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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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다 먹고 나서 집으로 가야 된다 하면서 가방을 챙기고 설거지는 맡긴 뒤 먼저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가서 이수아한테 사과하려고 방문을 두드렸는데 철저한 무반응만 돌아왔다. 이수아는 같이 나가자는 말도 안 했다. 결국엔 따로 등교했다. 왜 그러냐는 문자를 보내고 전화도 세 번 걸어봤지만 모두 씹혔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종례하고 나서 30분 정도만 밴드부에 있고 빨리 집에 돌아왔다. 저녁 시간에 화해해볼 작정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봐가면서까지 테이블 앞에 앉았지만 이수아는 내가 보이기만 하면 자기가 밥을 먹고 있든 영화를 보고 있든 상관없이 자기 방으로 도망가기만 할 뿐이었다. 이수아가 도망가는 때면 윤가영이 대신 내게 미안하다 말하며 이수아를 따라갔다. 하지만 윤가영마저도 안에 몇 분 못 있고 방에서 금방 튕겨져나왔다. 그러고 나면 이수아의 방에서는 청승맞게 눈물을 흘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나올 셈인지 궁금했다.
토요일에는 밴드부 버스킹으로 홍대에 갔다. 아침에 유은이랑 일찍 만나 어썸플레이스에서 기프티콘을 쓰고 배를 채웠다. 점심 시간대에 버스킹을 한 다음 다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해산했다. 더 놀자고 하는 사람이 좀 있었는데 나는 약속이 있어서 빠져야겠다고 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남은 시간을 다 들여서라도 이수아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에 들어갔다. 윤가영이 있었다.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길래 오른손 검지를 세워 내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윤가영이 입을 다물었다. 내 방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수아 방문 앞으로 갔다. 노크하지 않고 문이 열릴 때까지 폰을 만지며 오랫동안 서있었다. 숨소리도 의식하며 최대한 인기척이 안 나게 조심했다.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올 때 폰을 주머니에 넣고 손을 살짝 위쪽으로 올려 준비했다. 문이 열렸을 때 오른팔을 살짝 굽힌 채로 뻗어 이수아가 다시 문을 닫지 못하게 미리 막고 왼팔은 쭉 뻗어서 이수아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수아가 빠르게 눈을 굴렸다. 상황파악을 했는지 이수아가 바로 뒤돌아서 자기 방에 딸린 화장실 쪽으로 달렸다. 내가 더 빨라서 곧바로 붙잡았다. 이수아의 팔을 잡아 억지로 돌려 세웠다. 이수아가 고개를 자꾸 아래로 내리려고 했다.
“이수아.”
“...”
“이수아 고개 들어.”
여전히 들지 않았다.
“고개 들어 이수아.”
“...”
“고개 들라고 했다.”
“싫어어...”
또 우나, 매일매일 쥐어짜도 나올 눈물이 남은 걸 보면 아주 눈물샘도 컸다.
“고개 들어.”
“싫다고오...”
이수아가 어깨를 흔들었다. 앙탈부리는 느낌이라 존나 귀여웠다. 목이 늘어진 하얀 티 안으로 보이는 어느새 살짝 더 커진 듯한 가슴은 곧 E컵이 되는 거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검은색의 D컵 브라를 꽉 채우고도 윗부분으로 살이 조금 삐져나와 보여서 마냥 탐스러웠다. 발기했다.
“고개 들라고.”
“...”
이수아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내밀어 왼쪽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오빠 좆이 그렇게 보고 싶어?”
이수아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얼굴이 웬만큼 술에 취한 사람보다 붉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미약한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흑... 변태 새끼...”
“나도 창피해서 그런 거야.”
“좆까, 윽... 씨발 새끼야...”
“너 왜 나 피하냐?”
“...”
“어쭈, 말 안 해?”
“...”
“나 이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수 있어. 너 우느라 수분 빠져서 목마르거나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어져도 안 놔줄 거야.”
말하는 내가 다 유치하고 치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은 조금 즐겁기까지 했다. 관심 가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나 왜 피했어.”
“...”
“대답해.”
“흑, 으흑...”
“우는 게 대답이야?”
“흐윽... 개새끼야아...”
이수아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수아가 울어대는 모습이 예쁘게만 보였다.
“울면 다 해결이 돼?”
“윽... 흑, 씨발, 윽... 놈, 흐윽...”
입꼬리가 자꾸 올라갈 것 같아서 그냥 이수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수아가 품 속에서 자꾸 버둥거렸다. 오른손을 올려 이수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수아야. 내가 나빴어.”
“으흑... 좆까아...”
“잘못했어. 미안해.”
“윽, 꺼져어... 개, 흑... 병신 새꺄아...”
“용서해줘.”
“끅... 좆까라고오...”
“미안해, 진심으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이수아는 내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이수아의 울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눈물은 사람의 호르몬을 건드려 강제로 기분을 조정하는 기능이 있었다. 나를 보면 화만 났을 이수아도 이 정도나 울어댔으면 마음이 꽤 다스려졌을 것이었다. 입을 열어 김세은을 안심시키려 할 때 내는 저음을 냈다.
“수아야.”
“... 히끅...”
“나 밉지.”
“끅... 뭔, 윽... 개소리하려고, 흑... 그러는데에... 히꾹...”
“미안해. 미워할 만큼 미워해도 돼.”
이수아가 몸을 버둥댔다. 미동도 안 했다. 이번엔 양손으로 내 가슴께를 붙잡고 밀어내려 했다. 여전히 안정적으로 이수아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흑... 닥쳐어...”
이수아는 나를 결코 밀어낼 수 없었다. 서로는 서로의 삶에 달라붙어버린 혹 같은 존재여서 마음대로 떼어내지 못 했다. 떼어내고 싶어서 긁어내거나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곪기만 했다. 최선의 방책은 서로 없는 척하고 감추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수아를 괴롭히려 내 존재가 일부분 드러나도록 했다. 이수아는 나와 동거한다는 사실까지는 감췄겠지만 한 번 드러나버린 나라는 혹은 이수아를 지독히도 괴롭게 했을 것이었다. 그 아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야 없겠지만, 이수아가 힘겨워했으리라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두려운 상상을 하나 안겨주었다. 어쩌면 이수아가 나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면서 자기도 나의 혹이 되어주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상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수아를 달래야 했다. 나에 대한 악의가 누그러지도록 해야 했다.
“미안해 수아야. 용서해줘.”
“흑... 씨바알... 끅, 좆까아...”
호흡이 약간 곤란해지도록 이수아를 꽉 끌어안았다. 이수아가 순간 흡,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힘을 풀어주고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원한다면 이수아가 자기 마음대로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수아는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발목에 밧줄이 묶여서 커서도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못 하는 코끼리처럼 이수아는 지레 포기해버린 거였다. 입을 열었다.
“오빠 밉지.”
나는 이수아에게 오빠였다. 원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앞으로 이수아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었다.
“오빠 같지도 않고.”
이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쌔액쌔액 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오빠답게 행동할게. 오빠답게 말하고. 오빠가 되줄게, 네가 원하기만 하면.”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예감은 좋았다. 근거는 전혀 없었다.
“필요하면 말해줘. 어떻게 해달라 어떻게 해달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줄게. 방법도 내가 찾을게.”
나는 이제 이수아에게 혹이 아닌 우호적인 사람으로 탈바꿈할 거였다. 내가 실제로 그런지에 대한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수아가 그리 여기도록 만들 거였다.
“김해인 그 새끼한테 몇 대 쥐어박아달라고 하면, 내가 우연인 척 시비를 붙어서라도 해볼게.”
이수아를 힘들게 한 건 내가 아니라 김해인이었다. 앞으로 이수아에게 주입할 또 다른 내용이었다. 오른손으로 이수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어서 오른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왼손으로 이수아의 등을 토닥였다. 잠시 가만히 있던 이수아가 양손으로 내 팔뚝을 툭툭 쳤다. 놓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이수아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이제 놔아...”
이수아가 목이 쉰 상태로 말했다.
“한 번만 더 안고.”
이수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살의 온기와 더불어 나이에 안 맞는 커다란 가슴이 느껴졌다. 이수아를 풀어주었다. 이수아가 고개를 수그린 채 두 발짝 뒷걸음질 쳤다. 이수아가 뒤돌아서 침대로 걸어가 걸터 앉았다.
“나가 이제.”
‘꺼져’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가고 싶었다.
“수아야.”
“또 왜.”
“주방에서 뭐 갖다 줄까?”
“... 바나나 우유.”
“하나?”
“두 개.”
“알겠어.”
문을 닫고 주방으로 갔다. 윤가영이 어떻게 됐냐고 물어왔다. 무시하고 바나나 우유 두 개를 집고 이수아 방으로 돌아갔다. 이수아가 책상에 놓고 가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책상 위에 둔 다음 나와서 문을 닫았다. 주방에 있던 윤가영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다시 무시하고 그냥 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여태 수아를 괴롭힌 게 부당하기는 했다. 차라리 윤가영을 괴롭혔어야 했을 거였다. 수아랑 친해지고 나서 윤가영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한 다음 윤가영을 외면하도록 만들면 될 듯했다. 메모 앱을 켜 이수아를 어떻게 구슬릴까 궁리해서 차차 글귀를 적어나갔다. 알게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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