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일요일 (9)
* * *
헤어드라이어를 껐다. 백지수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가까이해서 입술을 포갰다. 백지수가 눈웃음 짓고 두 손을 뒤로해서 내 목덜미를 잡았다.
“하움... 츄읍... 쯉... 나, 츄릅... 키스하려 한 거 아닌데. 하웁... 쮸읍...”
“그럼?”
“말할 거, 츕... 있어서. 헤웁...”
“뭔데?”
“아홉 시 되면, 츄읍... 잿더미 올 건데 문 열어 주라고. 쮸읍...”
“넌 뭐 하고?”
“츕... 나 잠깐 할 거 있어서, 쮸읍... 하움... 내 방 가 있게. 쯉... 츄읍...”
“으응...”
“헤웁... 츄읍... 걍 나 들고 가줘.”
“알겠어.”
가볍게 다섯 번 더 입 맞추고 백지수가 몸을 옆으로 돌려 무릎을 세워 다리를 삼각으로 만들었다. 오른팔을 무릎 뒤로 넣고 왼팔로 등을 받쳤다. 백지수가 히히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조심히 일어나 천천히 걸어서 계단을 밟았다. 백지수가 나를 꽉 껴안아오면서 내 왼 볼에 입을 맞췄다.
“온유야.”
“응.”
“사랑해.”
피식 웃었다.
“나도 사랑해.”
백지수 방에서 몸을 낮춰 백지수의 두 발이 땅에 닿게 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려가 봐. 잿더미 왔을 수도 있으니까.”
“응.”
“선반에 캔이랑 사료 있으니까 밥그릇에다 같이 줘.”
“알겠어.”
가볍게 뛰어서 1층으로 내려가 현관 가까이에 가봤다. 과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냐아, 거리는 소리가 앙칼진 게 배고픈 듯했다. 문을 열었다. 곧바로 잿더미가 머리를 들이밀어서 안으로 도도도 뛰어 들어왔다. 문을 닫고 뒤돌아 천천히 걸었다. 거실 바닥에 앞발을 세우고 앉은 잿더미가 나를 쳐다보면서 냐아, 냐아, 하고 울어댔다.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재촉하지 마.”
참치캔이 있는 선반을 열어봤다. 참치캔 박스 옆에 1kg짜리 사료 하나랑 고양이 발자국이 그려진 밥그릇이 두 개 있었다. 밥그릇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사료를 두 줌 뿌려줬다. 잿더미가 바로 머리를 박아 으적으적 먹었다. 급하게 먹는 건지 원래 고양이들이 사료를 먹을 때 그렇게 되는 건지 잿더미의 입가에서 이빨에 잘린 사료 부스러기가 조금씩 나왔다. 캔을 땄다. 소리를 들었는지 잿더미가 밥그릇에서 머리를 뺐다. 사료 위에다가 참치를 떨어뜨려 줄 걸 아는 건가? 똑똑한 게 괜히 기특했다. 그릇 위에 참치캔을 뒤집고 흔들어서 떨궜다. 오른손을 올리자마자 잿더미가 그릇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분명 욕심에 가득 찬 모습인데 사랑스러웠다.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귀여웠을까? 그러기는 아마 어려울 것 같았다. 존재 자체가 사랑스럽거나 꽁깍지가 아주 단단히 씌어야 할 거였다. 다른 밥그릇도 꺼내서 정수기 물을 반절 정도까지 받아서 바닥에 내려 놓아줬다. 목말랐는지 잿더미가 사료를 먹다 말고 물그릇에 머리를 박아 혀를 날름댔다. 작은 분홍색 혀가 빼꼼 빼꼼 나오는 게 귀여웠다.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 위에 두 팔을 얹고 턱을 올렸다. 나도 모르는 새 입꼬리가 올라간 게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이렇게 마냥 흐뭇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갑자기 스스로가 우스워져서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도 안 했으면서 뭐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건지. 폰을 꺼내봤다. 백지수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잿더미 왔어?]
[응. 사료랑 참치 줬어.]
[잘했어]
[잿더미 밥 다 먹으면 안고 내 방으로 와]
[알겠어]
금방 먹어서 그릇 바닥이 보였다. 잿더미가 혀를 날름댈 때마다 사료가 둥근 측면부를 타고 밀려났다. 잿더미는 고개를 옆으로 하고 혀를 내빼서 얼마 안 남은 사료를 하나하나 입에 넣었다. 밥그릇을 깔끔히 한 잿더미가 물그릇으로 머리를 옮겨 챱챱 하고 마셔댔다. 잿더미가 꼬리를 살랑이면서 소파 쪽으로 가 몸을 낮추고 엉덩이를 실룩인 다음 소파 위로 튀어 올랐다. 어떻게 모든 행동이 다 귀여울까. 달려가서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전에 물그릇의 물부터 버리고 밥그릇이랑 같이 씻어준 다음 참치캔을 버려서 뒷정리했다. 소파 위에서 눈 감고 몸을 말아 자기 왼 허벅지 위에 턱을 올려서 골골대고 있는 잿더미의 밑으로 조심히 두 손을 집어넣어서 들어 올렸다. 눈을 크게 뜬 잿더미가 고개를 두리번대다가 나를 쳐다봤다. 잿더미가 냐아, 하고 울었다. 웃음이 나왔다.
“지수가 너 여기서 자지 말래.”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잿더미가 냐아, 하고 울었다. 몸을 막 비틀거나 발버둥을 치지는 않는 걸 보면 아마 알아들은 듯했다. 밑을 보면서 조심히 2층으로 올라가 백지수 방으로 갔다. 검은 반팔 티에 검은 돌핀팬츠 차림으로 갈아입은 백지수는 침대 왼편에 누워서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지수가 나를 보고 오른손을 등 뒤로 해서 침대를 팡팡 치면서 입을 열었다.
“잿더미 여기 가운데에 넣고 너도 누워.”
“알겠어.”
백지수 옆으로 잿더미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잿더미가 편히 일자로 누웠다. 옆으로 누워 배게 위에 오른팔을 접어서 머리를 기댄 백지수가 왼손으로 잿더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도 옆으로 누워서 잿더미를 사이에 두고 백지수의 옆구리를 안았다. 백지수가 잿더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피식 웃었다.
“왜 나를 안아?”
“잿더미는 네가 독점하고 있잖아요.”
“잿더미 엉덩이 토닥토닥하든가.”
저번에 백지수의 엉덩이를 토닥토닥한 기억이 떠올랐다. 발기했다. 백지수는 일부러 이 말을 꺼냈을까? 고개를 살짝 들어 백지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소를 머금은 채 잿더미를 무심히 쓰다듬는 게 별생각 없어 보였다. 나한테 엉덩이를 토닥토닥해달라고 한 기억이 없거나 별 의도가 없던 모양이었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왜?”
“나 얘기하기로 했잖아.”
“아 그치.”
백지수가 눈을 마주쳐오면서 왼팔을 내게 뻗어 나를 마주 안았다. 잿더미가 우리 사이에서 골골거렸다. 웃음이 나왔다. 백지수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왜 웃어?”
“잿더미 때문에.”
“잿더미가 좀 귀엽긴 하지.”
“너보다 귀여운 거 같애.”
“여기선 보통 내가 더 귀엽다고 말해줘야 되는 거 아냐? 아님 나만큼 귀엽다거나?”
“너 귀엽다는 말 좋아했어?”
“어. 네가 그 말 할 때마다 심쿵했었어.”
“그럼 맨날 해줘야겠다.”
백지수가 피식 웃고 왼손을 올려서 내 오른 볼을 쓰다듬었다.
“원래부터 맨날 했잖아.”
“더 해줄게.”
“됐어. 오글거려.”
미소지었다. 이렇게 별 내용이 없어도 서로 마주 보고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갑자기 오른 가슴 한편이 뭉툭한 뭔가에 쑤시기라도 하는 듯 욱신거려왔다. 눈이 찡그려졌다. 백지수가 내 표정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모르겠어 나도.”
“어디 아파?”
“가슴 아파.”
백지수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장난하는 거 아니지?”
“응. 진짜 아파.”
“으응... 진통제 있는데 줄까?”
“아냐 좀 있음 괜찮을 거 같아.”
“... 너 지금 되게 미련해보이는 거 알지.”
“왜?”
“약도 있는데 굳이 끙끙 앓는 거잖아.”
“어차피 괜찮아질 거니까...”
“그게 미련하다는 거야.”
“...”
“진통제 가져올 테니까 그냥 먹어. 알겠지?”
“알겠어.”
백지수가 살폿 미소짓고 내 오른 볼에 입 맞춘 다음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오른 가슴이 쿡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 부딪힌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픈 느낌이 드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오른손으로 잿더미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왼손에 물을 따른 유리잔을 들고 오른손 중지랑 엄지에 약을 한 알 들고 있는 백지수가 문 앞에 나타나 내게 다가왔다. 몸을 일으켜서 양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왼손의 약을 털어놓고 바로 물을 마셨다. 미지근했다. 담아온 양의 절반 정도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미지근해.”
“배려해준 건데 불만?”
“아뇨. 고마워요.”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어. 물 다 마셨어?”
“좀만 더 마시고.”
“응.”
한 모금을 더 넘겼다. 백지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물잔을 건넸다. 백지수가 유리잔을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옆으로 누웠다. 나도 누워서 백지수를 마주 봤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잿더미의 등을 쓸어주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얘기해줘.”
“응.”
머릿속으로 할 말을 잠깐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딱 엄마 보러 걸어갔는데 외할아버지가 대문에서 담배 피우고 계셨어. 담배 끊으셨는데 왜 피우실까, 하고 의아했는데 딱 나 보시고 되게 당황하시는 거야. 연락도 안 하고 불쑥 찾아왔냐고, 엄마 너 온다고 하면 너 맞이할 준비 하니까 잠깐 어디 있다가 오라고 하시고. 낌새가 이상한데 안 들여보내 주실 거 같아서 알겠다고 하고 담 넘어서 안에 들어갔어. 엄마 방으로 갔는데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 눈 감고 계시고 외할머니는 그 옆에 의자 가져와서 앉아 가지고 엄마 간호하고 계셨어. 엄마는 다크서클 엄청 짙게 내려 있고 얼굴이 홀쭉해져서 광대랑 턱뼈 두드러져 있었어. 안색도 별로였고.”
“... 괜찮으실 거야.”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오른팔을 토닥였다. 오른 가슴이 욱신거렸다. 눈은 찌푸린 채 입만 억지로 살짝 미소짓고 입을 열었다.
“외할머니한테 병원 데려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는데 엄마가 병원 안 간다고, 자기는 아무도 못 고친다 말하면서 고집부린다고 하셨어.”
더 말을 해야 했는데 목이 멨다. 전조 없이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따스함을 남기면서 광대뼈와 콧대를 지나 베개로 흘렀다. 백지수가 내 팔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힘들면 얘기 그만해도 돼.”
“아냐. 괜찮아.”
“...”
“엄마랑 단둘이서 얘기하는데 엄마가 갑자기 새엄마랑 잘 지내냐고 물어왔어. 불길해져서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되물었는데, 학폭위 사전조사 때문에 전화해왔다고 답했어. 근데 윤가영이 그것까지만 했으면 몰랐는데 엄마한테 아빠 뺏어서 미안하다는 소리까지 했다는 거야.”
“존나 개 미친년이네 씨발.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니까. 그래서 원래는 엄마한테 학폭위 사실 감추려고 윤가영한테 부탁했었는데, 윤가영이 눈치 없이 엄마한테 전화해 가지고 더 앓으신 거 같애. 엄마가 내가 가해자로 학폭위 열린 것도 알아 버리고, 내가 윤가영이랑 친해졌다는 짐작도 하고, 아빠도 다시 상기해버리셨을 거니까.”
“... 좆 같다 진심.”
“근데 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애. 처음부터 윤가영 말고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부를걸. 엄마만 더 마음 고생시키고.”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흐르기를 반복했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오른 볼을 어루만졌다. 오른 가슴이 욱신거렸다.
“네 잘못 아니야.”
“...”
“네 잘못 아니니까 죄책감 갖지 마.”
“...”
“괜찮으실 거야. 걱정하지 마. 네가 마음 고생하면 어머니가 싫어하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진심도 아셨으니까 이제 몸도 나아지실 거야.”
“...”
백지수의 따스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은 녹는 듯한데 왜 오른 가슴 한편은 계속 쿡쿡 찔리듯 아픈 걸까. 한없이 차오르기만 하는 슬픔과 불합리한 고통 속에서 나는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다. 백지수가 왼손 엄지로 눈가를 스윽 닦아주었다. 미안한 마음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생겨나서 급속도로 커졌다. 내 마음이 나를 벗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백지수가 나를 끌어안았다. 잿더미가 사이에 있어서 와락 안기지는 못했지만 나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몸과 몸이 달라붙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해져 왔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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