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더부살이 시작 (2)
* * *
백지수는 안 내려오고 문자만 하나 왔다.
[피자 왔다니까 나가봐.]
[응]
잿더미를 양손으로 조심히 들어 소파 위에 내려놓고 밖에 나갔다. 대문을 열었는데 배달부가 피자랑 콜라 1.25L가 들어간 비닐봉투를 들고 서있었다. 문 앞에 두고 가달라고 요청 사항을 안 썼나. 의아했다. 일단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대문을 닫았다. 다시 안에 들어가 주방 테이블 위에 꺼내고 컵 두 잔을 곁에 올려뒀다. 의자에 앉고 폰을 켜 백지수에게 문자 보냈다.
[배달부한테 직접 받았는데?]
[뭐?]
[아 ㅅㅂ]
[배달부 여러 번 봤는데 ㅈ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뭘 이상하게 생각해]
[아니 존나 그냥 여자가 자취하는 곳으로 아는 데에서 남자가 튀어나와서 배달을 받는다? 개 이상하잖아 씨밯]
[그헣겠네요]
[나 내려가면 넌 뒤졌다]
날 때리든 어쩌든 일단 그냥 빨리 내려왔으면 했다. 계단만 멍하니 바라보는데 냐아,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려봤는데 잿더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잿더미 왜 깼어?”
잿더미가 냐아, 냐아, 하고 울면서 내 왼다리에 머리를 부딪혀가며 몸을 비벼댔다. 배고파하는 것 같았다. 선반에서 참치캔을 하나 까줬다. 잿더미가 머리를 처박듯이 해서 챱챱 소리를 내며 열심히 먹었다. 생각해보니 허락도 안 받고 까줬는데 괜찮을까 걱정됐다. 잿더미가 금방 다 먹어치우고 나를 쳐다보며 냐아냐아 울어댔다. 아직 배고프다는 거 같았는데 캔을 또 까줄 수는 없었다. 빈캔에 물을 담아주고 도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잿더미가 머리를 처박고 또 챱챱 소리를 내며 핥아댔다. 담아준 물의 반절 정도가 사라지고 나니 잿더미가 몸을 돌려 소파로 가 뛰어올랐다. 그대로 다시 몸을 말고 입을 쩍 벌려 한 차례 하품하더니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먹고 곧바로 도로 잠든다니, 잿더미야말로 상팔자였다. 조금 부러웠다. 싱크대에 물을 쏟고 캔을 버린 다음 의자에 앉았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구색 브라가 비치는 하얀 박스티를 입은 백지수가 오른손에 폰을 쥐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달려 오고 있었다. 박스티가 원체 커서 바지를 안 입은 것처럼도 보였다. 두 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고 기다렸다.
“살려줘.”
“좆까.”
백지수가 내 손을 피하고 뒤로 와서 헤드락을 걸어왔다. 뒤통수에 닿아오는 가슴이 베개처럼 포근했다. 굳이 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두 손을 들어 팔뚝을 잡기만 하고 힘을 주어 떼려고 하지는 않았다.
“풀어주세요.”
“어.”
백지수가 풀어주었다. 이게 아닌데, 살짝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돌려봤다. 백지수가 냉장고를 열어서 맥주캔 네 개를 꺼내 왼팔로 안아들듯이 했다. 일어나서 양손으로 두 개를 잡고 테이블에 놨다. 같이 자리에 앉았다. 피자를 열어 하나씩 집어 먹었다. 백지수가 우물거리는 모습을 마냥 바라봤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왤케 보냐?”
“그냥.”
“너 계속 나 보면 싸우자는 거로 간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기지 않아?”
백지수가 눈을 찌푸렸다.
“너 나 때리게?”
“아니 그건 아니죠.”
“그럼 맞기만 하세요.”
“그것도 부당한데.”
“아 말대꾸하지 마. 피자나 먹어.”
“네.”
계속 백지수를 보면서 피자를 먹었다. 백지수가 다시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맞을래?”
“볼 수도 있지 왜 과민반응해.”
“사람이 하지 말라면 걍 안 하는 거지 뭘 ‘그래도 대자나’ 이러냐, 짜증나게.”
“미안해.”
“... 아 빡쳐.”
미소지었다. 백지수가 나를 마주보면서 한 조각을 다 해치우고 맥주캔을 따 목을 젖혀 꿀꺽꿀꺽 마셨다. 나도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백지수가 갑자기 박수를 한 번 치고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그거 들여놨어.”
“뭐?”
“그 미용실에서 머리 감길 때 쓰는 그 기구 있잖아. 그거 1층 화장실 안에다가 설치해놨어.”
“굳이 화장실에?”
“왜, 화장실 쓸데없이 넓어서 공간활용 제대로 한 거구만.”
“으응...”
“암튼 너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면 나 머리 감겨줘야 됨.”
“알겠어.”
“이거 다 먹고 좀 쉰 다음에, 나 목욕하고 나서 시연할 거야.”
“아니 그럼 목욕할 때도 머리 감고 내려와서 바로 또 머리 감는 거야?”
“그게 왜. 그럼 목욕할 때는 머리 감지 말고 내려와서 감으라고?”
“그것도 약간 아닌데, 아니 그게 낫겠다 차라리.”
“그럼 나 목욕할 때 머리 안 감고 내려온다?”
“응.”
잡담을 해가며 피자랑 맥주를 먹어치웠다. 걱정을 제쳐둘 수 있게 배려해주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고민이 하나 늘었다. 백지수가 알았다면 등을 때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건데 뭘 또 걱정을 늘리냐고 질타할 일이었다. 이런 성질은 좀 고쳐야 할 텐데, 좀처럼 바꾸기 어려웠다. 약간 취기가 오른 듯한 백지수가 2층으로 올라갔다. 부축해줄까, 하고 물었지만 몸을 못 가누는 정도는 아니라고 답해와서 부축을 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옷을 챙기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로 앞에 샴푸 의자가 보여서 괜히 한번 물을 틀어보고 발걸이도 올렸다가 내려본 다음 빠르게 샤워했다. 옷을 입고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다음 다시 소파에 앉아 잿더미를 조심히 들어 허벅지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언제 만져도 감촉이 좋았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는 것 중에서 찾자면 여자의 가슴밖에는 없었다. 김세은의 가슴이 만지고 싶었다. 이렇게 섹스리스였던 적이 있었나, 괜히 울적해졌다.
고양이를 만지고 있으니 흰 티셔츠랑 분홍색 돌핀팬츠로 갈아입은 백지수가 내려왔다. 백지수가 나를 보고는 오른손 검지로 화장실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걸었다. 잿더미를 소파에 내려놓고 가볍게 뛰어 따라잡았다. 백지수가 안에 들어가 당연하다는 듯 샴푸 의자에 앉았다. 발걸이를 올렸다. 백지수가 오, 하고 소리를 냈다.
“너 이거 언제 써봤어?”
“나 목욕하기 전에 잠깐 봤지.”
“센스 있네.”
“감사합니다.”
“이제 머리나 감겨보세요.”
“네. 입이나 다물어주세요, 입에 물 튈지도 모르니까.”
백지수가 킥킥 웃었다.
“미친 놈.”
“이제 진짜 물 틀 거야.”
“응.”
백지수가 목을 편히 끼워넣고 눈을 감은 다음 입을 다물었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 기다란 속눈썹이 새삼스럽게 예뻤다. 혈기가 도는 연분홍빛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해보여서 한번 만져보고 싶기까지 했다. 하얀 목덜미랑 쇄골은 도화지처럼 보여서 군데군데에 키스마크를 남기고 싶었다. 선반에서 수건을 하나 챙겨와 목에 대충 걸친 다음 오른손으로 샤워기 헤드를 잡고 물을 틀어 왼손으로 온도를 느껴봤다. 차가웠다.
“차갑게 아님 따뜻하게?”
“따뜻한 거에 가까운 미지근함이요.”
“대충 적당하다 싶을 때 괜찮다고 말하세요.”
“네.”
내 기준으로 따뜻하다시피 미지근할 때 정수리 쪽에 물을 쏘았다.
“응. 지금 딱 괜찮아.”
“알겠어.”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훑고 뒤통수를 들기도 하고 오른손이랑 왼손을 바꿔 가며 감겨주었다. 어떻게 노력은 한다고 하는 거였는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찌 느껴질지 궁금했다.
“좋아?”
“으응... 좋아...”
말하고 나서도 조금 벌어져 있는 입술이 미치도록 야했다. 붉은 혓바닥 위에 자리한 어둠 속으로 눈이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듯했다. 샤워기를 내려놓고 얼굴을 붙잡은 채로 진득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뭐 해?”
넋놓고 입술만 보고 있다가 오른손에 든 샤워기는 오른쪽 옆머리에 물이 쏘아지도록 고정한 채 왼손을 안 움직여버렸다. 다시 양손을 움직였다.
“잠깐 멍 때렸어. 미안.”
“아마추어 같이 굴지 마세요.”
“저 아마추어인데요.”
“돈도 안 받고 머슴처럼 이것저것 시키는 거 해서 같이 살게 해주는 건데 직업적인 스탠스로 접근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면 프로라고 할 수 있잖아.”
“네에. 프로할게요 그럼.”
“아 왤케 띠껍지? 걍 내쫓을까?”
“잘못했어요.”
“진짜 딱 한번만 봐준다.”
“감사합니다.”
왼손으로 왼귀를 만지작거렸다.
“아흐읏...”
일부러 꼴리는 신음 소리를 내는 건가, 듣기에 너무 야했다.
“기분 좋아?”
“응... 좋아 이거...”
발기했다. 느낌상 존나 따먹어달라는 것 같았다. 샤워기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오른귀를 만지작거렸다.
“으흐음...”
“되게 좋나봐?”
“아 야 이거... 나 진짜 못 참아...”
백지수가 몸을 살짝 들썩였다. 움직임을 따라 커다란 가슴이 흔들렸다. 움켜쥐고 싶었다. 대신 오른귀를 만지작거렸다.
“뭘 못 참는다는 거야.”
“이거 마사지... 으응... 기분 좋아서...”
“기분 좋아서?”
손을 바꿔 왼손으로 왼귀를 만지작거렸다.
“많이 만져달라고... 미용실에서 가끔... 얘기하고 그래...”
“그럼 앞으로 머리 감겨줄 때 많이 만져줄까?”
“응... 좋아...”
“알겠어.”
샤워기를 끄고 헤드를 고정시킨 다음 양손으로 귀를 마사지해줬다. 백지수가 으음, 흐응, 하고 소리를 내면서 음미했다. 문득 아까 생각이 나서 보지 쪽을 흘깃 봤다. 아주 살짝 젖어있었다. 미친, 가려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나? 진짜 지독히도 음탕했다. 이 정도면 내가 이런 모습을 발견해서 따먹어주기만을 바라는 수준이었다. 더운 한숨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작게 심호흡했다.
“언제까지 해야 돼?”
“아 몰라...”
장난기가 들어서 기습적으로 손을 뗐다. 백지수가 왼눈만 뜨고 나를 노려봤다.
“끝내라고도 안 했는데 멈춰?”
“끝은 내주겠다는 거지?”
“어. 빨리 다시 해.”
“응.”
정성을 담아 양쪽 귀를 만졌다. 체감상 1분 정도가 지났을 때 백지수가 그만해도 돼, 라고 말했다. 1분 정도 더 해주고 수건으로 머리에 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발걸이를 다시 낮췄다.
“이제 일어나도 돼.”
“응.”
백지수가 몸을 일으키고 눈을 뜨더니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좀 맘에 든다?”
“고마워.”
백지수가 걸어 나가 헤어드라이기를 챙긴 다음 자기 방으로 가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드라이기 플러그를 꽂고 제일 세게 튼 다음 머리를 말려줬다. 백지수가 눈을 감고 내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긴 채로 입을 열었다.
“이거 맨날 시킬 거니까 각오해.”
“요리에 미용까지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안 하면 내쫓을 거야.”
“불합리하다 진짜. 가정주부도 이것보단 일 적게 해.”
“대신 너는 애가 없잖아.”
“그건 그렇네.”
“암튼. 맨날 이렇게 해야 돼?”
“어.”
머리를 다 말리고 백지수가 곧장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했다.
“나도 옆에 누워도 돼?”
백지수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같이 자게?”
“같이 자게 해줄 거야?”
“맘대로 해.”
“같이 자자.”
오른편에 누웠다. 폰을 잠깐 보다가 머리맡 오른편에 내려놓고 백지수를 뚫어져라 봤다. 백지수가 폰을 끄고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내려놨다. 커튼을 쳐놓아서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뭐.”
“1층에 잿더미 있는데 어떡해?”
“아 그렇네.”
“내보낼까?”
“아니. 걍 들고와서 침대 옆에 박스에다가 넣어줘.”
피식 웃었다.
“뭐야 그게.”
“싫음 내보내든가.”
“아니. 좋아.”
침대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가고 양손으로 잿더미를 조심히 들어 백지수 방으로 갔다. 박스 안으로 천천히 내려 안착시켰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 사이에 또 폰을 보던 백지수가 탁자에 도로 폰을 내려놓았다.
“잿더미 뭔가 우리 둘이 키우는 애기 같애.”
“뭐래 미친 놈이...”
“너 엄마되면 애기한테 되게 잘해줄 거 같아.”
백지수가 왼주먹을 내 가슴에 대고 밀어내듯이 했다.
“아 존나 개소리하지 마 갑자기...”
쿡쿡 웃었다.
“너 진짜 귀엽다.”
“... 너 진짜 적당히 해라.”
목소리가 살짝 싸늘했다.
“칭찬이잖아.”
“그만하라고. 낯간지러우니까.”
“그럼 내일은 해도 돼?”
백지수가 흐음, 하고 한숨 쉬었다. 오른볼이 꼬집혔다.
“아, 아파.”
“진짜?”
“진짜 아파.”
백지수가 꼬집은 걸 풀고 그대로 오른볼을 매만져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응.”
“그냥 약만 주면 안 돼?”
“네가 개소리만 자제하면 그래줄게.”
“난 진심인데 개소리라 하면 상처 받아.”
“계속 그러면 진짜 뒤져.”
“미안해.”
백지수의 손이 볼에서 떨어졌다. 뭔가 아쉬웠다.
“나 내일부터 뭐 해야 될까.”
“편히 쉬어. 뭐라도 해야겠음 봉사시간 채우고.”
“으응...”
“또 할 말 있어?”
“딱히.”
“너 지금 졸려?”
“약간? 너는?”
“졸려.”
“잘까?”
“자자.”
“응.”
“근데 나 안아주면 안 돼?”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백지수의 이불이 들린 건지 바람이 조금 불었다.
“드루와.”
눈 감고 품에 안겼다. 좋은 냄새가 나는 건 물론이고 느낌도 포근하고 따스해서 잠이 솔솔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