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일요일 (6)
* * *
꿀 탄 우유를 마시고 고분고분 침대에 누웠다. 윤가영을 보면서 자고 싶으니 나가 달라고 했다. 윤가영이 계속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체감상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알겠다고, 필요하면 바로 전화해서 부르라고 하면서 내 방에서 나갔다. 폰을 켜봤다. 일곱 시 삼십사 분이었다. 오래도 잤다. 문자를 확인했다. 백지수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너 오늘 안 와?]
[보면 바로 답장해]
이대로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봤다. 윤가영이 왼손으로 방문을 잡고 얼굴만 내밀어 나를 보고 있었다. 윤가영이 헤헤 웃고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아뇨.”
“밥 먹어야 되잖아.”
“아뇨 괜찮아요.”
“아니 몸보신해야지! 환잔데!”
“환자 아니에요.”
“너 환자야.”
“어딜 봐서요.”
“쓰러졌잖아, 그럼 환자지.”
“...”
윤가영이 미소지었다.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기뻐하는 어린 애 같았다.
“먹을 거지?”
“... 조금만 줘요.”
“알겠어. 내가 여기에 갖다 줄까?”
“네.”
“응. 기다려.”
윤가영의 얼굴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검정 트위드 자켓을 걸치고 왼손에 종이봉투를 챙겨 들었다. 폰을 오른 주머니에 넣고 한 번 심호흡한 다음 오른손으로 문을 열고 달렸다. 현관에서 신발을 구겨 신고 밖에 나갔다. 대문을 열고 계속 뛰었다. 뒤돌아봤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백지수에게 문자 보냈다.
[나 받아주세요]
조금 먼 건물에다가 택시를 불렀다. 다시 뛰어서 그 건물로 가고 택시 뒷문을 열어 뒷좌석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숨이 찼다. 택시기사님이 나를 흘깃 봤다가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면을 주시했다. 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관성 탓에 등이 시트에 붙었다. 입을 열었다.
“저 창문 좀 열어도 돼요?”
“네, 네.”
창문을 열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풍경이 획획 바뀌었다. 두드드, 오른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꺼내봤다. 백지수였다. 연결하고 오른 귀에 가까이 댔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오는 거지?
“응.”
ㅡ지금?
“응. 지금 가고 있어.”
ㅡ언제 오는데?
“몰라. 금방 가.”
ㅡ으응... 어머니는 괜찮으셔?
안 괜찮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진화가 인간의 문명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마음은 아직 원시적이어서 말의 주술성을 믿고 있었다. 입을 열었다.
“가서 말할게.”
ㅡ응. 밥은 먹었어?
“아니.”
ㅡ배고프지.
“약간.”
ㅡ울었어?
어떻게 알았지.
“느껴져?”
ㅡ진짜 울었어?
“운 거 안 거 아냐?”
ㅡ그냥 떠본 거지. 그럼 밥 먹어야겠네?
“내가 울었는데 이야기가 왜 밥으로 가?”
ㅡ울었는데 기력 보충해야지.
윤가영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ㅡ비웃냐?
“아니. 그럴싸해서.”
ㅡ지금 개 비꼬는 거 같은데?
“아냐. 귀여워서 웃었어.”
ㅡ와. 이온유식 개지랄 또 나왔다.
웃음이 나왔다. 키스도 했는데 백지수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끊을게.”
ㅡ어. 빨리 와.
“알겠어.”
택시기사님이 백미러로 나를 흘깃 봤다. 모르는 척하고 그냥 폰을 봤다. 이수아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야]
[엄마가 너 어디갔냐는데?]
[ㅃㄹ]
[ㅃㄹ]
[ㅃㄹ]
[ㅃㄹㅃㄹ]
[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
[왜 답 안 하냐]
[5분 내 답장 안 할 시 전화 검]
시간을 확인해봤다. 전화가 걸리기까지 1분이 남아 있었다. 내가 먼저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한 번 가고 바로 연결됐다.
ㅡ어딨냐?
“밖.”
ㅡ그걸 누가 모르겠냐 병신아.
“밖이라고만 말한 거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말해주기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으세요?”
ㅡ말 존나 배배 꼬아서 하네 미친놈.
“입에 걸레 물었네 미친년.”
택시기사님이 백미러로 또 나를 흘깃 봤다. 모르는 척했다.
ㅡ끊는다.
“어.”
ㅡ근데 엄마가 끊지 말래.
그냥 내가 끊어버렸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수아였다. 받고 오른 귀 가까이에 댔다.
ㅡ씨발놈아.
씨발놈이라니, 하고 윤가영이 질책하는 목소리랑 함께 찰싹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ㅡ아 엄마! 얘가 먼저 끊었잖아!
얘라니, 하고 또 윤가영이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ㅡ아 알겠어 미안해 엄마.
온유한테 사과해, 라고 윤가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ㅡ죄송.
“어.”
죄송이 뭐야, 같은 말을 하는 걸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ㅡ그래서 어디서 자는데?
“친구네.”
ㅡ밥은?
“알아서 잘 챙겨 먹는다고 말해.”
ㅡ알아서 잘 챙겨 먹는데.
바꿔줘 봐, 라고 윤가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끊어야 하나, 하고 잠깐 고민하는 사이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온유야.
“네.”
ㅡ...
“할 말 없음 끊을게요.”
ㅡ아냐 아냐. 잠깐만.
두 번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ㅡ미안해 온유야.
여태 들어본 적 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울컥했다. 이럴 거면 왜 미안할 짓을 한 건지. 입을 열었다.
“네. 끊어요.”
ㅡ응.
전화가 끊겼다. 오른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풍경이 획획 바뀌었다가 익숙한 정경이 보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로 들어오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어느새 별장 앞에 도달해서 택시가 정차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왼손을 왼 주머니에 넣어 열쇠를 찾아 뒤적거리면서 택시가 떠나가는 것을 봤다. 열쇠를 오른손에 옮기고 뒤돌아 대문에 꽂아 열었다. 바로 대문을 닫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온유야?”
백지수가 외치는 소리였다. 주방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가? 미소지어졌다. 신발을 벗으면서 입을 열었다.
“응.”
“빨리 와 나 존나 배고파 진짜.”
“알겠어.”
주방으로 뛰어갔다.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백지수가 두 손으로 옆 의자를 잡고 뒤로 뺐다. 옆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김치찌개랑 밥, 달걀찜이 있었다. 배달을 시킨 게 분명했다. 백지수가 나를 뚱하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먹기 싫어?”
“아니. 고마워서.”
“그럼 그렇다고 바로 말하지 뭘 빤히 보고만 있다가 추궁하니까 고맙다, 이러세요 진짜 고마운지도 의심되게.”
웃음이 나왔다. 너무 귀여웠다. 입을 열었다.
“키스해도 돼?”
“... 일단 입 냄새 확인받아.”
입을 벌렸다. 백지수가 왼팔을 내 어깨 위로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너무 가까워서 백지수의 코가 내 입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백지수가 얼굴을 멀리했다. 입을 열었다.
“가능?”
“쌉가능.”
백지수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을 벌렸다. 입술이 포개졌다. 혀가 섞여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어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무슨 표정을 지으실까. 좋은 표정은 짓지 않으실 거였다. 아마 울상을 지으실 거였다. 이러면 안 될 거였다. 그런데 멈출 수 없었다. 백지수가 입술을 떼고 얼굴을 멀리했다.
“뭔 생각해?”
“어머니 생각.”
“으응...”
백지수가 일어나서 두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가슴에 얼굴이 묻혔다. 입을 열었다.
“뭐야 갑자기.”
“너 가슴 좋아하잖아.”
헛웃음이 나왔다.
“기분 풀렸어?”
“아뇨. 어이없어요.”
“기분 풀린 거 다 티 나죠.”
“말투 왤케 개 초딩이야.”
“이온유 벌써 기분 좋아졌죠.”
웃음이 나왔다.
“반박 하나도 못 하죠.”
“아니 네가 웃기잖아.”
백지수가 안은 걸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소가 걸린 얼굴이 아름다웠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어때 좀 나아졌어?”
“응.”
“더 나아지게 해줄게.”
백지수가 다시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해왔다. 입술이 포개졌다.
“하움... 헤웁... 쮸읍... 츄릅... 쮸읍... 츕...”
백지수는 계속 눈을 뜬 채로 내 얼굴을 살폈다. 눈웃음을 지어 살짝 게슴츠레 뜬 눈이 예뻤다.
“하움... 야. 츄읍... 쮸읍...”
“응?”
“츄릅... 헤웁... 그냥. 쮸읍... 츕...”
“뭐야 싱겁게.”
“하웁... 츄읍... 쯉... 츄릅...”
백지수가 입술을 떼고 내 왼 귀에 입술을 댔다.
“사랑해.”
목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음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왼 귓불이 깨물렸다. 발기했다. 백지수가 다시 입술을 포개왔다. 다시 혀를 섞었다.
“헤웁... 쮸읍... 츕... 츄릅... 하움...”
백지수는 내 마음을 모두 읽는 걸까? 불안한 것부터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린 것까지 다 들켜버렸다. 민감한 성격인 건 알았지만 이건 나를 발가벗기는 수준이었다.
“하움... 츄읍... 쮸읍...”
사랑한다고 마주 말해야 할까? 백지수를 생각하면 그리 말하는 게 옳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리 말해서는 안 됐다. 복잡했다. 지독히도 꼬여 있었다. 개인적인 욕심은 백지수를 잃기 싫다는 쪽으로 들었다. 뭐가 더 옳은 걸까. 알 수 없었다.
“츄읍... 헤웁... 또 생각. 츄릅... 쮸읍... 생각 좀. 쯉... 그만해. 하움...”
확신이 들었다. 백지수를 잃을 수 없었다.
“쮸읍... 츄읍...”
“사랑해.”
백지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웃음이 짙어졌다. 너무 예뻤다.
“츄릅... 나도. 하움... 쮸읍...”
눈을 감았다. 혀가 감겨왔다. 선택이 후회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