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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150화 (150/438)

〈 150화 〉 월요일, 근데 이제 학교를 안 가는 (1)

* * *

햇살이 눈두덩이를 두드렸다. 눈을 찌푸려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차단하고 왼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혹시라도 잿더미가 있는지 확인했다. 없는 것 같았다. 창문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머리가 아팠다. 제정신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술을 부어댄 탓이었다. 오른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막 뜨겁지는 않았다. 느리게 눈을 떴다. 백지수는 안 보였다. 밝은 것을 보면 낮인 듯했다. 오른손을 등 뒤로 하고 침대 위를 더듬거려서 폰을 잡고 눈앞으로 가져와서 켰다. 아홉 시 이십칠 분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늦잠을 잔 건 아니었다. 평소 생활 패턴을 생각한다면 오래 늦잠을 잔 것도 맞기는 했다. 일단 폰을 쥔 채로 침대에서 내려와 1층으로 내려가서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부터 했다. 백지수 방 화장실을 써도 됐을 건데, 너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소한 행동마저 습관이 생길 정도라니, 백지수의 별장을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주방 쪽으로 갔다. 화이트보드에 글씨가 아기자기하게 쓰여 있었다.

[아침: 잠이 많으시네요?]

[점심: 잘 챙겨 드시고요.]

[저녁: 으로 갈비찜 해놓으세요.]

웃음이 나왔다. 화이트보드 앞에 와서 잠깐 고민하다가 열심히 끼적였을 것을 상상하니 백지수가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다가가서 바로 볼에 입 맞췄을 게 분명했다.

백지수는 아침을 먹고 나갔을까?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잘 먹지 않는 것 같았는데. 조금 걱정됐다. 문자를 보낼까 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문자 내역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끝장날 것 같아서 참았다. 아침 먹고 나갔어, 같은 문자를 주고받는 건 신혼부부나 할 법한 짓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꺼내 뚜껑을 따고 입을 안 댄 채 병째로 마셨다. 다시 안에 넣고 냉장고를 닫은 다음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백지수랑 내가 동거하는 모양새가 신혼부부나 다름없는 것 같기는 했다. 마주보기만 하면 서로 눈에 꿀을 떨어뜨리면서 입술을 포개고 혀를 섞어대는 데다가 이유 없이 미소짓고 머리도 감겨주고 함께 요리도 하면서 침대를 같이 쓰기까지 했으니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잿더미가 아기 같은 역할도 해줬고. 섹스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십중팔구 신혼부부 생활이라고 말할 거였다. 어머니를 보고 왔으면서 바로 백지수를 찾아와 키스하고 사랑한다 말하고 하소연하고 품에 안겨 잠드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마음이 무거웠다. 백지수가 나랑 맺는 관계는 건전하다고 할지 몰라도 내가 백지수랑 맺는 관계는 불건전했다. 나는 백지수는 물론이고 김세은이랑 어머니를 기만하고 있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 앞에 무릎 꿇었다. 처음엔 헛구역질만 하다가 이내 내용물 없이 신물만 나왔다. 어제 가슴이 아팠던 이유를 알 듯했다. 그건 무의식이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몸으로 보낸 신호였다.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난 왜 이렇게 살까. 김세은에게 백지수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몸을 일으키고 변기 물을 내린 다음 세수했다. 손을 모아 오래도록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수도를 잠그고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로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고 나와 헤어드라이어를 켜 머리를 말렸다. 배가 꼬르륵거렸다. 마저 말리고 주방으로 갔다.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냄비에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다음 불을 켜 끓이고 즉석밥 뚜껑을 살짝 열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 30초만 돌려서 꺼냈다. 이온 음료를 컵에 따르고 수저랑 냄비, 즉석밥을 테이블 위에 올려 세팅했다. 즉석밥 뚜껑을 아예 뜯어내고 숟가락으로 밥을 한쪽으로 쌓아 옮겨 1/3 정도 공간을 만들어줬다. 국자를 가져와 의자에 앉아 김치찌개를 퍼서 빈 곳에 담았다. 젓가락으로 삼겹살 한 점이랑 긴 김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 역시 김치찌개는 이튿날부터가 진국이었다. 넷챠를 켜 정신 나간 미국 성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김치찌개를 다 먹어치우고 바로 설거지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멍했다. 뭔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요즘 자주 이랬다. 곁에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없으면 자꾸만 이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어머니랑 함께 집에 있었던 중학생 때엔 이런 느낌이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우울했다. 왜 이렇게 텅 빈 느낌이 들까. 마음이 가난해서 조급하게 그 이유를 규명하려 궁리했다.

내가 존재해도 좋을 장소가 아예 없는 듯해서, 그래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였다. 집은 갈 수 없었고 어머니의 옆에 서서 위로해줄 수도 없었고 백지수의 별장에 계속 신세를 져서도 안 됐다. 있어도 될 곳은 김세은의 옆이었지만 정말 김세은을 아낀다면 김세은의 옆에 서서는 안 됐다. 가혹할 정도로 지독한 운명이었다. 이에 홀로 꿋꿋이 버텨내기에는 내가 너무 나약했다. 눈을 감고 오른팔로 눈 위를 가렸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시간이 몇 년 뒤로 훌쩍 지나버려서 김세은이랑 함께할 수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오른손을 더듬어 폰을 잡고 켜봤다. 송선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이온유씨]

[하는 거 없죠]

[길가 곳곳에 벚꽃이 만개하였는데 나와 거리를 거닐며 대화나 나눕시다]

헛웃음이 나왔다. 답장했다.

[말투 무엇?]

[솔직히 좀 웃겼지]

[약간 웃겼어]

[뭐래]

[ㅈㄴ 웃었으면서]

반박할까 하다가 그냥 쓰던 문자를 지웠다. 송선우가 이어서 문자를 보내왔다.

[언제 볼래?]

[아니 걍 지금 보자]

[점심 먹었지?]

점심 먹을 시간도 아닌데 무슨.

[아니 왜 이리 막무가내세요]

[너 별장에 있지]

[내가 감]

[제게도 의견이란 게 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내보세요]

[가기 싫어요]

[아니 내가 가준다니까?]

[거 너무 한 거 아니오?]

[소녀가 벚꽃 좀 보고 싶다는데 그 마음을 짓밟다니]

[사내로서 해서는 안 될 짓 아니오?]

헛웃음이 나왔다.

[알겠어]

[와]

[근데 막 멀리는 안 나갈 거야]

[ㅇㅋ 너 딱 기다려]

[옷 흰검으로 입어놔라]

[네]

또 사진 수집하는 건가? 진상 퇴치로는 저번에 놀이공원에 가서 찍은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그냥 놀고 싶은데 기왕 나를 만나는 거 겸사겸사하려는 듯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으로 갈비찜을 해달라 했으니 일단 피부터 빼야 했다. 냉장고에서 소갈비를 꺼내 보울에 담고 물을 채웠다. 대충 두 시간 정도는 물을 갈아주면서 피를 빼야 하는데 당장 송선우가 와 버리면 곤란해질 거였다. 폰을 켜서 문자를 확인했다. 송선우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부모님이 창고 정리 좀 도와달래서 나 12시는 돼야 도착할 듯]

[아니다]

[백퍼 밥 먹고 가라 해서 1시는 돼야 될 듯]

[옷 바로 안 입고 있어도 돼]

[(옷 벗고 있어도 된다는 뜻)]

[근데 너 지수 없을 때 안에서 벗고 있어?]

어이없었다.

[의식의 흐름 에반데]

[걍 궁금해서. 남자들은 혼자 있음 팬티만 입고 그런다고 들어 가지고.]

[난 안 그래]

[ㅇㅋ 믿어줌]

[진짜 옷 입고 살아요]

[믿어준다니까. 누가 뭐래?]

[그래 네가 이겼다]

[ㅋㅋㅋㅋㅌㅌㅋ]

[ㄱㅅ]

헛웃음이 나왔다. 폰에서 시선을 거두고 보울을 봤다. 물이 더러운 게 피가 많이 빠진 듯했다. 왼손으로 보울을 들어 싱크대 앞에 가고 오른손으로 고기가 안 빠져나가게 막아서 물을 버린 다음 다시 물을 받았다.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송선우가 새로 문자를 보낸 건 없었다. 아마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오른팔을 대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오늘 할 일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소갈비의 피를 빼고 송선우랑 나가서 조금 걸은 다음 돌아와서 갈비찜을 만들고 다섯 시부터 하는 어린이집 봉사활동을 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백지수한테 내가 봉사활동을 신청했다는 말을 안 했다. 저녁도 같이 못 먹는데, 괜히 미안해졌다. 백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다섯 시부터 어린이집에서 봉사활동해]

[월요일 화요일은 세 시간 있고 수요일은 네 시간 있어야 해서 월화는 여덟 시에 끝나고 수요일은 아홉 시에 끝나]

[저녁 같이 못 먹어줘서 미안해]

폰을 내려놓고 보울의 물을 다시 갈아줬다. 의자에 도로 앉았다. 백지수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시간을 봤는데 딱 쉬는 시간이었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미쳤냐?]

[라고 할 뻔]

[내가 진짜 딱 한 번만 봐준다]

[감사합니다]

[조심해]

[알겠어요]

폰을 끄고 팬티만 챙겨서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밖에 나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다음 검은 바지랑 흰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이대로면 조금 추울지도 모르니 에코백을 메거나 해서 흰 폴로 셔츠를 챙기면 될 듯했다. 주방으로 돌아가 보울의 물을 갈아주고 의자에 앉았다. 이제 다시 또 기다려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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