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월요일, 근데 이제 학교를 안 가는 (3)
* * *
보울에 물을 마지막으로 갈고 랩을 씌웠다. 혹시 몰라서 냉장고에 넣었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송선우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었다. 송선우가 나를 쳐다보고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뭐야 이거?”
“화이트보드.”
“아니 그니까 글 쓴 거 뭐냐고.”
“그냥 아침 점심 저녁 식사메뉴 뭐 먹고 싶은지 적으라고 해놓은 건데?”
“그래?”
송선우가 다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근데 아니잖아. 아침잠이 많다, 점심 잘 챙겨 먹어라, 저녁으로 갈비찜 해놔라.”
송선우가 고개를 내 쪽으로 획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송선우의 뺨을 쳤다가 그대로 흘러내렸다. 송선우가 미간을 찌푸려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둘이 신혼부부야?”
“왜 자꾸 신혼부부 프레임 씌우려 그래.”
“아니 존나 에바잖아. 알 거 다 아는 고2 남자 여자 둘이 동거하면서 꿀 떨어지게 막 서로 껴안고, 한 명은 위로하고 한 명은 위로받으면서 같이 자고, 밥 잘 챙겨 먹어라, 오늘 요리는 이거 해줘라 저거 해줘라, 이게 신혼부부 아니고 뭐야?”
“... 왜 이렇게 화나셨어요?”
“아니 나 화 안 났는데?”
“...”
누가 봐도 화난 모습이었다. 송선우가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둘이 사귀지?”
백지수가 주변에 얘기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우선은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일 거였다.
“아니?”
“지랄하네.”
“지랄이라니. 말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송선우가 오른손을 들어서 자기 입을 두 대 탁탁 쳤다.
“욕한 건 미안해. 근데 모르는 사람 붙잡아서 너랑 지수랑 하는 거 보여주고 둘이 사귀는 거 같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에 열 명이 다 사귀는 거라고 말할 수준이거든?”
“너는 내 사정 알잖아.”
“알아. 알아도 표면적으로 둘이 하는 게 너무 그렇다는 거잖아.”
“그럴 수도 있지, 안 사귀어도.”
“아니 나도 웬만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하겠는데 그냥 다 전반적으로 이게 좀 많이 그렇다니까?”
“... 그럼 내가 어떡해야 돼?”
“어?”
송선우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면서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냥... 지수 자취하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나가면 되지.”
“근데 내가 그게 안 되면?”
“왜 안 되는데?”
“내가 불안정해서, 혼자서는 못 견딜 거 같아서.”
“네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지수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당장 나도 있고, 다른 남자애들이나 선후배도 있고, 사람 많은데 지수한테만 붙어 있을 필요는 없지.”
“내가 그럴 수 있는 성격은 아니잖아.”
“여러 사람한테 부탁 못하겠음 차라리 나한테 와. 받아줄게.”
“지수랑 있는 거랑 너랑 있는 거랑 무슨 차인데?”
“다르지, 지수랑만 있는 거랑 지수한테 있다가 나랑 있는 거랑은.”
“... 근데 너희 집에 신세 계속 지면 너희 부모님이 무슨 사이냐고 물으실 거 아냐?”
“그치. 그니까 지금 너랑 지수랑 계속 있음 안 되는 거야, 계속 같이 사는 건 아무리 봐도 불건전해 보이니까.”
“너랑 있는 것도 불건전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내 부모님한테 깔끔하게 얘기 드리고 하면 되잖아. 네 사정 얘기하고 무슨 사이인지 정리하고. 근데 지수랑 너는 정리 안 된 상태에서 서로 너무 붙어 있고 하니까 안 되는 거지.”
“... 그니까 네 얘기는 내가 계속 이렇게 지수랑 같이 있으면 사귀는 사이 될 거 같으니까 떨어지라는 거지?”
송선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뭐가 다른데 네가 한 소리랑?”
“아니 일단 내가 말한 게 네가 말한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인정할게. 근데 꼭 그런 쪽으로 얘기한 건 아니야. 그냥 내 말뜻은 처음에 내가 말했던 대로 젊은 남녀 둘이 동거하면서 너무 가깝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지. 남들이 보기에도 안 좋고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거 같으니까. 근데 나랑 있으면 남들이 안 좋은 소리할 때 내 부모님이 커버쳐줄 수 있고 무슨 일이 생길 리도 없으니까 나한테 오라는 거고.”
“근데 부모님 계셔도 무슨 일이 안 생기리라는 확신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그래, 그것도 인정할게. 근데 감시해주시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남자랑 여자 둘이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지는 거 아냐? 그 확률 때문에 너희 둘이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거고.”
송선우가 오른손 검지로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이런 거 하나 드러난다거나 말실수 하나 잘못해서 둘이 꽁냥거린 일화 얘기하거나 해서.”
“그건 그냥 지수랑 내가 실수를 안 하면 되잖아.”
“... 넌 그럼 지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좋아?”
“난 그냥 너랑 있으면 네 부모님 때문에 눈치 보일 거 같아서 그러는 거지.”
“우리 부모님이 눈치 주는 성격은 아니야. 사정 들으면 측은해 하실 거고, 또 네가 그런 시선 불편해하면 그것도 배려해서 대해 주실 거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네가 지수랑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나랑 있는 게 남들이 보기에 더 나아 보일 거고 특별히 무슨 일 생길 확률도 적을 거라는 건데, 이게 이해하기 힘들어?”
“안 좋아 보인다는 잣대로 평가하면 지수랑 죽 같이 있었다가 너한테로 가서 죽 같이 있는 것도 별로잖아. 여자 막 갈아타는 쓰레기로 보일 건데.”
송선우가 한숨 쉬었다.
“난 진짜 말로는 너 못 이기겠다.”
송선우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꺼내 뚜껑을 열어 입을 안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도로 냉장고에 음료를 넣은 송선우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 여태 그런 거처럼 계속 지수랑 있고 싶은 거지?”
송선우를 마주 보다가 할 말을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여전히 쳐다보는 송선우랑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나도 이렇게 지수랑 있으면 안 좋은 거 알아. 만약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보일지도 알고 있어. 가능하면 나도 지수한테 신세 안 지고 나가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돼. 나 진짜 누구한테 의지 안 하면 못 버틸 거 같아서, 지수한테 미안한 마음 들어도 계속 이러고 있는 거야.”
송선우에게 기만적인 고백을 하면서 속이 후련한 동시에 무거워졌다. 마음 깊숙이 있던 것을 처음으로 꺼내서 털어놓아서 후련했고 백지수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이해해, 너 힘든 거.”
송선우가 말하고 갑자기 두 팔을 벌려왔다.
“... 뭐 해?”
“안아주려고. 지수처럼.”
헛웃음이 나왔다.
“빨리 와. 너 안 오면 나 안 나갈 거야.”
“오히려 좋은데? 안 나가는 거면.”
“안 오면 너 때림.”
“에반데.”
다가가서 얼굴을 송선우의 가슴에 대고 그대로 안겼다. 송선우가 두 팔을 내 어깨에 올려서 두 손을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얼굴에 닿아오는 가슴의 느낌이 부드러운 것과 정반대로 어깨랑 머리에 맞닿은 팔의 느낌이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가슴에 얼굴 묻으라고는 안 했는데?”
“백지수처럼 안아준다면서.”
“미친... 지수가 이렇게 안아준다고?”
“응.”
“이건 개 에반데 진짜...? 지수랑 안 사귀는 거 맞아?”
“말했잖아.”
“미쳤네 지수...”
송선우가 왼손 검지로 내 정수리를 쿡쿡 눌렀다.
“그만 얼굴 떼라고?”
“아니. 지수보다 네가 더 미친 거 같아서 괴롭히는 건데.”
“아파.”
“아프라고 치는 거지.”
그러면서 송선우가 왼손으로 내 정수리를 쓰다듬고 내 머리를 붙잡아서 호호 불어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응. 이제 그만 안기자 우리 온유 어린이.”
“네.”
얼굴을 떼고 송선우를 바라봤다.
“근데 나 오늘 어린이집 가서 봉사활동해.”
“진짜?”
“응.”
“어린애가 어린애를 돌본다라... 이거 귀하네요.”
피식 웃었다. 송선우도 마주 미소짓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따라가서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갔다. 문을 잠그고 대문을 나와 바로 닫았다. 송선우가 나랑 나란히 걸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 근처 산책길에 벚나무들 엄청 있더라?”
“응. 그니까 내가 멀리 안 나간다 했잖아.”
“지수 자취방 진짜 되게 좋은 데로 구했네. 있을 거 다 있고 개꿀 산책길도 있고.”
“왤케 아재처럼 말해?”
“이게 내 매력임.”
헛웃음이 나왔다. 송선우도 마주 웃었다. 가만히 송선우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근데 요즘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그래서 엄마랑 아빠한테 엄청 구박받고 있어. 세상에 어떤 고등학생이 학교를 삼 주나 땡땡이치냐고.”
웃음이 나왔다.
“왜 웃냐?”
“맞는 말이긴 하잖아.”
“그래도 네가 때려서 상처 생긴 건데 웃어도 돼?”
“미안.”
“내가 한 번만 봐준다.”
“네.”
송선우가 말없이 나를 마냥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살짝 띠껍지?”
“고의는 맞았습니다.”
“뭐?”
송선우가 입꼬리랑 함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었다.
“한 대만 맞자.”
살짝 뛰어서 앞지르고 거리를 약간 벌린 다음 뒤돌아봤다. 송선우가 두 손을 주먹 쥐고 가슴 앞에 둔 채 사뿐하게 스텝을 밟아 다가오고 있었다.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뒷걸음질 쳤다.
“죄송해요.”
“일로 오세요.”
송선우가 코앞에 왔다. 맞기 싫었다.
“잘못했어요.”
“그럼 애초부터 맞을 짓을 하지 마세요.”
“알겠어. 진짜 잘할게.”
송선우가 씨익 웃고 두 손을 내렸다. 뒤돌아 앞을 보면서 송선우랑 나란히 걸었다.
“내일 태도 달라지는지 확인 똑바로 할 거야.”
“내일?”
“내가 내일도 벚꽃 보자 했잖아.”
“진심이었어?”
“그럼 농담으로 말했게?”
“개 에반데 진짜.”
“암튼 그런 줄로 아세요.”
“근데...”
“반론 안 받음.”
헛웃음을 터뜨렸다. 송선우가 나를 바라보며 히히 웃었다. 송선우가 아까 말로는 날 못 이기겠다고 했는데 나야말로 송선우가 이런 식으로 애처럼 굴 때 송선우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송선우의 이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도리어 어릴 적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서 좋기도 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한 산책로에 이르렀다. 송선우가 발길을 멈추고 고개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나도 고개를 들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거리의 연인들이 눈을 감으며 꺅, 하고 소리 질렀다. 가지가 흔들리고 연약한 벚꽃잎이 떨어졌다. 내 왼 볼에 벚꽃잎 하나가 안착하고 곧바로 송선우의 오른 볼에 벚꽃잎 하나가 안착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내려 서로를 바라봤다. 서로의 얼굴에 내려온 벚꽃잎이 볼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바탕 장난치고 엉망이 된 모습을 한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처럼 송선우랑 나는 배시시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