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뭐라도 해야지 (1)
* * *
햇살이 눈두덩이를 두드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햇살 반대편으로 뒹굴었다. 느리게 눈을 뜨고 오른손으로 폰을 켜봤다. 오후 1시 47분이었다. 오래도 잤다. 새벽에 자위나 해대서 잠을 못 자게 한 백지수 때문이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멍하니 있었다. 뭐 해야 할까,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막막했다. 당장 시간이나 죽이다가는 미래에도 백수나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할 게 없었다. 그저 무력하기만 했다. 학교폭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았으니 가수는 될 수 없었다. 10일 출석정지로 열흘이나 무단결석을 했다는 기록도 남으니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찾아보면 일이야 있겠지만 내가 바라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을 거였다. 우울했다.
1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꺼내서 테이블에 나열했다. 그러고 나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소주 두 병이랑 편의점 맥주 한 캔만 남기고 다른 건 도로 집어넣었다. 목 왼쪽 뒤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시간을 버렸다는 게 실감 났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주병을 따고 병째로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썼다. 냉장고를 열어 옥수수 캔이랑 마요네즈, 버터, 우유, 피자 치즈를 꺼냈다. 옥수수 캔부터 따뒀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한 큰술 넣고 녹였다. 체에다 옥수수 캔을 부어 물을 빼고 왼손으로 옆면을 탁탁 쳐서 털어준 다음 프라이팬에 투하했다. 스패츌러로 조금 섞어주다가 우유를 조금 부어서 끓였다. 오븐을 예열했다. 마요네즈를 넣고 섞어주다가 설탕 한 스푼이랑 후추도 조금 넣었다. 불을 끄고 그라탕 그릇에 옮겨 담았다. 피자 치즈를 얹은 다음 오븐에 넣었다.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 위에 두 팔을 올리고 턱을 얹은 채 오븐을 마냥 바라봤다. 천천히 녹아갔다.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치즈가 다 녹았을 때 오븐 장갑을 끼고 오븐을 열어 그라탕 그릇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븐을 닫고 접시랑 숟가락을 하나 들고 의자에 앉아 그라탕 그릇에 푹 넣었다. 괜히 한번 퍼 올려서 치즈가 늘어나는 걸 봤다. 소주를 병째로 마시고, 혀가 써서 얼굴이 찡그려지면 콘치즈를 접시에 옮겨 담아 입에 집어넣어 우물대고, 소주가 질려서 맥주 캔을 까 한 모금하고, 또 콘치즈를 입안에 넣었다가 소주를 한 모금 마시기를 반복했다. 술을 다 마셨다. 남은 콘치즈를 입에 꾸역꾸역 넣었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짚고 트림했다. 설거지하려 일어서려 했는데 살짝 비틀거렸다. 조금 취한 듯했다. 설거지하고 폰을 봤다. 송선우의 카톡 프사가 전치 3주 진단서에서 영화관 티켓 한 장을 들고 있는 손으로 바뀌어있었다. 상태 메시지는 ‘혼영화 클리어 다음은 무한 리필 아무 데나 혼밥 도전’이었다. 접때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생각보다 너무 재미없어서 집에서 뒹굴뒹굴만 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잘만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도 해야 할 듯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술만 마시고 살 수는 없었다.커피 제조법을 익혀서 카페를 하든 어쩌든 뭐라도 하고 살아야 할 거였다. 메시지 앱을 켰다. 저번에 유은이랑 버스킹했을 때 나한테 번호를 남겨줬던 박다솔을 찾았다. 스크롤을 올려 카페 주소를 복사하고 목적지로 해서 택시를 불렀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만 닦고 검은 블레이져를 걸친 뒤 나갔다. 택시에 올랐다.
“대학생이에요?”
택시기사님이 물었다. 괜히 창피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네.”
“연예인 아니죠? 티비에서 못 본 거 같아서.”
“네 아니에요.”
“왜 안 해요, 목소리도 좋은데.”
“... 못 해요.”
“못 하는 게 세상에 어딨어요, 안 하는 건 있어도. 그럼 뭐 모델 일 같은 거는 해요?”
“아뇨, 안 해요.”
“에헤이 참, 가진 것 좀 써먹어 봐요. 부모님이 좋은 거 물려주셨는데.”
“... 노력해볼게요.”
“노력이고 뭐고 그냥 길만 걸어도 명함 같은 거 받지 않아요? 그냥 연락하고, 뭐 피팅 모델 같은 거 하면 학비 같은 거 걱정 덜고 할 텐데.”
“그렇네요.”
돈이 필요하다 느낀 적은 없어서 모델 일은 안 했다. 모델은 학교폭력을 했어도 할 수 있을까? 런웨이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리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노래가 좋았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폰을 보고 사진이랑 비교해서 그 카페가 맞는지 확인했다. ‘Sole Cafe’. 확실히 맞았다. 통유리 너머로 카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테이블 반 정도에 사람이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장사가 잘되는 듯했다. 카운터에는 박다솔 혼자만 서 있었다. 카페가 그리 크지는 않았으니 혼자서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다솔의 눈이 커졌다.
“온유?”
박다솔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작았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네.”
“너 고딩이잖아.”
“네.”
“왜 지금 여깄어?”
“... 저요.”
“응. 야 너 근데 술 마셨어?”
“조금이요.”
“냄새가 조금이 아닌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적당히 마셨어요.”
박다솔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 양아치야?”
“아니에요 누나.”
“온유야 잠깐만 옆으로 나와봐.”
“네.”
왼쪽으로 두 발짝 걸었다. 남자 손님 한 명이 카운터로 다가서서 주문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서 카페를 둘러봤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쪽을 보던 여자 두 명이랑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이 시선을 피했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잠깐 보다가 다시 박다솔을 봤다. 박다솔이 커피를 다 만들어서 남자 손님에게 건네고는 나를 봤다.
“뭐 할 말 있나봐?”
“좀 있어요.”
“그래? 유은이랑 사귀는 얘기해주러 온 거야?”
웃었다. 씁쓸했다.
“아뇨.”
“그럼 뭔 얘기지. 그 전에, 너 진짜 왜 여깄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냐?”
“저 학폭으로 등교 정지 당했어요.”
박다솔이 눈을 찌푸렸다. 앞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다 이렇겠지. 가슴이 아팠다.
“학폭? 학교폭력?”
“네.”
눈물이 핑 돌았다. 박다솔의 눈이 측은해졌다.
“무슨 사정이 있던 거야?”
“제가 잘못했어요...”
“으응...”
안 울려고 했는데 결국 울음이 터졌다. 툭하면 울어대는 내가 싫었다. 박다솔이 어, 어 얘 왜울어, 라고 말하다가 카운터에서 나와서 오른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었다.
“왜 울어, 나 이상해 보이잖아.”
“죄송, 해요...”
“... 아냐. 괜찮아. 봐줄게.”
“감사, 해요...”
“응. 일단 울음 그치고, 이따가 얘기나 들어보자. 40분부터 20분 쉬는 시간 낼 테니까.”
“네에...”
“잠깐만.”
박다솔이 카운터 안에 들어가 몸을 숙여서 서랍을 열어 티슈를 꺼내 건네줬다.
“눈물 닦고, 아무 데나 가서 앉아 있어.”
“네...”
눈물을 닦아냈다. 박다솔이 오른손을 내밀고 있어서 눈물을 닦은 티슈를 돌려줬다. 박다솔이 티슈를 집고 가져다 버렸다. 창가 쪽 의자에 앉았다. 폰을 꺼내 봤다. 2시 36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추스렸다. 폰을 봤다. 2시 39분이었다.
“온유야.”
뒤돌아봤다. 박다솔이 오른손에 초코 라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박다솔이 왼손 검지로 2인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에 앉자.”
“네.”
일어섰다. 박다솔이 먼저 걸어가서 앉았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박다솔이 초코 라떼를 내 쪽으로 건넸다.
“마셔. 돈 청구는 안 할게.”
“고마워요.”
“응. 얘기나 해줘.”
“네.”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이 20분이라 했으니 머릿속으로 짧게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외도로 작년에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가 재혼해서 새어머니랑 새여동생이 생겼다. 새여동생이랑은 티격태격대는 사이였는데, 걔가 목욕하러 갔을 때 걔 썸남한테서 전화가 온 걸 내가 받아서 그 썸남이 걸레년이라 했다. 여동생은 썸남이랑 정리했고, 난 여동생 남친인 척을 했는데 그 남자애가 생각보다 더 쓰레기여서 여동생을 씹고 다녀서 여동생이 학교에서 평판이 안 좋아졌다. 내가 여동생 남친인 척하는 거는 여동생한테 얘기를 안 하고 했던 거라 여동생한테 앙심을 사버렸고, 학교가 끝났을 때 여동생이 찾아와서 나를 먹버남으로 만들었다. 밴드부 단톡에 여태의 사정을 써서 보내고, 다음날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오해를 풀었는데 점심시간에 양치 도구를 챙기러 반으로 갈 때 친구 한 명이 진짜 먹버한 거 아니냐고 뒷담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화를 못 참아서 때렸고, 그날 화해하러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걔가 또 진짜로 한 거 아니냐면서 독설을 퍼붓고는 지금 나를 용서하면 자기만 쓰레기가 되는 거라서 용서 안 해준다는 뉘앙스로 말했고, 또 때렸다. 학폭위가 열렸고 서면 사과랑 열 시간 사회봉사랑 열흘 등교 정지를 받았다. 박다솔이 입을 열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네.”
“...”
여자라고 했으면 그때도 지금처럼 반응해줬을까. 가슴이 아팠다. 억지로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아니, 진짜로. 그 친구라고 생각했던 걔가 진짜 개새끼구만.”
“...”
“근데 난 네 얘기 다 들어보니까 이게 그렇게 심각한 거 같진 않거든?”
“네? 왜요?”
“그냥 그럴 수 있겠다, 싶어. 솔직히 말하면 난 그냥 너 지금 엄청 호감이거든?”
“... 그래요?”
“응. 너 가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일단 나도 대중인데 사람들 반응 다 비슷할걸?”
“... 진짜요?”
“진짜로. 너 엔터 관계자한테 명함 많이 받지. 한번 전화해서 물어봐.”
“알겠어요.”
“응. 오늘 전화하고 문자든 전화든 해서 얘기해줘, 어떻게 말했는지.”
“네.”
박다솔이 테이블 위에 둔 자기 폰을 켜서 잠깐 봤다가 다시 꺼서 오른 주머니에 넣었다.
“쉬는 시간 다 갔다.”
박다솔이 일어섰다.
“라떼 다 마시고 카운터에 갖다 줘.”
“네. 고마워요,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우면 자주 와. 아 근데 담부턴 돈 받을 거야.”
살폿 웃었다.
“돈 두 배로 드릴게요.”
“그럴 필욘 없는데, 암튼 나 지금 일해야 돼.”
박다솔이 카운터로 들어가서 쉬는 시간을 적은 팻말을 떼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초코 라떼를 다 마시고 일어나서 카운터에 가져다 줬다. 박다솔이 미소짓고 잔을 가져갔다.
“저 갈게요.”
“응. 담에 또 와.”
“네.”
카페를 나섰다. 희망이 생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