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일요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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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브라가 비치는 흰 반팔 티셔츠에 밑쪽 엉덩이가 다 보이는 짧은 청반바지 차림인 윤가영은 문을 등지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 폰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서 마주 보게 해야 했는데.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벙어리라도 된 느낌이었다. 분노랑 원망이 가득한 말 대신 슬픔만 목전으로 차올랐다. 할 말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면 무슨 해답이 생기기라도 할 것처럼 묵묵히 걸었다. 윤가영이 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폰을 꺼서 침대에 내려놓고 몸을 뒤척여 나를 쳐다봤다. 윤가영의 눈이 크게 뜨이고 바로 입이 열렸다.
“온유야? 언제 왔어?”
뭐라도 추궁해야 했다. 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냐고, 아버지를 뺏어간 것도 모자라서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해야만 했냐고 꾸짖어야 했다. 하지만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목이 멨다. 윤가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을 침대 위에 두고 나를 올려봤다. 눈빛은 아무리 봐도 순수한 의문만 읽힐 뿐 의뭉스럽지 않았다. 그게 더 나를 미치게 했다. 악의 없이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양손으로 윤가영의 멱살을 쥐었다. 손아귀로 윤가영의 반팔 티셔츠가 말렸다. 윤가영의 눈에 두려움이 한 방울 섞였다. 윤가영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온유야...?”
가슴이 타들어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 꿇었다. 더는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두 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창피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팔에 얼굴을 숨겼다. 왼 어깨에 윤가영의 오른손이 얹혔다.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어떡할 거예요...”
“어머니가 왜...? 무슨 일 있으셔...?”
울음이 말문을 막았다. 어머니의 초췌한 몰골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파리한 얼굴에 짙게 내린 다크 서클부터 앙상한 발목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떠올랐다. 옷이 가리지 않는 사이사이로 드러난 어머니의 몸에는 알 수 없는 거뭇한 자국이 여럿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휘청이면서도 외할머니의 부축을 한사코 거절해서 혼자 걸었기에 아마 그 자국들은 여기저기 부딪혀서 생겼을 거였다.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금방 사라졌을 만한 것들이 몸의 회복력이 급감한 탓에 없어지지 않고 쌓이기만 해서 그랬을 거였는데 나로서는 왠지 그 자국들이 어머니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 나타난 것으로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상처들이 생겼을까.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상처들이 도통 아물지를 않고 남아 있기만 할까. 어쩌면 어머니는 아직 아버지를 바랄지도 몰랐다. 윤가영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생기셨는데...?”
어머니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다면 어머니가 정말 죽기라도 할 것 같았다. 결국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멱살 쥔 손에 더 세게 힘을 줬다. 윤가영은 왜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앗아갔을까. 윤가영은 왜 하필이면 악랄한 인물도 아니어서 복수할 마음도 누그러뜨리는 걸까. 윤가영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어머니가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윤가영이 차라리 둘도 없을 악녀였다면 독하게 복수했을 텐데. 하나 모든 가정은 단 하나의 현실 속에 사는 어머니와 나에게 무용했다.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 나는 무력했다. 답답했다. 괴로웠다.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은 내가 어머니를 보듬을 수 없다는 거였다.
“온유야...”
손목과 팔에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머리에도 부들부들한 느낌이 들었다. 윤가영이 몸을 기울여 볼을 내 머리에 얹으면서 내 두 팔에 가슴이 맞닿도록 꽉 껴안은 거였다. 윤가영의 두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너무나도 듣기 편한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실 거야... 괜찮으실 거니까...”
우스웠다. 복수한답시고 윤가영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있는 내 꼴도 우스웠고, 어머니에게 상처를 준 장본인이 나한테 어머니가 괜찮을 거라고 말해오는 것도 우스웠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떨림을 참아내고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엄마한테 전화 걸어서 아빠 뺏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엄마 당신한테 아빠 뺏겨서 힘들어하는데, 왜 굳이 전화 걸어서 그런 소리를 해요...?”
참아내려고 했는데 자꾸만 목소리가 떨리고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파하는데에... 왜 그런 소리를 해서 더 피 말리게 하냐고요... 왜 확인사살까지 하냐고요 왜애...”
“... 미안해...”
“그렇게까지 할 거 없었잖아요... 나랑 친해졌다는 티까지 낼 필욘 없었잖아요... 엄마한테서 다 뺏어갔으면 뺏어간 거지 왜 그걸 엄마한테 자랑해서 엄마 더 힘들게 하냐고요...”
“...”
“대답 좀 해봐요...”
“미안해...”
“...”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멱살 쥔 손을 놓았다. 두 팔을 늘어뜨렸다. 윤가영이 나를 더 세게 안아왔다. 숨이 막혀왔다. 호흡이 곤란했다. 어지러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시야가 아득해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불안했다. 윤가영이 몸을 떼고 두 손으로 내 팔뚝을 잡은 다음 약하게 흔들었다.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유야 괜찮아...? 온유야...?”
윤가영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졌다. 몸이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억지로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오는 천장이랑 선반이 익숙했다. 내 방이었다. 머리를 감싸오는 것도 내 베개였다.
“온유야 일어났어?”
윤가영의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컴퓨터 앞에 있던 의자를 내 침대 왼편에 끌어온 건지 윤가영이 내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에는 물에 적신 수건을 소중한 듯 쥐고 있었다. 오른손을 내 이마에 가져갔다. 몰랐는데 내 이마에도 물에 적신 수건이 있었다. 윤가영이 입을 열었다.
“우유 데워서 꿀 타 가지고 올게. 잠깐만 있어.”
“...”
윤가영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마에 있는 수건을 왼손으로 잡고 일어나 윤가영이 앉은 의자의 왼 팔걸이에다가 걸어뒀다. 선반을 뒤져 언젠가 마셨던 버번 위스키를 꺼냈다.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취할 수는 있을 듯했다.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면서 침대로 돌아가 오른편에 걸터앉아서 병 주둥이를 물고 목을 젖혔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유야?”
뒤에서 윤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벌컥벌컥 마셨다. 윤가영의 두 손이 내 오른 손목을 잡고 끌어 내리려 했다. 숨을 쉬어야 해서 손을 내렸다. 왼손등으로 입을 스윽 닦았다. 시선을 올려 윤가영을 쳐다봤다. 윤가영이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가영이 오른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술 나 줘.”
“왜요.”
“너 고등학생이잖아.”
“고등학생 때 술 안 마셔 봤어요?”
“어.”
피식 웃었다. 별로 웃기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술병을 다시 들어올렸다. 윤가영이 두 손으로 술병을 잡고 눈을 찡그려 가며 뺏어가려고 했다. 술병을 한 손으로만 잡고 뺏기지 않기는 어려워서 힘겨루기라고 할 것도 없이 술병이 손아귀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냥 오른손을 갑자기 놓았다. 윤가영이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고 뒤로 넘어져 엉덩이를 찧었다.
“아!”
윤가영이 술병을 왼쪽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엉덩이 옆을 쓸었다. 그런다고 아픈 게 가실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괜히 귀여워 보였다. 그렇게 느끼는 내가 싫었다. 윤가영이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꿀 탄 우유 의자 위에 올려놨거든...? 그거 마실래?”
“안 마신다고 하면 안 마셔도 되는 거예요?”
윤가영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마셔! 안 마시면 안 돼! 알겠지?”
윤가영이 말하고 나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도통 미워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윤가영이 일어나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의자 쪽으로 갔다.
“그냥 내가 갖다 줄게.”
“...”
윤가영이 우유가 담긴 유리컵을 양손으로 소중히 들고 내 눈앞에 나타났다. 손잡이 부분이 내 쪽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가슴 쪽 가까이로 가져갔다. 윤가영이 계속 서 있었다.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있게요?”
“응. 다 마실 때까지 있을 거야.”
“왜요. 내가 안 마실 거 같아요?”
“그냥 너 다 마시면 내가 컵 가져가게. 넌 가만히 누워만 있어.”
“...”
컵을 입에 대고 한 번도 안 끊고 다 마셨다. 윤가영이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잔을 든 오른손을 내밀었다. 윤가영이 양손으로 잔을 받고 입을 열었다.
“또 줄까? 우유 남았는데.”
“됐어요.”
“으응...”
윤가영이 뒤돌아 몸을 굽혀서 왼손에 술병을 들고 걸어갔다. 입을 열었다.
“술은 왜 가져가요.”
“너 고등학생이잖아.”
일어났다. 윤가영이 뛰는지 다다다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서 양손으로 윤가영의 팔뚝을 잡았다. 윤가영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히히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볼이 예뻤다. 입을 열었다.
“웃지 마요.”
“응? 왜?”
“그냥 웃지 마요.”
“히. 싫은데?”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윤가영은 남자를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 윤가영이 입을 열었다.
“나 고개 아파.”
“앞에 봐요 그럼.”
“네가 안 놔주잖아.”
“...”
두 손을 놓았다. 윤가영이 미소지었다.
“고마워.”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면서 걸어갔다. 짧은 청반바지 밑으로 실룩이는 엉덩이를 보는데 돌연 현기증이 났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 왼편에 걸터앉았다. 분명 윤가영이 미워야 하는데 밉지 않았다. 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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