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고백으로 혼난 백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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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이 울렸다. 바로 오른팔을 뻗어 알람을 껐다. 피곤했다. 어제 정이슬한테 끌려다니듯 해버린 탓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행선지를 정해서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빠르게 걷는 건 기본이고 무슨 연애 초기의 애인처럼 자꾸 붙어댔다. 심지어는 내가 떨어지라고 했을 때, 내 브라랑 팬티랑 맨살도 다 봐놓고서 그래도 돼, 이미 볼 장 다 봤다고 팽하는 거야, 같은 소리를 해대서 애들한테 거짓말이라고 둘러대느라 진짜 어질어질했다. 송선우가 없었으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됐을 수준으로 막무가내였다.11시 알람을 새로 만들고 도로 눈 감았다. 또 알람이 울렸다. 폰을 봤는데 11시였다. 미친, 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세수하고 폰을 봤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하나 와 있었다. 왠지 모르게 궁금해져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세 번 정도 갔을 때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이온유.
백지수 목소리였다.
“폰 바꾸셨어요 백수씨?”
ㅡ아니.
“그럼 이건 뭐예요?”
ㅡ그냥 세컨드 폰이요.
“으응. 근데 아까 10시 37분에 전화는 왜 거셨어요? 굳이 그 폰으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대뜸 한숨이세요?”
ㅡ아니 나 지금 존나 심란해 가지고. 너 점심은 먹었어?
“아니. 방금 일어났는데?”
ㅡ야 그럼 내가 점심 살 테니까 함 와봐.
“네 자취방으로?”
ㅡ아니. 나 버거랑 치킨 좀 먹어야 될 거 같으니까 KFC로 와.
피식 웃었다.
“언제까지 가면 돼?”
ㅡ12시까지 올 수 있어?
“좀 빡빡한데.”
ㅡ올 수 있다는 거지? 걍 와.
“그러지 말고 그냥 그거 포장한 다음에 네 별장에서 먹으면 안 돼?”
ㅡ그럼 나 안 나갈 거니까 네가 갖고 와.
“완전 부려 먹네?”
ㅡ너는 나한테 존나 신세져놓고 이런 쉬운 심부름도 안 하시겠다?
“당연히 할 거예요. 개처럼 부려주세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ㅡ빨리 와.
“응. 메뉴 톡으로 보내놔.”
ㅡ어 고마워.
“예. 끊을게요?”
ㅡ응.
전화를 끊었다. 백지수가 보낸 메뉴들이랑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어플로 주문해두고 픽업했다. 별장 근처에서 백지수에게 전화 걸었다. 곧장 연결됐다.
“나 거의 다 왔어.”
ㅡ어. 근데 왜 전화를 걸어? 너 열쇠 있잖아.
“그럼 나 앞으로 말 없이 네 자취방 맘대로 들어가도 돼?”
ㅡ어, 아니. 전화 잘했어. 앞으로도 올 거면 꼭 하고 들어와.
“응.”
오른손으로 열쇠를 들고 대문에 꽂아 돌렸다. 들어가서 대문을 닫고 현관문도 열쇠를 넣어 열었다.
ㅡ현관 들어온 거야?
“응.”
ㅡ그럼 전화 끊지 뭐 해.
“걍.”
ㅡ내가 끊음.
어,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바로 전화가 끊겼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은 다음 안에 들어갔다. 살구색 브라 위에 흰 민소매를 입은 백지수는 주방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리 쪽을 봤는데 하의는 짧은 돌핀팬츠였다.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왜 맨날 꼴리는 옷만 입어대는 건지, 편한 건 알겠지만 나는 빳빳해져서 불편해지기만 했다.
“빨리 갖고 와. 나 배고파.”
“네에.”
옆 의자에 앉으면서 봉투를 내려놓았다. 백지수가 바로 봉투에서 음식을 하나씩 꺼냈다. 나는 콜라를 꺼내서 빨대를 꽂았다. 백지수가 갑자기 엉덩이를 떼고 몸을 기울여 얼굴을 들이밀어서 빨대 하나를 입에 물고 쪼옥쪼옥 빨았다. 열심히 빠느라 볼이 살짝 안으로 들어간 게 외설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보이는 건 다 백지수가 존나 음탕한 잘못이었다. 발기했다. 지금 당장은 백지수가 테이블 밑은 못 보니 오른손으로 내 콜라를 들어 빨아마시면서 왼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자지를 위쪽으로 조정했다. 백지수가 자기 버거의 포장을 열었다. 나는 치킨 박스를 열었다. 백지수가 버거를 크게 베어물면서 치킨 박스를 봤다. 싱크대에 가서 손을 씻고 돌아와 조각 하나를 집어서 뜯어먹었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메뉴 겹친 거 나눠야 되지 않아?”
“그냥 먹어도 되지 않아? 각자 뭐 주문했는지 스스로 아는데.”
“그냥 구분해두자는 거지.”
“귀찮아.”
“어.”
백지수가 음식을 목에 넘기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시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근데 뭐 때매 심란하다 한 거야?”
“아 그거.”
백지수가 한숨 쉬었다.
“너 카톡으로 고백당한 적 있어?”
웃겼다.
“아니 무슨 고백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당했다고 표현하세요.”
“아니 씨바 교통사고 수준이잖아, 존나 생각도 못 했는데 갑자기 훅 들어오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쉽게 진정이 안 될 종류의 웃음이었다.
“아 씨, 개 빡치는데 웃음 좀 자제해주시죠?”
“아니, 큭큭, 개 웃긴데 이걸 어케 참음?”
“아 개 같네. 존나 이런 게 고백으로 혼난다는 건가?”
백지수가 콜라를 한 입 빨고 크리스피 치킨을 집어 먹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화나있다는 느낌이 배어들어 있었다. 나도 치킨을 한 조각 더 먹었다.
“근데 누구야?”
백지수가 나를 쏘아봤다.
“고백 당한 적 있냐고 내가 먼저 물어본 거 같은데.”
“있어.”
“어케 했어 그거 보고?”
“넌 어케 했는데?”
“너 자꾸 내가 먼저 질문했는데 제멋대로 너 물어보고 싶은 거 물어본다? 대화의 기본은 티키타카인 거 모르세요?”
“나 기억 안 나서. 근데 아마 정중하게 거절했을 걸. 넌 어케 했는데?”
“... 일단 안읽씹했지. 딱 그냥 뜨는 끝문장만 보고 갑자기 존나 싸해져가지고. 눌러보기도 무서워 씨발.”
“걔가 전화는 안 했어?”
“몰라 폰 꺼놨어.”
“어제부터 지금까지?”
“어.”
백지수가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폰을 꺼내 흔들었다.
“내가 이 폰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왜 폰이 두 개야?”
“아빠가 그냥 만들어 주더라. 뭔진 몰라도 투 폰 익숙해지라고.”
“으음.”
“그래서 너였음 어떡할 거냐고.”
“이런 얘기는 카톡으로 할 건 아니지 않아? 이거랑. 미안한데 난 너 친구로밖에 안 보여. 이정도면 무난하지.”
“그럼 알아서 떨어져?”
“사람마다 다르지.”
“아 존나 좆 같다 씨발...”
백지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버거를 한입 베어물었다. 볼이 꽉 찬 채로 우물우물거리는 모습이 찌푸린 눈과 합쳐져서 심각한 척 하는 다람쥐 같아 보였다. 웃음을 참으려 했는데 결국 터졌다. 백지수가 꿀꺽 넘기고 입을 열었다.
“쪼개지 마 진짜.”
“미안해. 근데 네 잘못도 좀 있어.”
“내가 뭔 잘못을 했는데?”
“존나 귀엽잖아, 웃음 어케 참아.”
“... 존나 지랄한다 또.”
“근데 너한테 고백한 사람 동갑이야?”
“어.”
“나도 아는 사람?”
“너도 알지. 아, 존나 술 마렵네 진짜...”
“마셔 그럼.”
“좆까.”
“그러다 또 밤에 마시면 내일 학교가야 되는데 숙취 때문에 망한다?”
“술 안 마실 거거든.”
“후회하지 마.”
“뭐래.”
백지수가 다시 버거를 먹었다. 화났다고 티 내듯 으적대는 게 마냥 귀여웠다.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 왤케 귀엽냐?”
백지수가 나를 째려봤다.
“지랄하지 마라 지금 개 빡쳐있으니까.”
“네.”
“다 먹을 때까지 잠깐 입 다물고 먹으세요.”
입을 다물고 버거를 입 앞에 댔다.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존나 뭐 하세요?”
“입 다물고 먹으라면서요.”
“웃겼으니까 한 번 봐준다.”
“네.”
백지수는 버거랑 치킨 두 조각만 먹고 끝냈다. 나는 에그타르트까지 먹을 작정이었다. 백지수가 커피를 만들라 해서 두 잔을 타고 양손에 들어서 도로 자리에 가 앉았다. 하나는 백지수 앞에 두고 하나는 내 앞에 뒀다.
“근데 너한테 고백했다는 사람 누구야?”
“그거 알아서 뭐 해.”
“궁금하잖아.”
“... 강성연.”
“강성연? 걔 레즈야?”
“어! 씨발!”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뭘 쪼갬?”
“아니 네가 웃겼잖아.”
“씨... 공감능력 없는 새끼.”
백지수가 벌떡 일어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뭐 하나 봤는데 백지수가 칵테일 재료를 들고왔다. 말 없이 일어서서 거들어주고 같이 자리에 앉았다.
“술이랑 커피 상극이래.”
“그럼 내 커피 네가 마셔.”
“취할 거야?”
“몰라 시발.”
백지수가 테이블에 두 팔을 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언제부터 존나 쎄하더니... 아 진짜 개 존나, 강성연 이 미친년은 왜 하필이면 날 좋아하는 거야...”
“네가 예뻤나 보지.”
백지수가 두 손을 얼굴에서 치웠다.
“뒤질래?”
“아니요.”
“... 근데예쁜 거로 따지면 다른 애들 많잖아.”
“누구?”
백지수가 나를 바라봤다.
“뭐 김세은이나... 송선우나... 유은이나...”
“그 셋밖에 없어?”
“아니 뭐 씨 그럼 내가 학교에 있는 예쁜 사람 다 늘어놔야 돼?”
“아니.”
“하아...”
백지수가 술뚜껑을 따서 도수가 높고 단 칵테일을 만들어 빠르게 넘겼다. 폭주라고 할 수 있었다. 옆에서 조금 자제하라고 말하면서 속도를 조정해줬다. 백지수가 알쓰인 탓에 금방 취해서 테이블에 엎어졌다. 두 손으로 왼어깨를 잡아 살살 흔들었다.
“지수야. 자?”
대답은 없었다. 진짜 자는 것 같았다. 안 자는데 굳이 자는 척할 이유도 없으니 자는 게 맞을 거였다.
“왜 여기서 자, 침대에서 자야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2층으로 업고 가서 침대에 눕혀줘야 될 듯했다. 왼쪽으로 가서 왼팔은 백지수의 무릎 밑에 넣고 오른팔은 백지수의 등을 받쳐주고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백지수의 방으로 들어가고 침대에 눕혔다. 굽혀진 다리를 손수 펴주고 백지수를 바라보았다. 느리게 부풀었다 내려가는 가슴과 살짝 벌려진 입이 나를 싱숭생숭하게 했다. 왜 이리 편히 맘 놓고 잠드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막말로 내가 강간이라도 한다면 어떡했으려고. 아니면 아예 그러기를 바랐나? 아닐 거였다. 백지수가 아무리 자위에 빠져 사는 음탕한 변태라고 해도 강간당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어둡고 질척한 상상을 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1층으로 내려가 내가 마신 커피 잔과 칵테일 잔, 그리고 지거 따위를 설거지했다. 술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백지수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이게 연기일 리는 없었다. 화장실 쪽으로 조용히 걸었다. 어쩌면 두 번은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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