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칵테일 선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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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소리도 안 듣고 그냥 잠에서 깼는데 어지럽고 피곤했다. 간밤에 칵테일도 마실 만큼 마시고 자위도 존나 해버린 탓이었다. 좀 어두운 걸 보면 시간대도 새벽인 것 같았다. 폰을 켜 몇 시인지 확인했다. 6시 37분이었다. 의외였다.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 세수한 다음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 샴푸를 해 정신을 좀 차렸다. 밖에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주방으로 가 숙취해소할 만한 거 뭐 없나 선반을 뒤적였다. 라면이 눈에 띄었다. 냉장고도 확인해봤는데 아무래도 라면이 끌렸다. 콩나물을 꺼내고 냉장고를 닫았다. 큰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불을 킨 다음 선반에서 라면을 세 개 꺼냈다. 봉지를 뜯어 건더기와 라면 스프를 넣은 다음 잠시 멍 때리고 뭐 더 필요한 게 없나 생각했다.
스프 쓰레기를 버리고 냉장고를 다시 열어 대파랑 청양고추를 꺼내 도마에 올렸다. 칼을 찾아서 썰어주고 커다란 스테인리스 채반을 찾아 콩나물을 세 옴큼 잡아 넣었다. 콩나물을 세 번 헹궈서 씻어 주고 또 까먹은 게 없나 돌이켜봤다. 냉동고를 열어 간마늘 통을 꺼냈다. 슬슬 매콤한 냄새가 나서 냄비를 확인했다. 물이 끓고 있었다. 콩나물과 면을 넣어주고 숟가락을 가져와서 간마늘을 한 스푼 넣었다. 간마늘 통을 도로 냉동고에 넣었다. 냄비 앞으로 돌아가 젓가락으로 면이 풀리도록 뒤섞고 들어 올려서 공기와 접촉시켰다. 팔팔 끓는 걸 잠시 보다가 도마를 들고 와 아까 손질해놓은 대파랑 청양고추를 넣었다. 도마, 채반, 칼을 싱크대에 둬서 물을 한 번 끼얹은 다음 돌아와서 다시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저었다. 약간 설익은 상태에서 불을 껐다. 여자들이 내려올 시간 동안 잔열로 익을 정도였다. 선반에서 밑받침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냄비를 옮겨놓았다. 그릇이랑 젓가락이랑 숟가락을 네 개씩 세팅해놨는데 뭔가 허전했다. 냄비에 국자도 하나 넣었다. 여전히 허전하다 싶었다.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가만히 응시했다. 김치가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봤는데 김치는 찾을 수 없었다. 폰을 꺼내 백지수에게 문자 보냈다.
[일어났어?]
의자에 앉아 답이 올 때까지 잠시 간밤에 온 문자들을 확인했다. 곧 답장이 왔다.
[어.]
[나 잠깐 나갔다 올 건데 대문 열어달라 하면 열어줄래?]
[어디 가게?]
[편의점. 뛰어갔다 올 거야.]
[야.]
[걍 열쇠 줄 테니까 가져.]
열쇠를 가지라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어쩌면 백지수는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도 몰랐다. 발기했다. 팬티 안에 왼손을 넣고 자지를 위로 올렸다.
[가지라고?]
[싫음 말든가]
[난 무조건 좋지]
그런데 막말로 내가 멋대로 들어와서 너 따먹으려고 덮치면, 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나도 상태가 별로인 듯했다.
[너 쓰다가 지운 말 뭐냐?]
[그런데 님 제정신이세요? 라고 썼다가 지웠지.]
[열쇠 안 줌]
[미안해]
[진심을 담아서 말해봐]
누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어서 누구인지 봤다. 백지수였다. 머리는 또 더벅머리였다. 일어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자위부터 한 건지 아니면 방금 깨서 머리를 안 감은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당연히 후자겠지만 백지수가 뭘 하든 내게는 음탕하게밖에는 안 보였다. 다 백지수 때문이었다. 계단을 내려온 백지수는 오른손 검지에 키 두 개만 끼워진 키링을 걸고 오른팔을 뻗은 채 내게 다가왔다. 나도 백지수 쪽으로 걸어가서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앞으로 내밀었다.
“죄송하다고 먼저 말해.”
백지수가 오른손을 조금 높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래.”
백지수가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
“라면 했네?”
“응. 이슬 누나랑 선우는 깼어?”
“둘 다 자.”
“그럼 깨워주라. 나 김치 사올 동안.”
“어.”
백지수가 오른손을 내렸다. 왼손으로 키링을 받고 주머니에 넣은 다음 현관에 가 신발을 신었다. 나오고는 달려서 편의점에 도착했다. 썰은 김치를 세 개 집고 혹시 몰라서 즉석밥도 둘 집어 계산대로 갔다. 알바가 봉지 필요하세요, 라고 물었다. 그냥 가져갈게요, 라고 답하고 현금으로 계산했다. 즉석밥 하나랑 김치 세 봉지는 왼손가락들 사이에 끼우고 남은 즉석밥 하나는 겨드랑이에 끼웠다. 돌아갈 때도 달리면서 주머니에 넣은 키링을 꺼내 대문 열쇠를 골라 잡았다. 빠르게 대문을 여닫고 현관에 입성한 다음 신발을 벗고 바로 주방으로 갔다. 조금 숨이 거칠어졌다.
“오! 온유! 일루와서 앉아!”
정이슬이 자기 옆자리 의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송선우랑 백지수는 반대편에 앉아있었다. 사온 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조금 긴장됐다. 어제 상상으로 몇 번이고 따먹은 여자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몸이 빳빳해지는 느낌이었다. 옆에 앉은 정이슬만 해도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몸 위에 올라서 혀로 목을 핥아 애무해서 깨우고 끈팬티를 옆으로 비껴서 자지를 박아넣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화장기 없는 정이슬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빛으로 혈기가 도는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섞고 싶었다. 정이슬은 키스를 좋아했다. 내 상상속에서는 그랬다. 정이슬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말 안 하고 그렇게 봐?”
마음을 다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저 좀 힘들어서 방전 돼 가지고요.”
정이슬이 배시시 웃으며 김치를 뜯고는 접시 두 개에 나누어 쏟았다.
“너 진짜 깜찍하다.”
“네?”
백지수가 기겁하며 오른팔을 테이블에 댄 채로 오른손 검지를 세워 나를 삿대질했다.
“얘가요?”
“응.”
“어디가요?”
“그냥 말하는 거 가끔 보면 큐티한데?”
“으.”
웃겼다.
“라면이나 먹자. 다 분다.”
내가 말했다. 집게를 들어 정이슬의 그릇에 먼저 담고 내 그릇에도 담았다.
“지금도 좀 귀여워.”
정이슬이 말했다.
“아니 대체 뭐가요?”
백지수가 물었다.
“약간 무뚝뚝한 아빠 바이브 흉내내서 말하고 행동하는 거, 안 귀여워?”
“언니 온유한테 폴인럽했어요?”
송선우가 집게를 들어 지수 접시랑 자기 접시에 면을 담으면서 물었다.
“몰라. 그런 거 같애. 그냥 나랑 사귈래 온유야?”
정이슬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누나는 또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 힘들었다.
“싫다고는 안 하네?”
백지수가 말했다.
“오. 여자친구한테서 견제 들어온다.”
정이슬이 말했다.
“여자친구 아니거든요.”
“그럼 나도 기회 있는 거네?”
정이슬이 오른팔을 내 쪽으로 뻗어서 내 왼팔을 채서 팔짱 끼었다. 송선우가 라면을 한 입 먹고 입을 열었다.
“라면 안 먹을 거예요?”
“먹어야지.”
정이슬이 팔짱을 풀고 젓가락을 들었다. 나도 젓가락을 들고 면을 입에 넣었다. 정이슬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며 우물우물대다가 삼킨 다음 젓가락을 든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와 씨. 너 진짜 그냥 완벽하다. 요리도 잘하고. 진짜 나랑 사귈래? 결혼 전제로?”
피식 웃었다. 나도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꾸 그러면 저 진짜인 줄 알아요.”
“아니 장난 아냐. 진심으로.”
“저 갖고 놀면 재밌어요?”
정이슬이 눈웃음짓고 왼손으로 나를 한 대 쳤다.
“야 네가 나 갖고 노는 거 같은데?”
“뭐가요.”
“너 말하는 거 진짜 하나하나가 여자 홀리는 거라니까? 그냥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 건진 몰라도. 아니 둘 다인가? 암튼.”
“누나 목소리도 좋아요.”
“이거 봐.”
“느글거리니까 적당히 해라 이온유.”
송선우가 나를 무기질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연적이 너무 많다 온유야. 어떡하지?”
정이슬이 마냥 즐거운 듯 말했다. 나는 반대로 슬슬 무서워졌다.
“그만해요 라면 다 불어요.”
“그래. 라면 먹어야지.”
정이슬이 다시 면을 먹기 시작했다. 또 말하지 않을까 두려웠는데 다행히 더 뭐라 하지는 않았다. 국자로 국물을 뜨고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고 김치를 집어 먹었다.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이슬도 국자로 국물을 두 번 푸더니 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아, 하고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나랑 안 사귈래?”
“아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한테.”
“나 진짜 너한테 반한 거 같애서 그래.”
“뭘 보고요.”
“어제 밤에 솔직히 변태짓 할 법도 했는데 암것도 안 한 거 보고. 진짜 막말로 막 누가 업어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 선우랑 지수도 상태 메롱이었고.”
“아냐 언니. 얘 어제 언니 속옷만 입은 거 봤어.”
송선우가 말했다.
“그래?”
정이슬이 또 나를 봤다. 이번엔 뭔 말을 하려고, 무서웠다.
“어땠어?”
백지수가 목 막힌 소리를 내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행히 뭐가 튀어나오지는 않은 듯했다.
“언니 미쳤어요?”
“아직 취기가 조금 남았나봐. 아, 어지러워.”
정이슬이 왼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과장되게 상체를 휘청이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왔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받쳐줬다.
“그만 좀 해요 누나.”
“상냥하게 대해줘...”
“저 힘들어요.”
“알겠어.”
정이슬이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사귀자.”
한숨이 나왔다.
“됐어요.”
“됐어요? 나 좀 상처 받는다? 어떻게 거절 멘트가 됐어요야?”
“진심으로 고백한 게 아니잖아요.”
“아니 나 네가 사귀자면 바로 사귈 거야.”
“됐어요.”
“너 내가 나중에 고백으로 혼내줄 줄 알아.”
정이슬이 다시 라면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진짜 아직도 취해있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되는 막무가내였다. 백지수가 일어나서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고 컵 네 잔을 집어 가져왔다.
“지수야 나 해장술로 칵테일 한 잔만 해도 될까?”
정이슬이 물었다.
“진심이에요?”
“응.”
“그럼 재료 언니가 가져와주세요.”
“고마워.”
정이슬이 스트레이트 잔과 지거, 미도리, 베일리스, 깔루아를 가져왔다. 백지수가 깔루아를 들어보더니 눈을 찌푸리고 병을 들여다보았다.
“언니.”
“응?”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마시기라도 했어요?”
“어... 응. 들켰네?”
백지수가 한숨 쉬고 퀵 퍽을 만들어 정이슬에게 주었다.
“고마워.”
정이슬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진짜 제대로 당한 느낌이었다. 조금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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