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경위 작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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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의고사니까 컴싸 준비해와라. 또 안 가져와서 친구나 선생님한테 빌릴 생각하지 말고. 이상. 온유는 나 따라와라.”
하회탈이 교실을 나갔다. 가방을 챙기고 뒤따랐다. 교무실로 갈 줄 알았는데 또 옥상으로 갔다. 하회탈이 운동장이 보이는 가드라인 쪽으로 가서 외투 오른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도로 오른 주머니에 넣은 다음 오른손 검지와 중지 첫째 마디로 담배를 집어 입에서 빼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다섯 시 되면 성연이 보러 갈 건데, 태워줄까?”
“성연이가 제가 가는 걸 좋아할까요.”
“가야지. 싸우고 바로 미안하다고 해야 감정 덜 상하는 거야. 그래야 선처도 받는 거고.”
“...”
“사람 마음이란 게 그래. 오해든 뭐든 한번 안 좋은 마음이 생기고 풀리는 거 없이 시간만 흐르면 악감정이 불어나기만 하고 그런다. 그 감정이 캐묵어버리고 나서 화해하려 들면 그때는 또 ‘얘가 나랑 진짜 화해하고 싶은 건가 아님 화해해야 돼서 이러는 건가’ 의심하게 되고, 그럼 절대 예전 같은 관계로는 못 돌아가는 거야.”
하회탈이 다시 담배를 빨고 연기를 뿜었다.
“안 가고 싶은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래.”
하회탈이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뿜으며 한숨 쉬었다.
“웬만하면 누구랑도 척지지 않는 편이 좋아. 언제 어떻게 얽힐지도 모르니까.”
“네.”
“왜 이리 걱정되는지 모르겠다 너는.”
“... 감사합니다.”
“뭐?”
하회탈이 피식 웃었다.
“감사하기는. 쯧.”
하회탈이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뿜더니 가드라인에 대충 문질러서 꺼뜨렸다.
“너희 둘 화해하고 사안조사 어떻게 잘만 하면, 학폭 전담기구에서 학폭위 안 열고 내 선에서 조치 취하는 거로 끝낼 수도 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화해시키려고 하는 거야 인마.”
하회탈이 왼손을 주먹 쥐고 중지를 뿔처럼 세워 내 이마에 대고 살짝 밀었다.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신기하게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내일이나 모레에 너 심층상담하고 뭐 조사하고 할 거다. 사실 사안조사할 것도 뭐 없잖냐? 빨리 진행되게 협조 좀 잘해라.”
“네.”
하회탈이 꽁초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 쪽으로 향했다. 뒤따랐다. 하회탈이 걸으면서 아, 하고 뭔가 까먹었던 것을 떠올린 사람이 낼 법한 소리를 내더니 내 쪽으로 고개만 돌리고 입을 열었다.
“네 새어머니한테 연락했다. 학교폭력 일어나면 바로 당사자들 부모님한테 학교폭력 발생했다고 사실 전달해야 돼 가지고.”
“네. 제 친어머니는 모르시죠?”
“그치. 따로 연락 안 했으니까.”
“네.”
“그리고 내일 네 새어머니 학교에 오신다 했다.”
“... 네.”
하회탈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또 네가 점심시간에 쓴 경위서 새 종이에 다시 써야 된다. 그거는 대충 정리하라고 이면지 준 거야. 경위서 말고도 써야 될 거 몇 개 있고. 시간 남지? 성연이 보러 가기 전에 쓰자.”
“네.”
하회탈을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다. 하회탈이 학생이 쓰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으라고 했다. 자리에 앉고 하회탈이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폰을 꺼냈다. 송선우에게 미안하다고, 그때 눈이 돌아가서 그랬다고, 맞은 데는 괜찮냐고 문자 보냈다. 또 내가 때렸지만 누군지 확인 못한 애가 누구였는지 알 법한 애들한테 문자를 보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폰을 왼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내 하회탈이 양식이 인쇄된 종이 여러 장이랑 0.7mm 볼펜을 주었다.
“쓸 수 있는 만큼 다 써라.”
“네.”
하회탈이 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한 거지만 오늘 업무가 끝나고 나서 병문안을 가는 듯했다. 가방에서 점심시간에 쓴 경위서를 꺼내 옆에 두고 오른손으로 볼펜을 잡아 빈 종이를 채워나갔다.
두드드, 왼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했다. 꺼내봤다. 송선우였다. 일어나서 교무실을 나오고 전화를 받았다.
ㅡ전화는 받으시네요 폭행범씨.
“미안해. 잘못했어.”
ㅡ입으로만?
“... 어떡해줄까?”
ㅡ몰라. 나중에 얘기할게. 근데 너 문자는 왜 안 봤어?
“나 사안조사 때문에 경위서랑 이것저것 쓰고 있어서.”
ㅡ으응... 그럼 지금 문자 봐봐.
“알겠어.”
전화는 연결한 채로 문자를 확인했다.
[괜찮아]
[근데 네가 때린 데 멍들었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와이셔츠를 반쯤 벗어 팔꿈치에 걸친 채 왼손 검지로 살구색 브라 왼쪽을 살짝 내려 멍 들어 있는 왼가슴을 드러낸 사진)]
[전치 2주 아님 3주 떼달라고 해서 학교 쉬려구 ㅋㅋ]
미쳤나? 유륜이라도 보였으면 어떡했으려고. 머리털이 쭈뼛 솟는 느낌이 들었다. 발기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위로 올려 감췄다.
ㅡ봤어?
“어... 어. 봤어.”
송선우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옥상을 향해 걸었다.
ㅡ나 진짜 아팠어 그때.
“... 미안해.”
ㅡ입으로만?
목이 바싹 말랐다.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괜히 가슴이 뜨거웠다. 한마디라도 받아치고 싶었다. 짧게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연고라도 발라줄까?”
ㅡ어?
당황했구나. 미소가 지어졌다. 옥상 문을 잡고 열었다.
ㅡ발라주고 싶어?
옥상문을 닫고 하회탈이 담배를 지진 자국이 많이 남은 의자를 왼손으로 툭툭 털어 앉았다.
“네가 원하면 발라줄게.”
ㅡ내가 아니라 네가 원하는 거 같은데?
“딱히.”
ㅡ솔직하게 말하면 바르게 해줄게.
“됐어, 내가 변태도 아니고.”
ㅡ어쭈, 그렇게 나오신다.
“너 진짜 2주 쉴 거야?”
ㅡ은근슬쩍 말 돌린다? 부끄러우세요?
“네.”
ㅡ너 좀 귀엽다?
“저 유교보이예요.”
ㅡ거짓말하지 마세요.
“무슨 거짓말이에요 제가 그렇다는데.”
ㅡ유교보이면 평소에 술도 안 마시고 여사친 자취방에서 자지도 않지.
“에이, 그건 아니죠.”
ㅡ암튼 너 방금도 연고 발라줄까 드립친 거 보면 유교보이 아니에요.
“그건 약간 반격의 의미에서 한 말이었어요.”
ㅡ반격이든 뭐든 유교보이는 그거 생각 못해요.
“네, 제가 졌습니다.”
ㅡ이겼는데 뭐 보상 없나요?
“뭐 원하시는데요?”
ㅡ지금은 없는데, 나중에 생기면 얘기할게요.
“나 슬슬 두려워지는데? 왜 이리 쌓아놔?”
ㅡ걍 내 맘. 암튼 기대해, 언젠가 써줄 테니까.
“무섭다 진심.”
ㅡ잡아먹진 않을게.
송선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ㅡ나 지금 병원이라서, 진료받으라고. 끊을게?
“응.”
전화가 끊겼다. 문자 앱을 켜 내가 때린 애들이 누구였는지 확인하고 장문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보냈다. 보내야 할 사람들에게 다 보내고 옥상에서 나와서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교무실로 갔다. 하회탈이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앞에 서서 내가 쓴 것을 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았다.
“너 어디 갔다 지금 오냐?”
하회탈이 여전히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저 잠깐 나가서 아까 때린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문자 보내고 연락했어요.”
“그래? 잘했네. 계속 쓰고, 이따 성연이 보러 가자.”
“네.”
하회탈이 종이를 내려놓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볼펜을 오른손에 쥐고 천천히 써내려갔다. 앞으로의 인생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면 결코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늘릴 수도 없어서 쓸 내용이 많지도 않았다.
하회탈이 다가와서 내 왼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섯 시 칠 분이다. 나가자.”
“네.”
“다 쓴 거는 나한테 주고.”
“알겠습니다.”
쓴 종이를 집고 위에 볼펜을 얹어서 건넸다.
“많이 썼네.”
“네.”
나머지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하회탈이 내게 받은 종이를 들고 가 책상에 있던 파란 서류 파일에 넣고 볼펜은 통에 꽂았다. 하회탈이 교무실을 나서면서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선생님들께서 화답해주시려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시길래 허리까지 살짝 숙여가며 목례했다. 같이 교무실을 나갔다. 하회탈이 외투 오른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가서 뭐라 할지는 생각해뒀냐?”
“생각은 해봤는데, 미안하다는 말 말고 따로 할 말이 안 떠오르더라구요.”
하회탈이 피식 웃었다.
“내가 이러저러 해서 심란했는데 네가 그 말을 하는 걸 듣는 순간 화가 나 가지고 너를 때렸다, 미안하다, 그렇게 말해야지. 나 전달법 모르냐?”
“교과서에서 봤던 거 같긴 해요.”
“있었어, 나 전달법. 뭔지 알고 있으면 그대로만 해.”
“네.”
“가는 길에 뭐 사과 같은 거나 살까?”
“좋아요. 제 돈으로 살게요.”
“그래. 타라.”
하회탈이 운전석 문을 열었다. 가방을 어깨에서 빼 왼손에 쥐고 조수석 문을 열어 올라탔다. 하회탈이 시동을 걸고 왼손에 든 폰을 보며 네비게이션으로 갈 곳을 지정했다.
“벨트 매라.”
“넵.”
벨트를 맸다. 차가 움직였다. 하회탈이 입을 열었다.
“너 과일 잘 깎냐?”
“네. 잘 깎아요.”
“다행이네.”
차가 방지턱을 지나 덜컹거렸다.
“요즘엔 연예인이 뭐 잘하는 거 있으면 그걸로 또 방송 나오고 그러더라. 요리라든가 운동이라든가... 너 뭐 잘하는 거 있냐?”
“취미로 요리 조금 해요.”
“그러냐.”
차가 신호에 걸렸다.
“넌 뭐 걱정 없겠다, 사건만 안 터지고 그러면.”
“안 뜰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넌 뜰 거 같애, 내가 보기에. 우리 학교 나온 애 중 제일로.”
“... 감사해요.”
하회탈이 살폿 미소지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학교 홍보나 해라. 나 은사님이라고 한번 언급해주고.”
“그건 당연히 해야죠.”
“그래. 고맙다 이 녀석아.”
함께 웃었다. 당장은 그 어떤 걱정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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