다는 자각은 어떻게 하고는 있었네, 라는 식으로 비꼴 것 같았고 백지수는 그렇게 사과할 거면 왜 편들어줬냐고 물어올 것 같았다. 결국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송선우가 다시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나 귀나 계속 만져줘 온유야.”
“응...”
양손으로 귓바퀴를 엄지로 약간 누르듯이 만졌다. 귓불을 엄지랑 검지로 꾹꾹 눌러주기도 했다. 송선우가 간지러운 듯 목을 오른쪽으로 살짝 움츠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송선우가 미소지었다.
“하아... 이게 좋긴 좋네 진짜...”
“너도 신음 냈는데?”
“응. 인정할게. 미안해. 신음 낼 만 하네 이거.”
“...”
“근데 지수 넌 너무 노골적인 거 같애.”
“노골적이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약간 일부러 내는 느낌?”
“일부러 내는 거 아니거든.”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고. 아니면 미안해 지수야.”
“...”
“하... 근데 이 귀 만져주는 거는 지수가 하라고 시킨 거야 아님 온유가 해준다고 한 거야?”
“지수가 해달랬어.”
“뭘 그걸 고백하고 있냐 이온유?”
송선우가 웃었다.
“왜. 대답해줄 수도 있지.”
“너랑 내가 얘기하고 있는데 이온유가 끼어든 게 맘에 안 들어서.”
“으음... 그래?”
“어.”
속이 들끓었다. 토라도 하고 싶었다. 상황이 너무 거북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서비스할 예정이세요 이온유씨?”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수씨?”
송선우가 즐겁게 답했다. 백지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노숙이라도 하고 들어왔어야 했나. 들어온 게 후회됐다.
“아직 만족이 안 되셨어요 선우씨?”
백지수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이게 바닷물 같은 느낌이랄까? 받으면 받을수록 좀 더 받고 싶어지네요?”
“그럼 지금 멈추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으음... 좀만 더 고민해볼게.”
제발 고민을 멈춰줬으면 좋겠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했다. 송선우의 두 귀를 만지작거렸다. 백지수가 더는 버티기 힘든지 두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입을 열었다.
“지수야 피곤하면 잘래?”
백지수가 고개를 들고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 이러지? 당황스러웠다. 백지수가 오른손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잠깐만, 이라고 말한 다음 귀를 만지는 걸 잠시 멈추고 다가가서 몸을 기울여 왼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백지수가 얼굴을 가까이해왔다. 백지수의 입술이 왼 귀에 닿았다.
“조심해라.”
속삭임이 귀에 들어오자마자 목으로 소름이 타고 흘렀다. 백지수가 존나 야하다는 걸 고려했을 때 조심하라는 말은 섹스하지 않게 알아서 잘하라는 거일 터였다.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 했길래 고개를 끄덕여?”
고개를 돌렸다. 송선우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너 몰래 헤어드라이어로 머리 말려 달라 했어.”
송선우가 피식 웃고 나를 쳐다봤다.
“그럼 나도 머리 말려줘.”
“네...”
“이제 물기 털어주라.”
“알겠어...”
수건을 가져와서 송선우 머리의 물기를 털어줬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속이 더부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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