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나 진짜 좀 억울해 (2)
* * *
왼손 엄지랑 중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힘들었다. 입을 열었다.
“아 나 지금 좀 어지러운데.”
“그러게 누가 가슴 보래?”
얼굴이 발그레 한 백지수가 온더락 잔에 콜라를 따르면서 말했다.
“아 나 안 봤다고...”
“뭐래 시선 다 느껴지거든요.”
“아니 나 진짜 억울해...”
“응, 히꾹, 변태 말 안 믿어.”
“지수 취했어?”
옅게 홍조가 오른 송선우가 물었다. 은은히 머금은 미소가 예뻐 보였다.
“아니거든.”
백지수가 퉁명스레 답했다. 송선우가 헤헤 웃었다.
“취했네. 자러 가.”
“안 취했, 히끅, 어.”
“침대까지 내가 업어줄까?”
“됐어.”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잔을 내 쪽으로 밀어내 건넸다. 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
“우리 이것만 먹고 끝내자.”
“안 돼 넌 다섯 잔은 더 마셔야 돼.”
백지수가 자기 잔을 들고 말했다. 어이없었다.
“내가 왜?”
“너 내 가슴에, 히꾹, 얼굴 존나 처박았잖아.”
송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진심?”
송선우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쳐다봤다.
“해명해라.”
“해명은 무슨 해명.”
일단 말하고 잭콕을 마셨다. 달콤하고 씁쓰름했다. 온더락 글라스를 조심히 내려놨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이온유 이 새끼 잘 때마다 내 방 와 가지고 침대에 기어 들어와서 막 안아달라고 재워달라고 그랬어.”
“레알?”
송선우가 왼팔을 테이블에 대고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좀 취해서 그런가 해명할 말이 잘 안 떠올랐다.
“진짜니까 말 없는 거 봐.”
백지수가 말하고 잭콕을 한 입 마셨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진짠가 보네.”
“아니 근데 내가 먼저 안아달라고 한 적은 없어. 지수가 안아줄까, 하고 물어봤을 때만 그렇다고 한 거지.”
“근데 얘 버릇 들여 가지고 존나 눈치 줘, 내가 안아줄 때까지.”
백지수가 말했다. 억울했다.
“아냐. 이건 진짜 음해야.”
“음해든 뭐든 너 밤마다 지수 방 가서 같은 침대 쓰면서 가슴에 안겨 가지고 잔 건 팩트라는 거지?”
“응. 팩트 맞아.”
백지수가 답했다. 송선우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다음 테이블을 내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같이 동거하면서 침대랑 소파에서 따로 자는 것도 아니고, 같은 침대 써서 그렇게 동침을 한다?”
송선우가 오른손으로 잔을 잡고 목을 젖혀 벌컥벌컥 마셨다. 오른 입가로 잭콕이 새어 흘렀다. 목으로 칵테일이 얇게 줄기를 이뤄 흘렀다. 송선우가 왼손바닥으로 목을 대충 닦아내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둘이 무슨 부부야?”
목이 탔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를 장전하고 입을 열었다.
“에이, 이게 뭐 부부 소리 나올 정돈 아니지.”
“뭐래. 신혼부부보다 더 달달하구만. 존나 껴안고 자는 거면.”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해서 백지수를 봤다. 백지수는 송선우를 보며 그냥 엷게 미소짓고 있을 뿐이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백지수에게 도움을 받을 가망은 없을 듯했다.
“솔직히 껴안고 자는 거 진짜 걍 존나 내 로망인데...”
송선우가 투덜투덜 말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입을 삐죽 내민 게 존나 귀여웠다. 송선우가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게슴츠레한 게 뭔가 야했다. 송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둘이 섹스는 안 했지?”
대뜸 섹스라고 말한다니, 존나 야했다. 바지 속에서 자지가 껄떡거렸다. 입을 열었다.
“안 했어. 뭔 그런 걸 물어.”
“너희 둘 어른 될 때까지 그런 거 하면 안 돼.”
“왜 안 돼?”
백지수가 물었다. 뭔 미친 소릴 하는 거지? 귀가 의심됐다. 고개를 획 돌려 백지수를 봤는데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존나 음탕했다.
“너 할 거야?”
송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이건 뭐 그냥 거의 난 하겠다는 선언이잖아.”
“아니 그런 건 또, 히끅, 아니지. 그냥 내 일반적인 의견?”
“뭔 소리야, 일반적인 의견이라는 건?”
“걍 서로, 히꾹, 동의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거? 법적으로 처벌도 안 되잖아. 히꾹, 그럼 된다는 거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이 있잖아. 도덕적으로는 하면 안 되는 거지.”
“왜 도덕적으로, 히꾹, 안 된다는 거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시각은 된다 아냐?”
“아니 그 정반대로 안 된다는 게 사회 통념 아냐? 섹스가 정서적 의미, 사회적 의미, 인격적 의미가 있는데 그것도 잘 모르고 책임도 못 지는 청소년이 해도 된다고? 그건 아니지.”
“네가 말하는 정서적 사회적 인격적 의미는 뭔데?”
“일단 정서적 의미는 뭔지 대충 감 오지.”
“응.”
“사회적 의미는, 섹스가 아이를 갖는 성적 행위니까 사회구성원을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라는 거고, 또 두 인간이 섹스한 사이로 공식화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도 사회적이라는 거지.”
“사실혼처럼?”
“응. 그리고 인격적 의미는 전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두 인격의 밀접한 결합이니까 미숙한 상태에서 그게 이뤄지면 절대 옳다고 할 수는 없지 그게.”
“근데 네가 말한 거는 어른이어도 잘 못 지키는 사람이 많은 거 같은데?”
“그럼 그런 사람은 섹스를 하면 안 되는 거지.”
나를 몰아세우는 청문회 분위기였다가 갑자기 섹스토론이라니, 대화 흐름이 어지러웠다. 송선우가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무서워졌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온유?”
난 김세은이랑 존나 많이 했는데.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입을 열었다.
“일단 둘 다 설득력 있어.”
“그래서 누가 더 그럴듯하냐고.”
백지수가 물었다. 왠지 여기서 백지수 말이 맞다고 하면 백지수가 새벽에 깨서 자위하다가 눈 돌아가거나 해서 따먹힐 것 같았다.
“난 개인적으로 선우 말이 더 맞는 거 같애. 섹스라는 게 단순히 즐기는 것만은 아니잖아.”
내가 말하면서도 찔렸다. 김세은한테 미안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히꾹, 피임약이 있잖아.”
“피임약 때문에 유희적인 부분이 두드러진 건 좀 있지. 근데 즐거움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그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지점들을 간과한다는 게 문제고.”
“으음...”
“그럼 이거 2 대 1 판정승으로 내가 이긴 거지?”
송선우가 물었다. 백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설득 안 끝났어.”
“뭐 남았는데?”
백지수가 나를 바라봤다.
“이온유.”
뭔가 불길했다.
“응?”
“너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절대 안 할 자신 있어?”
송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학학, 하고 웃었다.
“아니 그건 그냥 초딩 논리잖아. 뭐야 그게, 진짜.”
“아니 일단 이온유 대답하는 거 들어봐.”
백지수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말문이 막혔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절 뭘로 보는 겁니까 지수씨.”
“아니 말 피하지 말고.”
“하... 안 해.”
“진짜?”
“안 해요.”
송선우가 말없이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잭콕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너 자지는 세우잖아.”
백지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송선우가 고개를 내 반대쪽으로 획 돌리고 푸흡, 하고 웃어 입에서 잭콕을 내뿜었다. 백지수가 일어나서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 오른손으로 여러 번 돌돌 말아 송선우에게 건네줬다. 송선우가 몸을 일으키고 건네받고 입가를 닦은 다음 바닥에 흘린 것도 닦았다. 백지수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송선우가 곧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근데 지수야 방금 제정신이야?”
“나 좀 취했잖아.”
“너 진짜 좀 미친 거 같애 지금.”
“맞아 나 지금 좀 미쳤어.”
백지수가 또 나를 쳐다봤다. 이젠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빨리 얘기나 해봐 이온유.”
“뭘.”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안 할 자신 있냐고.”
“안 한다 했잖아.”
송선우가 백지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해 지수야.”
“아냐 잠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백지수가 오른손 검지를 세우고 왼손으로 손 밑을 받쳤다. 송선우가 작게 한숨 쉬었다.
“진짜 마지막이야.”
“응.”
백지수가 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선우랑 내가 동시에 너랑 한다고 하면 너 바로 뿌리칠 수 있어?”
미친년. 그냥 진짜 미친년이었다. 다른 뭣도 아닌 섹스에 미친년. 뭐가 백지수를 이렇게 음탕하게 했을까? 어지러웠다. 백지수가 또 입을 열었다.
“봐봐, 바로 못 뿌리치잖아. 내가 이겼어.”
“그래, 네가 이긴 거로 해. 그니까 이제 자러 가자 지수야.”
“이온유 다섯 잔 더 먹여야 되는데...”
송선우가 일어나서 백지수에게 다가갔다.
“아냐 그거 보고 있다가 네가 먼저 갈 거 같애. 자러 가자.”
송선우가 백지수의 앞에 서서 등을 내보이고 무릎을 꿇었다.
“업혀 지수야.”
“알겠어.”
백지수가 엉덩이로 의자를 뒤로 밀고는 일어서서 송선우의 등에 몸을 의지했다. 가슴이 눌리는 게 눈에 보였다. 송선우가 일어나서 천천히 걸었다. 백지수가 나랑 눈을 마주쳐오고 입을 열었다.
“먹은 거 치워 이온유.”
“알겠어.”
송선우가 2층 계단을 밟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어나서 뚜껑을 닫을 건 닫고 냉장고에 넣어야 될 건 넣은 다음에 쓰레기를 정리했다. 씻어내야 할 것들을 설거지하고 폰을 챙긴 다음 소파에 앉았다. 폰을 켜봤다. 백지수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
[너 송선우랑 사귀는 거 아니지?]
가슴이 뜨거웠다. 존나 귀여웠다. 당장 백지수 방으로 쳐들어가서 존나 따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그냥 폰을 끄고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