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송선우 생일 (2)
* * *
“요즘 연애하는 애들 꽤 있는 거 같던데, 너희 내년에 고삼이다. 공부에 집중해, 지금 사람 찾아서 만나지 말고. 이런 말하면 또 연애한다고 성적 안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 꼭 한 명씩은 생길 거 안다. 근데 교사직 맡은 햇수만 따져도 수십년인 내가 여태 관찰해보고 낸 귀납적 추론은 ‘결국엔 성적 떨어진다’야. 너희 시험이나 중요한 날 가까워졌을 때 헤어지기라도 해봐라. 큰일난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등급이 한두 단계 바뀌어요. 그리고, 지금 사귀는 사람이 3년 4년 뒤에도 쭈욱 연인이라는 보장이 없어요. 대학 가면 사람 보는 눈도 달라지고 거리도 멀어지고 해서 다 찢어지고 그런다고. 학기 초라서 이런 잔소리하는 거지, 나중에 너희 후회해도 난 책임 못 져준다. 이상.”
하회탈 쌤이 기나긴 종례를 마쳤다. 왼쪽 앞자리에 앉은 백지수가 고개를 돌려서 눈을 마주쳐왔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밴드부해?”
“어.”
“같이 고?”
“너 먼저 가.”
“넌 뭐 하게?”
“나 잠깐 할 거 있어서.”
“... 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밖에 나오고 뒷문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닫혀 있는 뒷문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경을 책임지는 나무 옆에 서 있는 송선우가 바닥을 보며 오른발을 세워서 땅을 질질 끌고 있었다.
“선우.”
송선우가 고개 들어 나를 바라봤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송선우가 한 발짝 물러났다. 원래 가려던 것보다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송선우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또 다가설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왜, 큼. 왜 불렀어?”
피식 웃었다.
“삑사리 뭔데.”
“걍 넘어가주시죠?”
“네. 넘어가드릴게요.”
말하면서 가방을 앞으로 돌리고 지퍼를 연 다음 러닝화를 꺼냈다. 송선우가 가방을 게슴츠레 보고 있다가 러닝화가 나오자 눈을 크게 떴다.
“받아.”
“어, 어. 고마워.”
송선우가 러닝화를 양손으로 받고 품에 안았다. 얼떨떨해보였다.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을 마주한 사람이 할 법한 표정이었다.
“선우.”
“어?”
“뭐 기대한 거야?”
“아니... 생일 선물은 아까 줬으니까, 아냐. 그건 됐고. 근데 웬 러닝화?”
“가끔 달리고 싶으면 신으라고.”
“나 육상 접었잖아.”
“그래도 뛰고 싶을 때 생기기도 하잖아.또 복서는 조깅이 시작이라고 하고.”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복싱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스파링이라도 한번 떠?”
“아니. 록키 보면 그렇더라고.”
“록키?”
“옛날 영화 있어.”
“넷챠에 있어?”
“응.”
“다음에 함 볼게. 어떤가.”
“이제 신발 좀 신어볼래?”
“어.”
송선우가 러닝화를 바닥에 내려놓고 왼발에 신은 신발을 뺀 다음 러닝화에 집어넣었다.
“어때? 맞아?”
“어. 딱 맞아. 나 발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송선우가 몸을 일으켜서 왼발을 세워 뒤를 보기도 하며 러닝화를 확인했다.
“너 슬리퍼에 사이즈 스티커 안 떼 가지고 보고 기억해뒀지.”
“미친...”
“착용감은 좋아?”
“어. 이거 얼마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30만 언더 오버?”
“오버.”
“야.”
송선우가 오른발도 러닝화로 갈아 신고 몸을 일으켜 나를 직시해왔다.
“응?”
“뽀뽀라도 해줄까?”
피식 웃었다.
“에반데.”
“이번에 거절하면 두 번째 제의는 없어요?”
“네.”
“거절이야 뭐야?”
“정중한 거절입니다.”
“야 근데 너 잤냐? 머리에 먼지 있네.”
송선우가 오른손을 뻗어오며 가까이 다가왔다. 왼손을 들어 내가 먼저 머리 옆과 위쪽을 털었는데 먼지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안 떨어졌어.”
송선우가 내 왼쪽 머리카락 한편을 손가락으로 집는 듯하더니 손을 쫙 펴서 내 머리를 잡고 내 오른볼에 짧게 뽀뽀했다. 순간 송선우의 하얀 목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당황스러웠다. 발기했다. 송선우가 떨어지기 전에 왼손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자지를 위로 올려 숨겼다.
“왜, 왜 그러셨어요?”
오른손으로 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켜 셀카 모드로 오른볼이 어떤가 확인했다. 립밤 바른 입술이 볼에 닿았다는 게 너무 티 났다. 송선우가 아이처럼 웃었다.
“웃고만 계시지 마시고요.”
“아, 너 반응 개 웃겨 진짜.”
“아니 나 이거 어떡해?”
“닦아, 수돗가에서.”
송선우가 악동처럼 미소지었다.
“아님 며칠 동안 그대로 남기든가.”
“와. 무섭다 송선우.”
가방에서 물티슈를 찾아 꺼내 볼을 닦았다.
“뭐가?”
“너 이런 식으로 남자 몇 명 홀렸어?”
“뭐?”
송선우가 아학학, 하고 웃으며 오른손바닥으로 내 오른팔을 때렸다.
“아파.”
“아니 네가 반응을 존나 웃기게 하잖아.”
볼을 닦은 물티슈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난, 난 모르겠어요.”
“뭘 모르겠어요?”
“뭐가 웃긴지 모르겠어요.”
“진짜 너 그러는 거가 존나 웃겨.”
“어, 네. 우리 부실이나 갑시다.”
“응. 가자.”
송선우가 자기가 쓰던 신발을 왼손에 들고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를 계속 올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으세요?”
“걍 아까 웃긴 게 계속 남아있네요?”
“제가 우습습니까?”
“네 좀 많이 우스우세요.”
송선우가 부실 문을 열었다. 송선우, 송선우, 라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생일 축하곡 라이브가 들렸다.
ㅡ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선우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빠밤 빠바밤 빰!
“아쉽게도 케이크는 없어.”
정이슬이 초코파이 박스를 송선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송선우가 고마워요, 이걸로도 충분하죠, 라고 답했다.
“선우 주말에 생파할 거야?”
정이슬이 물었다.
“글쎄요 딱히 생각 없었는데...”
정이슬이 송선우에게 다가가서 귀에 속삭였다.
“그럼 오늘 사람 좀 모아서 저녁 같이 먹을까?”
“네 좋아요.”
“이따가 단톡 파줘.”
정이슬이 뒤로 물러나고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했으니까 이제 놉시다.”
*
송선우, 백지수, 정이슬이랑 밖에 나왔다. 남자는 나 혼자라서 괜히 기분이 야릇했다. 정이슬이 바닥을 보며 걷다가 송선우의 러닝화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어? 선우 신발 바꿨네?”
“넹.”
“뭐야? 점심 때는 이거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이거 온유가 생일 선물이라고 줬어요.”
“오 이온유. 뭐냐구.”
정이슬이 게슴츠레 나를 바라봤다.
“얼마 주고 샀어?”
“온유가 30만 오버랬어요.”
송선우가 대신 답했다.
“비싸네. 막말로 진짜 50 넘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이온유 50 언더 오버.”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에이 그런 걸 왜 물어봐.”
미소를 머금은 송선우가 말했다. 송선우가 백지수의 뒤로 가서 백지수를 껴안고 뒤뚱뒤뚱 걸었다.
“지수 지금 질투하는 거야? 모야모야아?”
정이슬이 킥킥댔다. 정이슬은 제멋대로 연인 관계나 삼각 관계로 몰아가는 아줌마 기질이 있었다. 우리가 부른 택시가 보였다.
“택시 왔는데요.”
“어. 타자.”
정이슬이 말하고 자기가 앞좌석에 탔다.
“제가 앞에 타야 되는 거 아녜요?”
내가 말했다.
“뭐 상관없지 않아? 걍 타자.”
송선우가 왼손으로 내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정이슬이 웃었다.
“그래, 걍 타 온유야.”
정이슬이 말했다. 백지수가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내 왼소매를 잡아끌었다.
“말이 많아. 걍 타.”
백지수가 말했다. 내가 가운데에 앉았다. 송선우가 마지막으로 오르고 문을 닫았다. 택시가 출발했다.
“맞다. 온유 밴드부에 좋아하는 여자 있댔잖아.”
정이슬이 뜬금없이 화제를 던졌다.
“호옥시?”
정이슬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시선은 송선우를 향했다가 백지수를 보았다가 내 쪽에 정착했다.
“이 중에 있어?”
“아니 뭘 그런 걸 물어봐요 언니.”
백지수가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
“그거 알아서 뭐 해요.”
“서로 마음 있음 사귀는 거지? 그래서 이온유. 대답은?”
“장난치지 마요.”
“에이. 싱겁다.”
오른쪽에 앉은 송선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경 쓰였다. 백지수도 폰을 보다가 나를 흘깃흘깃 쳐다봤다.
“선우 눈빛만으로 온유 얼굴 녹이겠는데?”
정이슬이 말했다. 정이슬이 없었으면 지금 분위기가 숨쉴만 했을까. 피곤했다.
“아, 저 그냥 멍 때린 거예요.”
“온유 얼굴 보면서?”
“본 건 아니에요. 멍 때린 거라서.”
“으음...”
“이온유 너 뭔 생각으로 밴드부 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한 거야?”
백지수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대답할 말이 궁했다.
“지수 지금 화났다.”
정이슬이 말했다.
“화 안 났어요.”
“빨리 어떻게 해봐 온유야.”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이슬은 이 순간이 마냥 즐거운 거 같은데 나는 아니었다.
“너 뭐 막 비밀 연애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백지수가 물었다. 땀이 날 것 같았다. 맞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비밀이든 뭐든 연애는 안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터였다. 그래야 비밀 연애라고 할 수 있을 거였다. 그래서 나는,
“아냐.”
라고 답했다. 사소한 죄악감이 덮쳐왔다. 당장 김세은을 만나서 껴안고 몇 분이고 키스하고 싶었다. 발기했다. 시도때도 없이 서버리는 자지가 미웠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내리눌렀다. 혹시나 해서 백지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백지수가 눈을 창가로 돌렸다.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내 자지가 선 걸 본 걸까, 물어보고 싶었다. 백지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모르게 달뜨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존나 따먹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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