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놀이공원
* * *
화이트보드랑 검은색 마커를 샀다. 화이트보드가 들어간 커다란 봉투 안에 종이봉투를 집어넣은 다음 오른손으로 들고 걸어서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 대문 앞에 흰 볼캡을 눌러 쓴 흰 크롭티에 크롭 청자켓이랑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서서 폰을 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봤다. 송선우였다. 왜지, 의아해서 멈춰섰다. 송선우가 고개를 들어서 내 쪽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송선우가 씨익 웃었다.
“이온유.”
송선우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너 뭔데 문자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아?”
“아, 나 엔터에서 일하는 실장님 만나 가지고.”
“그래서 바쁘셨다?”
“네.”
왼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송선우가 안에 들어오고 대문을 닫았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입을 열었다.
“근데 뭐야? 나 있는 줄 어케 알았어? 지수가 말해줬어?”
“아니. 걍 느낌이지. 네 습성도 아니까.”
“네? 내 습성이 뭔데요?”
“몰라. 걍 넘어가. 말 못 해. 안에 들어가자 일단.”
“응.”
신발을 벗고 같이 거실로 들어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송선우가 청자켓을 벗고 바닥에 버리듯 내려놓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근데 너 온다고 지수한테 말했어?”
송선우가 나를 쳐다봤다.
“아니? 걍 온 건데?”
“뭐야 개 에반데.”
“에바는 네가 더 에바죠 솔직히.”
“내가 왜요.”
봉투 안에 든 종이봉투를 꺼내고 캐리어에 넣었다. 주방에 가 유리잔을 둘 꺼내 테이블에 두고 콜라를 따랐다. 컵을 양손에 들어서 소파에 누워있는 송선우에게 다가갔다. 송선우가 폰을 집어넣고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아 나를 쳐다보며 두 손을 내밀었다. 왼손에 든 컵을 주었다.
“고마워.”
“응.”
송선우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송선우가 잔을 받자마자 꿀꺽꿀꺽 마셔서 반절이 사라졌다. 송선우가 왼손등으로 입가를 스윽 닦고 입을 열었다.
“너 근데 진짜 존나 에바 아니야?”
“뭐가?”
“너 그냥 존나 동거하는 거 아냐? 백지수랑?”
“동거라니.”
“동거 맞잖아, 너 열쇠도 갖고 있고, 지금도 거의 집주인 느낌으로 음료 대접하고. 익숙할 정도로 있었던 거 아냐?”
“...”
할 말이 없어서 콜라를 한 입 마셨다. 송선우가 말없이 나를 마냥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온 거야?”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난 너 보러 오면 안 돼?”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놀러 가자고 하려고. 나 심심해.”
“어디로?”
“놀이공원.”
“지금?”
“지금 가고 싶으니까 지금 온 거지.”
“그럼 너 점심은 어떡해?”
“점심? 가서 먹어야지.”
송선우가 콜라를 모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 놀 시간 줄어들잖아.”
헛웃음이 나왔다.
“진심 가자고?”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구라게? 빨리. 옷 흰청으로 갈아입고.”
“진짜 에반데.”
“에바는 죽상인 네 얼굴이 에바고.”
“나 지금 죽상 아닌데?”
“응 너 학교에서 햄릿이야.”
“내가? 왜?”
“존나 세상 고뇌 다 가진 것처럼 굴잖아. 빨리 일어나. 하루 정도는 웃어야지.”
송선우가 오른손으로 내 왼 팔목을 잡아 위쪽으로 당겼다. 일어서서 콜라를 다 마시고 입을 열었다.
“네 컵 줘. 설거지하고 나가게.”
“어. 빨리 해.”
왼손으로 컵을 건네받고 싱크대에서 빠르게 설거지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그 위에 청셔츠를 걸쳤다. 소파에 앉아 있던 송선우가 나를 보고 씨익 웃더니 크롭 청자켓을 걸쳤다. 나란히 밖에 나갔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대문을 나오고 바로 닫았다. 송선우가 사뿐히 걸었다. 발걸음을 맞췄다. 송선우가 고개를 내 쪽으로 하고 입을 열었다.
“야.”
“응?”
“너 근데 실장님 만나서 뭐 했어?”
“계약서 받았어.”
송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딘데? 들어가게?”
“아직 확정은 아냐. 계약서는 어머니 보여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 거고.”
“으음... 왜 굳이 어머니한테 보여드리려고?”
“그냥, 어머니는 지금 나 등교 정지당한 거 모르시거든 아마? 그래서 일요일에 찾아봬서 나 잘하고 있다, 그런 모습 보여드리려고.”
송선우가 미소짓고 오른손으로 내 등을 세게 툭툭 토닥였다.
“효자네 이온유.”
“네에, 감사합니다.”
같이 2호선을 타서 좌석에 앉았다. 송선우가 폰을 켜 양손 엄지로 키패드를 두들기더니 내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사람들 시선 나만 느껴져?]
피식 웃었다.
“그게 왜?”
“그냥.”
송선우가 씨익 웃고는 다시 키패드를 두들겨서 내게 보여주었다.
[넌 생각 없어?]
무슨 뜻일까, 의미가 너무 모호했다. 괜히 침을 삼켰다. 송선우가 눈을 마주쳐왔다. 뭔가 야릇했다. 잠시 눈싸움을 하다가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짜 우리를 보는 사람이 있었는지 눈을 찌푸린 중년 남자 한 명과 트렌치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랑 눈을 마주쳤다. 다시 송선우를 바라봤다. 송선우가 또 키패드를 두들겼다. 이젠 조금 무서워졌다. 화면을 봤다.
[진짜 아무 생각도 없나 봐?]
고개를 끄덕였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개 노잼.”
“왜요 갑자기.”
“재미없어 너.”
멋쩍게 웃었다. 괜히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서 톡을 켜보고 송선우의 눈을 피했다. 잠실에 도착할 때까지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내리자, 라는 말을 듣고 함께 일어섰다. 자유이용권 티켓을 끊고 뛰어가서 10회 프리패스 프리미엄 밴드를 샀다.
“서로 채워주자.”
송선우가 말했다. 응, 이라고 답하고 먼저 오른손에 채워줬다. 송선우가 내 소매를 느릿느릿 걷어주고 채워줬다. 송선우가 왼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입을 열었다.
“사진 찍을 거야?”
“응.”
“어떻게 할까?”
“일단 크로스로 먼저 해보자.”
“응.”
송선우가 오른손을 주먹 쥐고 내 팔뚝 위로 자기 오른 팔뚝을 올렸다. 그러고는 왼손 엄지로 화면을 눌러 사진을 세 장 찍었다. 송선우가 눈살을 찌푸리고 화면을 넘기며 사진을 확인했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다르게 한번 더 찍자.”
“어떤 식으로?”
“일단 붙어봐.”
송선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직접 내 왼편에 바짝 붙어왔다. 송선우가 오른손을 주먹 쥐고 손등이 하늘에 가게 앞으로 내밀었다.
“너도 주먹 쥐고 내 손목 옆에 붙여. 약간 평행하게 보이게.”
“응.”
오른손을 주먹 쥐고 송선우의 팔에 딱 붙게 했다. 송선우가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이제 이 상태로 손 뒤집어서.”
“응.”
오른손을 뒤집어 손등이 바닥에 가게 했다. 송선우가 또 사진을 두 장 찍었다.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장 더 찍자.”
피식 웃었다.
“아니 왜?”
“걍 하잔 대로 해.”
“네.”
“일단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팔 쭉 내밀어 가지고, 서로의 팔목이 주먹 끝부분이 닿게 하는 거야. 뭔 느낌인지 이해돼?”
“일단 해보자.”
“어. 반대편에 서.”
송선우와 마주 보는 자리에 섰다. 송선우가 먼저 주먹 쥔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도 오른손을 주먹 쥐어 손등이 하늘을 보게 해서 내밀고 내 손목뼈랑 송선우의 손목뼈가 맞닿게 했다.
“오, 딱 내가 원하던 거였어.”
송선우가 사진을 두 장 찍었다. 바로 손을 뒤집었다. 송선우가 미소지었다.
“센스 보소?”
“기본입니다.”
송선우가 사진을 두 장 찍고 왼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송선우가 나를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자.”
“응.”
나란히 걸었다. 프리패스가 있었으니 뛸 필요는 없었다. 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문득 왜 사진을 그리 많이 찍었을까 궁금해졌다.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 사진 왤케 많이 찍었어?”
“이제 더 찍을 거야.”
“내가 카메라 들고 찍어달라는 거야?”
“아니. 너 같이 찍혀야 돼.”
“왜?”
만약 송선우가 카톡 프사를 바꾸거나 SNS에 올리거나 하면 나중에 김세은한테 죽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김세은이 자기 미래를 망쳐가며 난장판을 만들 수도 있었다. 송선우가 왼눈썹을 치켜세우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찍히기 싫어? 좀 열 받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지금 가까이 붙어봐.”
송선우가 왼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카메라 앱을 켰다. 프레임 속에 성을 배경으로 송선우가 미소짓고 있었다. 송선우가 미소를 굳힌 상태로 입을 열었다.
“빨리 옆으로 와라.”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일단 옆으로 붙었다.
“더.”
더 바짝 붙었다. 송선우가 사진을 네 장 연달아 찍었다.
“오키. 됐어.”
송선우가 폰을 왼주머니에 집어넣고 앞을 봤다.
“자이로드롭부터 타러 가자.”
“어. 근데 왜 찍어 사진을?”
“나 식당일 돕는데 번호 물어보는 병신들 있어서. 남친 있다고 하고서 네 사진 보여주게.”
“응? 그거 그냥 너 미자라고 말하면 알아서 쭈그리는 거 아냐?”
“아냐. 안 그러는 병신들도 있어. 진짜 개 씨발.”
“밖에 있는데 너무 화나셨어요.”
“아니 나더러 학생증을 보여달래. 존나 내가 왜? 아, 진짜 그런 새끼들은 쪽 좀 줘야 되는데.”
프리패스 밴드에 도장이 찍히고 대기했다.
“좆 같겠네.”
“어. 진심 개 좆 같애 개새끼들. 적당히를 몰라.”
안에 들어가서 소지품을 놓고 놀이기구에 탑승했다. 바로 옆에 앉은 송선우가 내 쪽을 바라봤다.
“암튼, 찍은 사진들 그렇게 쓸게. 고마워.”
“그래. 근데, 너한테 들이댄 사람 중에 네 취향이다 싶은 사람은 없었어?”
“취향? 까진 아닌데 잘생긴 사람은 있었지. 근데 나 고딩인 거 알고도 들이대는 사람은 없었어. 아. 한 명 있긴 했다. 근데 그런 새끼는 나 말고도 뭔가 여자 존나 많을 거 같다는 직감이 팍 들어서 걍 좆 까라 했지.”
놀이기구가 서서히 올라갔다.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자극됐다. 이상하게도 이 감각이 좋았다.
“진짜 좆 까라고 딱 그 말을 했다고?”
“아니. 그냥 좀 돌려 말했지. 뜻은 좆 까라는 거였고.”
“난 또.”
“나 막무가내 아니야.”
놀이기구가 빠르게 하강했다. 송선우가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나도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을 봤다가 밑을 봤다. 가슴이 막 뛰었다.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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