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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127화 (127/438)

〈 127화 〉 뭐라도 해야지 (5)

* * *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른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을 비비고 폰을 켜봤다. 여섯 시 일 분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고 백지수 방에 있는 헤어드라이어를 챙기고 내려와 머리를 말렸다. 주방에 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아침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제 아침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기는 했는데 말이 새어서 흐지부지해져 가지고 결국엔 답을 못 듣고 잠들었다. 일어나서 먹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뜨거울 때 먹어야 하는 거는 만들면 안 될 거였다. 선반을 열어 봤다. 핫케익 믹스가 눈에 띄었다. 꺼내서 테이블에 놓고 냉장고를 열어 계란 하나랑 버터, 우유를 꺼냈다. 보울에 계란을 깨고 거품기로 살짝 섞은 다음 버터를 조금 잘라 집어넣고 살짝 눌러준 뒤 거품이 날 때까지 섞었다. 우유를 넣고 섞은 다음 핫케익 믹스를 체에 쳐서 내렸다. 반죽을 휘젓고 국자로 떠서 떨어뜨려 봤다. 묽지도 되지도 않았다. 딱 적당했다. 가스레인지에 코팅 프라이팬을 올리고 불을 켰다. 약불로 조절하고 예열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국자로 반죽을 떠서 서로 겹치지 않게 조심히 올렸다. 반죽들에 기포가 올라왔을 때 오른손으로 뒤집개를 잡아 뒤집어주고 폰으로 1분 타이머를 맞췄다. 흰 접시를 가져와서 타이머가 끝날 때까지 멍 때렸다. 1분이 지났을 때 뒤집개로 하나를 뒤집어봤다. 색이 예쁘게 났다. 불을 끄고 접시에 차차 옮겼다.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팬케이크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먹어봤다. 그냥 먹어도 먹을 만했다. 대충 크기가 맞아 보이는 프라이팬 뚜껑을 가져와서 덮었다. 폰을 켜 백지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팬케이크 해서 테이블 위에다 놨으니까 그거 먹어]

[음료나 곁들일 거는 알아서 챙기고]

그릇에 씨리얼이랑 우유를 부어 빠르게 먹고 설거지했다. 이수아가 지나치는 길목을 목적지로 해서 택시를 불렀다. 명함을 챙기고 검정 트위드 자켓을 걸친 다음 폰을 오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현관을 나와 밖에서 열쇠로 문을 잠그고 대문을 나서서 닫았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깨지는 않았다. 백지수가 이번엔 자위를 안 했나? 어쩌면 오늘은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서 소리를 죽인 채로 자위했는지도 몰랐다.

폰으로 불렀던 택시가 왔다. 뒷문을 열어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기사님이 예에, 라고 대답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기사님은 꽤 과묵한 편이셨다.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섞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듣고 차 문을 닫았다. 택시가 떠나갔다.

이수아가 언제 올지 몰라서 빨리 나온 거긴 한데 조금 후회됐다. 전화를 한번 걸든가 했으면 됐는데, 나도 참 미련했다. 한 바퀴 빙 돌아 오픈한 카페가 있나 찾고 안에 들어가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 라지 사이즈랑 초코 쿠키를 샀다. 들고 밖에 나와서 왼손으로 벤치를 툭툭 털고 앉아 이수아를 기다리며 깨작깨작 먹었다. 쿠키를 2/3 정도 먹었을 때 멀리서 이수아가 보였다. 이수아도 나를 본 건지 자리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수아를 향해 걸었다. 적당히 가까워졌을 때 이수아가 입을 열었다.

“왜?”

“줄 거 있어서.”

왼주머니를 뒤졌다.

“뭔데?”

“이거.”

김민준 실장의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이수아가 내 얼굴을 노려봤다가 오른손으로 건네받아서 명함을 내려봤다. 읽는 것 같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AOU 엔터?”

“응. 배우할 생각 있으면 실장님한테 전화해. 내 여동생이라고 얘기하고.”

이수아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

“할 말 있어?”

“... 고마워.”

피식 웃었다. 왜 이런 걸 주느냐, 같은 질문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귀여웠다. 이수아가 명함을 마이 오른쪽 속주머니 안에 넣었다. 입을 열었다.

“연락할 거야?”

“나도 몰라.”

“해봐, 손해 볼 건 없잖아.”

“...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왜 쪼개냐?”

“너 진짜 여동생 같아서.”

이수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네 여동생 맞거든?”

“그니까, 그게 신기하다고.”

“뭐래. 나 학교 가게 비켜 이제.”

“그렇게 급하게 가야 돼?”

“왜 또.”

“왜냐니.”

“...”

이수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말없이 응시했다. 이수아가 끝내 입을 열었다.

“미안해. 학교 찾아가서 그런 거. 등교 정지도 먹게 하고. 그게 완전 내 잘못은 아녀도.”

피식 웃었다. 이수아가 밉긴 미워도 보기 싫을 정도로 밉지는 않았다.

“그래.”

왼쪽으로 한 발짝 떼서 앞에서 비켜줬다.

“잘 가.”

“... 응.”

이수아가 나를 지나쳐서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뒷모습을 보다가 폰을 꺼내봤다. 김민준 실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온유 학생]

[또 막 불러내서 미안한데, 열 시까지 내가 찍은 주소로 와줄 수 있어요?]

[(카페 주소)]

[문자 보면 전화 걸어줘요]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세 번 들리고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온유 학생. 주소 보낸 데로 와줄 수 있어요?

“네. 갈 수 있어요.”

ㅡ고마워요. 나중엔 원하는 대로 막 데려가 줄게요.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실장님이 직접이요?”

ㅡ직접 데려갈 수도 있고, 꼭 제가 아닐 수도 있죠. 암튼. 미안해요, 불러내서.

“괜찮아요. 제가 부탁한 일인데.”

ㅡ그래도 미안해서요. 오면 커피는 내가 사줄게요.

“아뇨 제가 살게요. 제가 부탁드린 거니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ㅡ알겠어요. 끊을게요.

“네. 감사해요.”

ㅡ네.

전화가 끊겼다. 백지수한테서 온 문자는 없나 확인해봤다. 있었다.

[마일드하게 팬케이크만 준비한 거 약간 마음 상하네]

[홀랜다이즈 소스에 에그 베네딕트 만들어 주던 이온유가 그립네요]

피식 웃었다. 전화 걸었다. 바로 연결됐다.

“마음 상했어요 지수씨?”

ㅡ살짝 상했어요.

음료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먹고 있어?”

ㅡ응. 메이플 시럽 뿌려 가지고 먹고 있어.

“맛은 어때?”

ㅡ너도 먹어보지 않았어?

“맛있지.”

ㅡ응. 맛있어.

“근데 너 어제 말한 거랑 문자 보낸 게 말이 약간 다르다? 막 부담 가지지 말라더니.”

ㅡ걍 농담이지. 그걸 또 진지하게 받네.

“나도 농담이야.”

ㅡ농담이면 농담처럼 하세요 제발.

“네, 주의할게요.”

ㅡ근데 너 지금 돌아올 거야? 잘하면 나 나가기 전에 너 들어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럼 너 지각하는 거 아냐? 에반데?”

ㅡ그런가?

“어. 지각하지 마세요 좀.”

ㅡ나 지각 많이 안 하거든요.

“아니 지각을 안 하는 게 보통이잖아.”

ㅡ아 몰라, 내 맘이야.

피식 웃었다. 괜히 귀여웠다.

“전화 끊을까? 너 빨리 먹고 나가야 되잖아.”

ㅡ그래. 끊어.

“응.”

전화를 끊었다. 10시까지는 시간이 좀 비는데 뭘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혼자 할 게 별로 없어서 그냥 pc방에 들어가 오랜만에 롤을 켰다. 세 판을 하고 pc방에서 나왔다. 김민준 실장이 보낸 주소를 목적지로 택시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뒷좌석에 탔다. 택시가 출발했다.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입구 앞에 김민준 실장이 보이지는 않아서 안에 들어갔다. 안에도 바로 보이지는 않아서 폰을 켜 문자를 보냈다.

[저 카페 안에 들어왔어요]

곧 답장이 왔다.

[그래요? 잠깐만요.]

[커피 뭐 드실래요?]

[아 제 거 사준댔죠. 저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랑 카페 라떼 라지 사이즈를 주문했다. 금방 나온다기에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나온 것을 받고는 창가에 있는 1인석에 앉아 김민준 실장이 오는지만 봤다. 얼마 안 가 오른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김민준 실장이 카페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일어나서 오른 손목이랑 팔뚝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김민준 실장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으응, 왼쪽 손에 든 게 제 거죠?”

“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김민준 실장이 왼손으로 커피를 받고 내게 건네주었다. 오른손으로 받았다.

“3년짜리밖에 없긴 한데, 아역배우 시절부터 커리어 쌓은 성인 배우한테 내민 거로 가져왔어요. 저기 벤치에 앉아서 확인해봐요.”

미소지었다.

“굳이 확인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요.”

“아뇨 한번 봐봐요. 어머니가 보셨을 땐 온유 학생한테는 더 좋은 조건이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카페 라떼를 내려놓고 왼손으로 벤치를 툭툭 턴 다음 앉아서 종이봉투 안에 있던 클립이 끼워진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빠르게 읽어나가며 장을 넘겼다.

“막 안 읽고 넘기는 거 아니에요?”

일어서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김민준 실장이 물었다.

“아니에요. 읽었어요.”

종이를 다시 덮고 봉투에 넣어 오른손으로 잡고 일어선 다음 왼손으로 카페라떼를 들었다. 김민준 실장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 본 거예요?”

“네. 다 좋은데요?”

“다행이네요.”

“실장님 이제 또 일 보러 가셔야 돼요?”

“그래야죠. 잠깐 나온 건데.”

“막 붙잡고 있음 안 되겠네요.”

김민준 실장이 픽 웃었다.

“온유 학생 나 게이 만들 일 있어요?”

“뭔 농담이에요 그건.”

“그냥 요즘 그런 우스갯소리 있잖아요, 게이 될 거 같다.”

“살벌한 농담이네요.”

“안심해요, 진짜 게이는 아니니까.”

“그건 알죠.”

김민준 실장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 마시고 왼손으로 폰을 꺼내 확인했다.

“이제 가야겠네요.”

“네. 안녕히 가세요.”

“또 못 바래다줘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김민준 실장이 씨익 웃고 뒤돌아서 걸어갔다. 뒷모습을 보는데 김민준 실장이 갑자기 뒤돌아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근데 그 명함은 줬어요? 여동생분한테?”

“네 아침에 주고 오는 길이에요.”

“반응 어땠어요?”

“좀 괜찮았던 거 같아요 아마.”

“같이 들어오면 좋겠네요. 여동생분이랑.”

멋쩍게 웃었다.

“저도 그랬음 좋겠네요.”

김민준 실장이 미소지었다.

“진짜 갈게요 이제.”

“네.”

김민준 실장이 다시 뒤돌아 걸어갔다.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오른손으로 폰을 만져 대형잡화점을 목적지로 해서 택시를 불렀다. 왠지 일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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