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이수아가 좋아하는 음식
* * *
“나가.”
이수아가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일어서고는 말했다. 양쪽 브라 끈이 어깨에서 밀려 나서 윗가슴이 보였다. 왼가슴은 분홍빛 유륜까지 살짝 보였다. 이수아가 몸을 밀착할 때부터 발기해 있었던 게 다행 아닌 다행이었다.
“나 지금 다리 저려서 바로는 못 나가. 미안해.”
“풀리면 바로 나가.”
이수아가 브라 끈을 도로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응.”
상체를 일으켜 양손으로 저린 부분을 열심히 주물렀다. 조금 나아졌을 때 일어나서 방을 나왔다. 주방에 윤가영이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었다. 괴롭히지 않겠다고 방금 이수아한테 약속했으니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뭐 해요?”
“응?”
윤가영이 놀란 표정을 짓고 나를 쳐다봤다. 최근에 내가 다시 윤가영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해서 윤가영은 나를 의식하는 티를 내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아마 그러는 게 나한테 덜 밉보일 방법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정답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내가 또 아는 체를 하니 윤가영으로서는 놀라울 만도 했다.
“어, 나 저녁 뭐 만들까 고민하고 있었어.”
“만드는 거 도와줄까요?”
윤가영이 화색을 뗬다.
“그래 주면 고맙지!”
“수아 뭐 좋아해요?”
“수아는 육류 되게 좋아해. 어류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연어 같은 거는 잘 먹어. 아, 장어를 못 먹어. 식감이 별로라더라구.”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뭔데요?”
“그냥 남들 다 좋아하는 거 좋아해 해. 떡볶이나 치킨이나 그런 거.”
“그럼 가라아게에 떡볶이나 할까요?”
“응? 응. 좋아.”
윤가영이 헤헤 미소 지었다. 봐도 봐도 밝은 사람이었다. 솔직히 사랑스러웠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닭고기부터 재워야겠네요?”
“응. 그치. 닭다리살 냉장고에 있거든?”
윤가영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 나서 넘어갈 듯했다. 오른손으로 잡고는 뒤로 밀었다. 무릎을 피다가 만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윤가영이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미안.”
“괜찮아요.”
의욕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려서 그러는 건지. 여태 봐온 바로는 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영 적응이 안 됐다. 나랑 정반대로 너무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닭다리살을 꺼냈다. 칼을 찾아 포장을 그어 오른손으로 뜯어 낸 다음 찬물에 씻어 헹궜다. 물을 버리고 한 줌씩 쥐어서 두어 번 털어 주고 키친타올로 물기를 대충 없애준 다음 나무 도마에 다리살을 올렸다. 대충 두 입이면 먹을 수 있을 크기로 잘랐다. 보울에 다리살을 투하한 다음 간장, 청주, 설탕, 후추, 다진 마늘, 생강 파우더를 넣고 주물러준 뒤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었다. 이제 적어도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싱크대에서 도마를 씻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음, 저기 있는 재료 손질 좀 해 줄래?”
윤가영이 오른손 검지로 양파가 있는 쪽을 가리키고 빙 돌렸다.
“네.”
양파 먼저 자르고 도마를 들고 윤가영의 옆에 갔다.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샴푸 향기가 풍겨 왔다. 윤가영이 미소 짓고는 프라이팬을 들어서 내밀었다.
“온유는 진짜 너무 센스 있다, 단순히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혹했다. 뜬금없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윤가영의 무기는 미소였다. 윤가영은 이 미소와 밝음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쉬이 사고 여러 일에 도움을 받아가며 살았을 것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그게 이해타산적인 사고를 거쳐서 하는 게 아니라 본능에 가깝게 이뤄진다는 거였다. 아버지가 계산적으로 미소라는 표정을 걸치는 것과는 크게 대비됐다. 어쩌면 아버지는 윤가영의 이런 순수함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도 몰랐다. 칼로 양파를 프라이팬으로 밀어 넣고 도로 물러났다. 베이컨, 어묵, 소시지를 한 입 크기로 자르고 양파를 볶고 있는 윤가영의 옆으로 갔다.
“넣어요?”
“응. 넣어줘.”
발기했다. 존나 미쳤나? 칼로 재료를 밀어 넣고 물러나 도마랑 칼을 내려놓은 다음 자지를 위로 올렸다. 죽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했다. 전분가루랑 밀가루를 꺼내 비닐봉지에 1대1 비율로 넣어 끄트머리를 모아서 잡아 흔들어 섞어줬다. 윤가영이 소스를 들이부으며 떡볶이를 만들어가는 것을 흘깃 보고 커피 그라인더 앞으로 가 원두를 갈았다. 포터필터에 가루를 담고 템퍼로 눌러 담았다.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아일랜드랑 테이블도 깨끗이 닦았다. 더 할 게 없어서 괜히 윤가영의 옆으로 가서 프라이팬을 봤다. 로제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윤가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뭐 더 도와줄 거 없어요?”
“응. 다 됐어. 고마워, 요리 도와줘서.”
“네.”
윤가영이 나무 주걱으로 떡볶이를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온유는 진짜 멋있는 거 같애. 목소리 좋아, 노래 잘해, 요리 잘해, 잘 생겼어, 진짜 다 그냥 흠 잡을 데가 없어.”
“...”
“수아가 너 같은 애를 만나야 되는데...”
왠지 가슴이 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죄악감을 느낄 때랑 비슷한 감각이었다.
“수아가 들음 기겁할 걸요.”
“왜? 수아가 너 막 싫어하지는 않을 건데...”
“뭔 소리예요.”
“그냥 말 그대로. 싫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너 좋아할 걸?”
혼란스러웠다. 이전에는 몰라도 최근 들어서는 주욱 개새끼였는데.
“저 좋아하는 눈치라고요? 요즘으로 따졌을 때?”
“응.”
윤가영이 숟가락으로 소스를 퍼 후후 분 다음 입에 넣었다. 어떻게 이수아가 내게 호감이 있다고 하는 걸까. 아님 그냥 립서비스인가? 알 수 없었다.
“내가 수아였어도 너 같은 오빠 생겼음 싫어하지는 못 했을 걸? 너도 소스 한 입 먹어볼래?”
“... 네.”
숟가락을 가져와 한번 퍼서 맛을 봤다. 적당히 달고 살짝 매웠다. 이수아 입맛에 맞춘 듯했다.
“맛있네요.”
“그래? 다행이다.”
윤가영이 배시시 웃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싱크대에서 숟가락을 닦아냈다. 냉장고에서 닭다리살을 재워둔 보울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랩을 벗겼다. 냄비에 기름을 붓고 인덕션 위에 올렸다. 전분이랑 밀가루를 섞어 튀김 가루를 만든 봉지를 가져와 다리살을 조금씩 넣고 흔들어 섞어 흰 접시에 차차 옮겼다. 가루가 고기에 달라붙고 기름 온도가 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적외선 온도계로 177도인 것을 확인하고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기름에 살살 흔들어 주면서 떨어뜨렸다. 젓가락으로 살짝 휘저어 보다가 뒤로 돌아가서 포터필터를 에스프레소 머신에 연결했다. 다시 냄비 앞에 가 가라아게 하나를 건져 내 빛깔을 확인했다. 윤가영이 감탄했다.
“벌써 맛있어 보인다 온유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미소지어 보였다. 어머니를 배신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마냥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난 이제 끓이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커피 만들까?”
“그래 주면 좋죠.”
“알겠어. 카페라떼?”
“네.”
“나도 카페라떼 마셔야지.”
윤가영이 인덕션 온도를 조금 낮추고 에스프레소 머신 쪽으로 갔다. 가라아게에 더 색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채에 건져 내 다른 접시에 올려 두었다. 채로 건더기를 건져 내주고 접시에 놓아서 식힌 가라아게를 2차로 투하했다. 갈색이 도드라졌을 때 채에 건져 올렸다. 기름이 떨어지게 한 다음 넓은 흰 접시에 옮겨담았다. 윤가영 쪽을 봤다. 윤가영이 유리로 된 8 온스짜리 에스프레소 샷잔에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었다. 큰 그릇을 꺼내 프라이팬에 있는 로제 떡볶이를 옮겨담고 가라아게 접시 옆에 두었다. 윤가영이 오른손에 에스프레소 샷잔을 들고 다가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향이 향긋했다. 윤가영이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나부끼면서 샴푸향이 올라왔다.
“우리 하나씩 먹어볼까?”
“그러죠.”
윤가영이 젓가락을 가져와서 가라아게를 하나 집고 떡볶이 국물에 찍고는 왼손으로 밑을 받치고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빨리.”
국물 한 방울이 윤가영의 왼손으로 떨어졌다. 윤가영의 눈이 서글퍼졌다.
“아 뜨거... 빨리이...”
입을 벌려 덥석 물었다.
“어때?”
씹으면서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네요, 떡볶이 소스.”
윤가영이 눈웃음 짓고는 왼손에 떨어진 떡볶이 국물을 핥았다. 왠지 모르게 야하게 느껴졌다. 혀가 길어서 그런 건가, 아주 잠깐 살짝만 내민 것만 봤는데도 혀가 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면 얼마나 긴 걸까. 김세은보다 더 길까? 궁금했다. 윤가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윤가영이 가라아게를 하나 집고 떡볶이에 푸욱 담근 다음 몸을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대서 덥석 물었다. 입가 왼쪽으로 국물이 조금 흘러내렸다. 윤가영이 막 우물거리면서 음음, 하고 소리를 내고는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다. 가라아게.”
미소지어 답을 대신했다. 죄악감이 올라왔다.
“수아 데려올까요?”
“응. 난 라떼 만들고 있을게.”
“네.”
주방에서 나와 이수아 방 앞으로 가 노크했다.
“저녁 먹자 수아야.”
“나가.”
곧 이수아가 나왔다. 흰 브라탑에 분홍 돌핀 팬츠 차림이었다. 뭐라 한마디해야 하나 고민됐다. 그냥 입을 다물고 같이 주방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윤가영이 이수아를 쳐다봤다. 이수아가 윤가영 옆 자리에 앉았다. 반대편 의자에 가 앉았다.
“수아야... 옷차림이 너무 야한 거 아니니...?”
“사람들 운동할 때 이렇게 자주 입어.”
“아니 그래두, 네 오빠도 있는데...”
“오빠니까 더 상관없지 않아?”
“그래두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아냐 괜찮아 엄마.”
이수아가 젓가락을 들어 가라아게를 집고 떡볶이에 찍어 먹었다. 이수아가 왼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맛있다. 누가 만든 거야?”
“떡볶이는 엄마가 만들었고 가라아게는 온유가 만들었어.”
“으응.”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이제 어떡할 거야 오빠?”
“뭘?”
“나 책임져줘야 되지 않아?”
뭔 소리야 이건 또. 와중에 또 한심하게 발기하고 말았다. 윤가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뭔 소리야? 아니 둘이 설마...”
“아니에요.”
내가 답했다. 이수아가 고개 돌려 윤가영을 바라봤다.
“엄마 뭔 생각한 거야?”
“아니... 그냥, 둘이 사귀나...? 그래서 그런 것도 한 건... 가...? 그런...?”
이수아가 살포시 웃었다.
“반쯤은 사귀는 거 맞아.”
윤가영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 올랐다.
“언제부터...? 아니 그리고 반쯤 사귄다는 건 무슨 의미야...?”
“내 주변 애들이 다 나랑 오빠랑 사귀는 줄 알아. 오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사귀지도 않는데.”
“아 그런 의미였어... 근데 왜 너희가 사귀는 줄 안다는 거야...?”
“엄마 재혼했다는 거 주변에 안 알려서.”
이수아가 떡을 하나 집고 입에 넣었다.
“근데 오빠가 저번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내 남자친구라도 되는 척해 가지고 애들이 다 그런 줄 알아. 나도 이번에 오빠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했고.”
윤가영이 혼란스러운 듯 표정 관리를 못 했다.
“그냥 그러려니 해 엄마.”
“어... 알겠어...”
이수아가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일단 사실대로 말해야지. 너랑 나랑 의남매라고. 학교는 내가 더 늦게 끝나니까 내가 아침에 네 학교로 가거나 해서.”
“그다음은?”
“김해인 때문에 내가 남자친구인 척 좀 했다고 하는 거지. 김해인이랑 거리 좀 두려고.”
“애들이 그걸 믿겠어?”
“동정을 사야지. 김해인이 지금 너한테 하는 쓰레기짓 어필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하는 식으로. 김해인이 너한테 전화 걸고 내가 받았을 때 얘기부터 하면서. 그런 놈인 걸 알아서 사귀고 싶지도 않아졌고, 그나마 믿을 만한 아는 남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게 안 되면?”
“될 거야 아마.”
목이 탔다.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소수는 너 계속 깔지도 모르지. 그마저도 여론 너한테 기울여지면 사라질 거고. 근데 만약 그런 애 중에 진짜 맘에 안 드는 애 있음 나한테 말해. 억지로 너 까는 걸 텐데,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 응. 오빠는 어떡해?”
“난 내가 알아서 할게.”
“난 암것도 안 해도 돼?”
“응. 내가 치워야지, 원래 내 잘못인데.”
“... 미안한데 무슨 사정인지 제대로 알려줄 수 있어...?”
윤가영이 말했다. 입을 열었다.
“수아는 저 때문에 학교에서 어장관리녀로 찍혔고요, 저는 인성 쓰레기 먹버남으로 됐어요.”
윤가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젓가락으로 가라아게랑 떡볶이 떡 하나를 같이 집어 먹었다. 바삭하고 쫄깃하면서 맵고 짭조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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