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대체
* * *
“이온유 일루 와.”
정이슬이 자기 옆에 있는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가가면서 입을 열었다.
“거기 꼭 앉아야 돼요?”
“어. 나 할 말 있어.”
“또 뭐 이상한 고백 같은 거 아니죠?”
“아냐 그런 거.”
“한 번만 믿어드릴게요.”
정이슬 옆에 앉았다. 부원들이 정이슬과 나를 둘러쌌다. 정이슬이 고개를 쳐들어 양옆을 돌아봤다.
“뭐야 왜 둘러싸?”
“걍 노래 안 하는 타이밍이니까 같이 얘기하려는 거지.”
김민우가 답했다.
“으응.”
정이슬이 고개를 내려 다시 나를 바라봤다.
“온유야.”
왜 이름만 불렀는데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네.”
“너 우리 아빠랑 만난 적 있던 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뭔 소리지? 뒷목이 따끔했다. 김민우가 쏘아보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 진짜 무슨 소리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누나?”
정이슬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 입 다문 채 나를 응시했다.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얘기해요 누나.”
“얘기는 네가 해야지.”
“재미 없어요.”
“그니까. 빨리 얘기해봐.”
김민우가 말했다. 정이슬이 김민우를 쳐다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너 진짜 기억 못 해?”
“네. 저 진짜 누나 아버지 뵌 기억이 전혀 없어요.”
“진짜 나빴다... 우리 아빠가 너 되게 좋게 봤는데 넌 기억도 못 하고...”
날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건가? 슬슬 무서워졌다. 김민우한테 뒤통수를 처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너 저번에 택시 탔을 때 기사님한테 번호 준 적 있지.”
정이슬이 말했다. 기억을 되짚었다. 그런 적이 있긴 있었다. 김세은이랑 저녁 먹고 영화 본 다음 섹스 좀 하고 나서 집에 돌아갈 때 택시를 탔는데, 붙임성이 좋은 기사 아저씨가 차녀 얘기를 꺼내며 번호 좀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때 실제로 줬고.
“네 있었어요.”
“그때 그 기사님이 우리 아빠야.”
“아, 그랬어요?”
“응. 닮았다는 생각 한 번도 안 들었어?”
정이슬이 생글생글 웃었다. 확실히 붙임성이나 성격 같은 면이 닮은 듯했다. 외모도 뜯어보면 물려받은 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이제 보니까 닮긴 했네요.”
“그치.”
“누나가 유전자로 좋은 점만 물려받았나봐요, 그래서 바로 연결 못 했던 거 같아요.”
정이슬이 2초 정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운 다음 김현우를 쳐다봤다.
“봐봐! 얘 나 홀린다니까?”
김현우가 팔짱을 꼈다.
“없진 않네.”
“없진 않은 게 아니라 그냥 나 꼬신다니까?”
“그건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그러는 게 꼬시는 게 아니면 내가 너한테 하는 것도 그냥 애교밖에 안 되는 거야.”
“누나 자꾸 그럼 저 억울해요.”
정이슬이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나 진짜 억울해애...”
정이슬이 눈을 뜨고 김민우를 쳐다봤다.
“김민우. 얘 나 꼬시는 거 맞지 않아?”
조금 무서웠다. 고개를 돌려봤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김민우가 입을 열었다.
“그냥 온유는 이러는 게 습관인 거 같애.”
“어. 약간 그런 느낌 있어.”
김현우가 맞장구쳤다.
“평소에 말을 걍 존나 예쁘게 하잖아.”
“아니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도끼병 걸린 거 같잖아.”
정이슬이 말했다.
“애들 왔다.”
김현우가 문 쪽을 보고 말했다.
“왜 모여있어요?”
송선우가 의자를 갖고 와서 자연스럽게 나랑 마주보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걍 토크 타임.”
정이슬이 답했다. 백지수가 살짝 다리를 벌리고 송선우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송선우가 백지수의 허리를 감싸안고 왼어깨에 턱을 얹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는데요?”
송선우가 물었다.
“선우야. 네가 보기에 나 도끼병이야?”
정이슬이 대뜸 물었다.
“네? 갑자기요?”
“아니 그냥 일단 말해줘.”
“글쎄요? 아닌 거 같은데?”
“지수 네가 보기에는 어때?”
“도끼병은 막 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녜요? 그럼 아닌 거 같은데?”
“그치.”
“네. 근데 왜요?”
“이온유가 나 막 꼬셔 가지고, 그 얘기하고 있었어.”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송선우랑 백지수가 나를 노려봤다. 백지수가 정이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얘가 뭐 했는데요?”
“그냥 평소에 말하는 거가 그래서.”
“그거 그냥 얘가 무지성으로 던지는 거라서 신경 쓰면 안 돼요.”
“그래? 근데 지수 너 많이 당해본 거 같다?”
“당한 건 아니고요. 아니 당한 거 맞아요.”
백지수가 나를 쏘아봤다.
“지금 저 마녀사냥하는 자리예요?”
“아니 넌 마녀는 아니지.”
정이슬이 말했다.
“인큐버스 정도로 할까? 여자 홀리니까?”
힘들었다.
“누나 나 숨 막혀요.”
“아... 진짜 이거 봐아...”
정이슬이 막 고개를 돌리며 부원들과 눈을 마주쳤다.
“얘 진짜 나 미치게 한다니까?”
“네가 미친 것도 있는 듯.”
김민우가 말했다.
“아니 내가 미친 거라고 쳐도 온유 말하는 게 말도 안 된다니까?”
“됐어. 아까 그 얘기나 더 해봐.”
“뭔 얘기?”
“네 아버지랑 온유 만났다는 거.”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송선우가 물었다.
“아, 온유가 접때 우리 아빠가 모는 택시 탄 적 있는데 그때 우리 아빠가 온유 번호 땄거든. 그래서 그랬던 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냐고 아까 물어봤어.”
송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얘기를 왜 안 했대요?”
“내가 너무 예쁘게 태어나서 나랑 아빠를 연결을 못 했대.”
송선우가 나를 봤다.
“거 참 대단하네요.”
“저 그렇게 말 안 했잖아요 누나...”
“그게 그 뜻이잖아.”
“원래 뭐라 말했는데?”
“유전자로 좋은 점만 물려받았나봐요, 라고 했는데.”
“그게 그거지. 아니 그게 더 그거야.”
“그치? 역시 선우가 내 맘 알아준다니까.”
“이온유 얘는 그냥 진짜 표현의 자유 박탈시켜야 돼요.”
백지수가 말했다. 정이슬이 웃었다.
“지수 많이 시달렸나보다. 그냥 포기하고 지수 줘야 되나?”
“제가 소유물이에요 넘겨 주게?”
“어차피 못 가질 거라면 내가 선심 써서 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어?”
“...”
“아니다. 맘 바꼈어. 안 줄래.”
김현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갑자기 무슨 심경 변화가 있던 겁니까.”
“온유가 나 가만히 보는 거 보니까 갑자기 그냥 주기 싫어졌어.”
“난장판이구만.”
“무슨 얘기해요?”
손정우가 어느새 내 뒤로 와서 물었다.
“지금 이온유 청문회하고 있어.”
정이슬이 말했다.
“네? 왜요?”
“이온유가 무지성으로 여자 홀리고 다녀 가지고.”
어지러웠다. 말로 두드려 맞으면서 점심 시간이 지나갔다. 웃으며 떠들었지만 기류가 이상한 순간이 조금 있었다. 앞으로 이런 게 반복되면 그땐 진짜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두려웠다. 교실로 돌아갔다. 강성연이랑 눈이 마주쳤다. 강성연이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얘는 부실에 안 왔다. 웃음을 감추고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했다.
*
“모레가 모의고사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다 찍고 자지 마라. 옛날에는 다 자기 돈 주고 하던 건데 요즘은 공짜로 해서 그런가 대충 일자로 찍고 하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이게 공짜가 아니라 다 너희 부모님 세금으로 되는 거예요. 그니까 소중한 줄 좀 알고 진지하게 임하세요. 아니 밖이 왜 이리 어수선해?”
담임 하회탈이 기나긴 종례를 하다가 말고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뭐 한다고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다 흩어져, 여기 있지 말고.”
애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남는 애도 있었다. 하회탈이 팔짱을 꼈다.
“다 갈 때까지 종례 안 끝낼 거다.”
애들이 다 다른 반에 들어가거나 해서 사라졌다. 하회탈이 문을 닫았다.
“아이고, 쟤들 때문에 할 말 다 까먹었네. 모레 모의고사니까 컴퓨터 사인펜 다 오늘 미리 필통에 챙겨두고. 요즘 자는 애들 많다고 귀에 들어오는데, 밤새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가 학교 와서 엎어지지 말고 집에서는 자세요. 어정쩡하게 집에서 공부한다고 하고 나서 또 쉰다고 침대에서 핸드폰 하다가 수면 패턴 망가뜨리는 게 진짜 최악이야. 그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는 쉬어. 공부하는 공간이랑 쉬는 공간을 정확히 분리해두는 게 제일로 좋다. 오늘 주번 이온유지? 반 청소하고. 이상.”
하회탈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을 나갔다. 반 청소를 하고 가방을 멘 다음 교실을 나섰다. 연청 반바지에 검은 브라가 비쳐 보이는 흰 민소매랑 베이지 크롭 카디건을 걸친 이수아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수아? 왜? 이수아가 나를 보고는 도도도도 달려와서 와락 안겼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멍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이쪽을 보는 시선이 많았다. 두 손을 등 뒤쪽으로 해 이수아의 팔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 이수아가 더 꼬옥 안겨왔다. 아 진짜 씨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나 버린 거야...?”
이수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엉엉 울 듯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 년이. 딱 마주쳤을 땐 아는 척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는데 그걸 고민했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야 이수아.”
“나 따먹을 대로 따먹었다고 버리는 거야...? 그래도 돼...? 나 대신 누가 생겨서 그러는 거야...?”
이수아가 내 품에 안겨오며 다리를 비벼댔다. 발기했다. 미칠 것 같았다. 종례 때 왜 애들이 모였는가 했는데 얘 때문이었던 듯했다.
“놓고 말해.”
날 이상하게 보는 시선들. 그 속에 담긴 역겨움. 세상이 빙빙 돌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이러는 건데. 차오르는 욕지기.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아니 진짜 왜 그러는데. 이수아가 울기 시작했다. 이수아가 윽, 끅, 거리면서 몸을 들썩일 때마다 내 가슴팍이 젖었다. 나 버리지 마... 뭔 개소리야. 내 보지, 끅, 맛있다면서어... 근데에, 흑, 왜 버린 거야아... 혼미했다. 미쳤냐? 오빠아... 윽, 나 버리지 마아... 이수아의 양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이수아. 읍, 끅. 이수아! 이수아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으흐으응... 왜 그러냐고! 뭔 소란이야? 하회탈 목소리였다. 몰라요. 이온유랑 다른 학교 여자애랑...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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