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경위 작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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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웠다. 가고 싶지 않았다. 옥상 밑에 있는 사람들은 강성연을 팬 것도 모자라 싸움을 말리려는 애들까지 때린 내게 하회탈처럼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였다. 하회탈이 내려가다 중간에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뭐 해? 내려와.”
“... 네.”
옥상을 나오며 문을 닫고 계단을 밟았다. 흘겨 보든 대놓고 보든 해서 따라붙는 시선은 많았지만 하회탈의 뒤를 따라가고 있어서 그런가 말을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하회탈이 교무실로 들어가고 문을 열어두었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고개만 집어넣었다. 어느새 뒤돌은 하회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지금 들어오면 안 될 거 같다. 그 평소 공실로 두는 작은 데 있잖아, 이름이 뭐였냐, 암튼 지금은 그 특목실로 가라. 아 그리고 잠깐만 밖에서 있어 봐라. 키 줄 테니까.”
“네.”
하회탈이 교무실 문을 닫았다. 창문 쪽으로 가 등을 기댔다. 이쪽을 보고 있던 서유은이 쭈뼛쭈뼛 내게 다가왔다.
“오빠... 진짜예요...? 성연 선배한테...”
“...응.”
“저 잘 몰라서 그러는데...왜... 그런 거예요...?”
“지금은 말 못 해줘. 쌤 곧 나온대.”
“앗, 넵...”
서유은이 총총 뛰어서 멀어졌다. 대충 열 발짝 떨어졌을 때 뒤돌아서는 나를 쳐다봤다.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교무실 문이 열렸다. 하회탈이 왼손에 특목실 열쇠랑 이면지 세 장이랑 0.7mm 볼펜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하회탈이 오른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고 다가왔다. 하회탈이 조용히 소리냈다.
“오늘 있던 일 계기부터 싸운 거까지 다 상세하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써. 지금 써둬야 나중에 진술하거나 할 때도 기억 잘 날 거다.”
“네.”
하회탈에게서 이면지, 볼펜, 열쇠를 건네받았다. 하회탈이 작게 미소짓고는 도로 교무실로 들어갔다. 특목실 쪽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누가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봤다. 서유은이 도도도 뛰어오고 있었다. 멈춰섰다. 옆에 온 서유은이 내 왼어깨를 잡고 몸을 숙여 헥헥댔다.
“하악... 선배, 보폭이 너무 큰 거 아녜요...?”
피식 웃었다. 웃으면 안 될 순간인데 왜 자꾸 웃음짓게 되는 건지.
“왜 또 선배야?”
“학... 선배가, 제 입에 붙었나 봐요...”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둘 다 듣기 좋으니까.”
서유은이 고개만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언니들이 왜, 하악... 오빠 조심하랬는지 알 거 같아요.”
“언니들? 누구?”
“밴드부 언니들이랑, 다요.”
숨이 더는 차오르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언니들이 하는 말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어요.”
고개 돌려 서유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너 그쪽으로 안 기울려면.”
“어, 어... 몰라요...”
서유은의 걸음이 느려지는 건지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서유은이 통통통 달려서 옆에 다시 따라붙었다.
“저 보폭 좀 맞춰주세요.”
“맞춰준 거였는데.”
“오빠 보폭이 너무 커서 맞춰주는 거로는 모자라요. 느리게 걸어요.”
“안 돼. 빨리 가야 돼.”
한바탕 싸운 놈이 복도에서 후배랑 노닥거리면서 걸어다니고 있었다는 누명을 쓰기는 싫었다. 열쇠를 꽂아 돌려 문을 열고 키를 뽑아 특목실 안으로 들어갔다. 특목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교복을 내려놓았다.
“저도 들어가도 돼요?”
서유은이 특목실에 고개만 집어넣고 말했다.
“어 들어와.”
서유은이 안에 들어오고 문을 닫았다. 문을 잠갔다. 서유은이 한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도로 안색을 감췄다. 파란색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방이 어두웠다. 서유은이 창가 쪽의 약간 낮은 테이블 앞에 있는 2인용 카우치에 털썩 앉았다.
“여기 좋아요.”
“왜?”
오른손으로 커튼을 걷어냈다. 햇살이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공간 같아서요. 문에 달린 창에 왠진 몰라도 종이도 붙어있구.”
“그렇네. 옆에 앉아도 돼?”
“네? 네... 앉아도 돼요...”
서유은이 오른쪽으로 더 엉덩이를 옮겼다. 편하게 왼편에 앉아 종이랑 펜이랑 키를 내려놓았다.
“근데 반대편에도 소파 있는데 왜 옆에 앉으신 거예요...?”
“햇빛이 이쪽으로 와 가지고. 반대편 가도 되는데, 옮길까?”
“아, 아뇨. 괜찮아요. 죄송해요.”
“부담되면 얘기해.”
“아뇨 괜찮아요. 부담 안 돼요.”
“진짜?”
“... 사실 부담은 사알짝 되거든요...?”
“그럼 안 되지. 미안해.”
일어섰다. 서유은이 갑자기 양손으로 내 오른 손목을 붙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아, 아뇨. 옮길 거면 제가 옮겨야죠. 저 진짜 괜찮은데...”
피식 웃었다.
“고마워.”
도로 앉았다. 서유은이 두 손을 놓고 다소곳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 어색해 하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마냥 귀여웠다. 쓸 내용을 머릿속으로 잠깐 정리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여동생인 이수아가 생겼고, 이수아 썸남이 양아치인 걸 알고 이수아랑 상의도 없이 남자친구인 척을 해서 이수아의 평판을 망쳐 앙심을 사버렸고, 월요일에 이수아가 학교에 와 내가 자기를 버린 전남자친구인 척 연기했고, 다음날 강성연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것을 양치도구를 가지러 갔을 때 우연히 듣게 되고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날렸다. 볼펜을 들고 이면지를 차차 채워나갔다.
“뭐 쓰시는 거예요?”
“나 싸웠다고 했잖아, 그거 경위 쓰는 거야.”
“아... 쓰시는 거 저 봐도 돼요...?”
“안 되는데.”
“앗... 너무 단호하신 거 아니에요...?”
웃겼다.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장난이야. 봐도 돼.”
“한 장 다 쓰고 주시면 그때 읽을게요. 방해되면 안 되니까.”
“응. 고마워.”
“아뇨 제가 감사하죠.”
서유은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쓰는 데 화가 막 치솟지는 않았다. 쓰다가 감정이 차올라서 내용이 편협해질 것 같았는데 그렇게 쓰고 있다는 느낌이 딱히 들지 않았다. 이면지를 빠르게 채워나가고 있으니 서유은이 말을 걸어오지도 않아서 집중까지 잘 됐다. 고마웠다. 두드드, 바지 왼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했다. 상체를 세우고 왼손으로 폰을 꺼내봤다. 백지수였다.
“누구예요?”
“백지수. 받을게?”
“넵.”
통화를 연결했다. 귀 가까이에 대기도 전에 백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어딨어?
“왜 그리 다급하세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ㅡ넌 되게 태평한 거 같다?
“아냐. 너무 충격 받아서 오히려 평정 찾은 거야.”
ㅡ됐고, 어딨는데?
“나 특목실. 되게 작은 데.”
ㅡ그렇게 말함 내가 알아들어? 아니다. 알겠어. 갈게. 가도 돼?
“응.”
ㅡ끊어.
전화가 끊겼다. 끊으라면서 자기가 끊어버리는 건 또 뭘까.
“뭐예요...?”
“지수 지금 온다는데?”
“네...? 왜요...?”
“모르겠어.”
일어서서 문손잡이를 돌려 잠갔던 문을 도로 열어뒀다. 다시 자리에 앉아 이면지 한 장을 다 써내리고 다음 장을 쓰기 시작했다.
“저 읽어도 돼요?”
“응.”
서유은이 첫번째 종이를 집어들었다. 반응이 궁금해서 펜을 잡은 상태로 고개만 돌려서 서유은의 표정을 살폈다. 서유은이 입술을 모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가, 다음엔 얼굴을 찡그렸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흐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문 쪽에서 빛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누군가 봤다. 백지수였다.
“뭐야?”
백지수가 안에 들어와서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오른손으로 문을 닫고 바로 잠근 다음 오른쪽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백지수가 다가왔다. 서유은이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백지수를 쳐다봤다.
“언니이...”
“... 왜 그래? 얘가 뭐 했어?”
백지수가 나랑 마주보는 반대편에 앉았다.
“아뇨오... 그냥... 해인이라는 남자애 엄청 나빴어요... 아니 완전 쓰레기예요...”
백지수가 테이블에 있는 종이를 봤다가 서유은을 바라봤다.
“얘가 상황 그 종이에다가 쓴 거야?”
“네에...”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나도 볼래.”
“응. 봐.”
백지수가 손을 뻗었다. 서유은이 팔을 굽히고 몸을 움츠려 종이를 사수하는 몸짓을 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과하다 싶었는지 도로 두 팔을 내밀었다. 두 눈꼬리가 축 쳐져서 슬퍼보였다.
“저 근데 아직 다 안 읽었어요...”
“그럼 다 읽고 줘.”
“넹.”
서유은이 다시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너 근데 왜 유은이 옆에 앉아있어?”
“글 써야 되는데 햇빛이 이쪽으로 들어와서.”
“걍 첨부터 불 켰음 됐잖아.”
“그러게.”
“미련한 새끼.”
“욕은 좀 심했다.”
“그건 죄송.”
“받아드림.”
왼팔을 테이블에 대고 나머지를 이어서 써내려갔다. 두 번째 이면지의 2/3 정도를 채웠을 때 서유은이 백지수에게 종이를 넘겨줬다. 주욱 쓰다가 마침표를 한 번 찍고 백지수를 흘깃 쳐다봤다. 백지수가 아무 소리도 안 내고 눈을 빠르게 굴리며 읽고 있었다. 세 번째 종이를 잡고 글을 써내렸다. 서유은이 당연하다는 듯 두 번째 글을 집어들고 읽었다. 백지수가 첫 번째 종이를 내려놓았다. 고개 들어 백지수를 쳐다봤다.
“뭐 할 말 있어?”
“너 글 마저 써야 되는 거 아냐?”
“기다려주게?”
“어.”
“고마워.”
백지수가 팔짱을 껴 가슴 위에 얹고 소파에 등을 묻었다.
“빨리 쓰기나 해.”
“응.”
미소가 지어질 듯했다. 옥상에서 내려가기 전에는 내 편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 기뻐서 웃으면 안 되는 타이밍인데도 절로 웃음기가 올라왔다. 입술을 입안에 넣고 깨문 다음 왼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머지를 이어서 써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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