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학교 끝나고 (2)
* * *
“안녕하세요!”
여자애가 내 쪽을 향해 고개 숙였다. 이수아가 많이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살폿 웃었다.
“안녕하세요. 근데 나 반말해도 돼요?”
“아 네. 편히 하세요 저 수아 친구예요.”
“알겠어.”
“들어오실래요?”
“응.”
여자애가 문을 열었다. 이수아를 흘깃 봤다. 할 말은 많아 보였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욕을 많이 안 하는 건지 아님 욕을 많이 안 하는 친구들이랑 노래방을 온 건지, 뭐가 됐건 분별은 있는 애였구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애 두 명이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눈빛만으로 누구세요, 라고 묻는 듯했다. 밖에 있던 여자애와 이수아가 뒤따라 들어왔다.
“일단 앉으실래요?”
뒤에 있던 여자애가 물었다.
“응.”
두 여자애가 앉아 있는 소파 반대편 끝자락에 앉았다. 여자애와 이수아가 다가왔다.
“수아 네가 옆에 앉아야 되지 않아?”
밖에 나왔던 여자애가 물었다.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애가 소파 가운데에 앉고 이수아가 내 옆에 앉았다.
“누군지 소개해주라.”
가운데에 앉은 여자애가 왼팔꿈치로 이수아를 툭 치며 말했다. 이수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누가봐도 마지 못해 한다는 느낌이 들 얼굴이었다.
“... 그냥 내가 아는 오빤데, 이름은 이온유고 고등학교 2학년이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 그냥 가까이 살아서.”
“거의 매일 봐, 수아랑. 등교도 길 겹치는 데까지 같이 하고.”
내가 말했다. 이수아가 나를 노려봤다. 여자애들이 어와 오 사이의 발음으로 감탄하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수아를 바라봤다. 이수아가 입을 다문 채 흐음, 하고 한숨을 쉬었다.
“수아가 오빠 불러서 온 거예요?”
문을 열고 수아에게 돌직구를 날렸던 애가 질문했다. 호기심이 많고 붙임성이 좋은 애인 듯했다. 정이슬이랑 비슷한 타입 같았다.
“아니. 내가 보고 싶어서 어딨냐고 묻고 택시 타고 왔지.”
질문해온 여자애가 꺄악, 고음을 내지르고 왼손을 주먹 쥐어서 이수아의 오른 팔뚝을 툭툭 쳤다. 말은 없었지만 장난스러운 눈빛만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했다. 이수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냐. 이 오빠가 장난기가 많아서 이러는 거지, 그냥...”
“그냥 뭐?”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고개를 수아 쪽으로 젖혀서 내가 물었다. 정이슬이랑 비슷한 애가 모야모야 진짜루, 라고 말하며 또 이수아를 왼손으로 때렸다. 이수아가 나를 째려보다가 내 오른 손목을 잡고 일어났다. 뭐하는 건가 바라보다가 이수아가 왼손을 팍 당기길래 나도 일어났다. 여자애들이 감탄과 비명 사이의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수아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따라갔다. 문을 열고 닫은 이수아가 로비 쪽으로 갔다. 이수아가 소파에 앉아 왼다리를 꼬아 오른 허벅지 위에 올리고 팔짱을 껴 가슴 위에 둔 다음 나를 쳐다봤다.
“야 네가 한 게 더 오해 사는 행동인 거 알지?”
“네가 씨발 떡밥 다 뿌렸잖아.”
“그래서 왜 나온 건데?”
“원하는 게 뭐야?”
“노래방이잖아, 노래 부르러 온 거지.”
“지랄하지 마. 노래는 밴드부에서 처불렀음 될 거 아냐.”
“너랑 노래 부르고 싶었던 거라고 하지 뭐.”
“좆까.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오빠가 동생 보러 오는 데 이유가 더 필요해?”
이수아가 벌떡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았다. 키 차이가 나서 이수아가 팔을 조금 높이 들어야 했다.
“지랄하지 말라고 씨바알...”
웃음이 나왔다.
“웃겨? 웃겨 내가?”
“웃긴 것도 있는데, 그냥 존나 귀여워서.”
“좆까 개... 병신 씨발 새끼야.”
이수아가 멱살을 놓고 방 쪽으로 돌아갔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싸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노래를 안 부르는지 반주가 들리지 않았다. 이수아가 여자애들이랑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 온유 오빠 왔는데?”
정이슬을 닮은 여자애가 나를 보고는 왼손 검지로 이수아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수아 옆쪽으로 갔다. 이수아가 내 자리를 안 내줬다.
“나 앉지 마?”
이수아가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자리에 앉았다. 결국엔 내줄 거면서 왜 이런 의미 없는 기싸움을 하는 건지, 웃겼다.
“오빠는 수아 볼 때마다 웃으시네요?”
정이슬을 닮은 여자애가 물었다.
“귀엽잖아, 수아.”
“수아 철벽녀인데? 오빠한테만 귀엽게 구는 거일 수 있어요. 아니 높은 확률로 그럴 걸요?”
“그래?”
“또 웃으신다.”
여자애가 이수아의 팔뚝을 때렸다. 이수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 그럴 거야?”
여자애가 배시시 웃고는 이수아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찐사랑 같은데, 라고 하는 게 들렸다. 내 귀가 좋아서 들린 건지 나도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조절한 건지는 몰랐어도 일단 정확히 들려왔다. 이수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지 마.”
“큭큭, 알겠어. 오빠 노래 부르실래요?”
여자애가 마이크와 노래방 기기를 내게 건넸다. blue를 쳐서 곡을 고르고 마이크 커버를 벗겼다. 반주가 흘러나오고 이수아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노골적이라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ㅡ"뭐해" 라는 두 글자에
"네가 보고 싶어" 나의 속마음을 담아 우
반대편 끝에 앉은 여자애가 눈을 크게 뜨고 나 누군지 알 거 같애, 라고 옆에 있는 애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건드려진 여자애는 나도, 사실 훨씬 전에 알았어, 라고 답했다. 정이슬을 닮은 여자애가 이수아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이수아가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쥐기만 하고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정이슬을 닮은 애가 안 부를 거면 나 줘, 라고 말했다. 이수아가 마이크를 그 애한테 건넸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 시선을 이수아에게 고정했다.
ㅡ띄어쓰기없이보낼게사랑인것같애
백만송이장미꽃을, 나랑피워볼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이수아만 봤다. 이수아는 나를 안 보고 폰으로 뭐라 계속 적어댔다. 간헐적으로 각도를 비스듬히 해서 나한테 보여줬는데, 적당히 해라, 미친 새끼, 같은 말밖에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여자애들이 오빠 노래 진짜 잘 불러요, 라고 해서 고맙다고 대충 답했다.
“근데 너무 수아만 보시는 거 아녜요?”
정이슬을 닮은 애가 물었다.
“미안해. 수아가 눈 한 번만 마주쳐줬으면 돌리려 했는데 얘가 끝까지 안 봐줘서.”
“으음... 오빠랑 수아랑 사귀는 거죠?”
“글쎄. 수아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아서.”
이수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째려봤다.
“... 그만해주면 안 돼?”
“뭘 그만해?”
“나 그만 갖고 놀라고.”
피식 웃었다. 이수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나 또 노래 불러도 돼?”
“아 네. 맘대로 불러주세요. 부르고 싶으신 거 계속 부르셔도 돼요.”
넘어와를 선곡했다.
ㅡ이런 야심한 밤
그런 걱정을 왜 해
여자 파트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이슬을 닮은 애가 이수아에게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이수아가 마이크를 쥐고는 입 다문 채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입을 열었다.
ㅡOh baby
달처럼 마음도 기우네
내가 이수아를 볼 동안 이수아는 정면만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검지로 이수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수아가 그제야 나를 봤다. 라인을 주고 받았다.
ㅡ네가 내 쪽으로 넘어와
What should I do baby
평소에는 각 잡고 부르지 않고 흥얼거리기만 해서 몰랐는데 이수아는 꽤 노래를 잘 불렀다. 여자애들이 리액션을 해줄 때 나도 한 마디 얹었다.
“몰랐는데 너 노래 되게 잘 부른다.”
“어.”
이수아가 마지 못해 답했다. 영혼 좀 넣고 답해, 라고 정이슬 닮은 애가 대신 이수아를 타박했다. 이 뒤로도 계속 이수아를 놀리고 노래하고 잡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중간부터 이수아는 반쯤 자포자기한 채로 얘기를 나누면서도 여자애들 사이에서 진짜 둘이 안 사귀냐는 소리가 나올 때면 얼굴을 굳히며 나를 싫어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노래방 시간이 끝났을 때 여자애들과 폰 번호를 교환했다. 저녁 같이 먹을래, 라고 의례적으로 물었다. 여자애들이 학원 때문에 안 되겠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하고 서로 찢어졌다.
이수아랑 같이 걸었다. 이수아가 걸으면서 폰을 내려다봤다. 두 엄지가 분주했다.
“수아야.”
“너 나한테 원한 있냐?”
“밥 뭐 먹을래?”
“나한테 원한 있냐고 미친 새끼야.”
“너 떡볶이 좋아했나? 근처에 맛집 있다고 들었는데.”
“야.”
이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폰을 집어넣은 이수아가 멈춰서서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도 멈춰서서 마주 봤다.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
이수아가 다가와서 내 멱살을 잡았다.
“뭔 잘못 했냐고 내가. 응?”
“장난 좀 칠 수 있는 거 아냐? 오빤데.”
이수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내 가슴에 이마를 박았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나.
“왜 그래.”
“왜? 왜냐고? 왜냐고는 내가 물어야 되는 거 아냐?”
“진짜 궁금해?”
“어 개새끼야.”
“음. 네 엄마 꼴나지 말라고?”
이수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살자 같은 얼굴이었다. 이수아가 멱살을 잡던 두 손을 풀고 내 가슴을 때렸다. 아픈 게 전력으로 치는 듯했다.
“씨발. 개새끼. 병신... 좆 같은 새끼...”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들면서 주먹질이 점점 마구잡이로 변했다. 타점이 매번 달랐고 점점 덜 아파졌다. 맞는 건 나인데 이수아가 엉엉 울었다. 발기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조정해 위로 올렸다.
“내가, 윽, 잘못했어... 욕도, 끅, 안 할게... 싫다는 거, 흐윽, 다 고칠게... 윽, 봐줘... 엄마, 흑, 욕하지 마...”
위태로워보였다. 다리가 반쯤 굽혀진 게 힘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주저 앉을 것 같아서 허리를 잡아주다가 그냥 끌어안았다. 왼손을 들어 올려 이수아의 머리 뒤쪽을 쓰다듬었다.
“약속한 거다?”
“히끅, 응...”
이수아가 울음을 멈추기까지 기다렸다. 이수아는 지금 자기 배에 맞닿은 내 자지를 의식하고 있을까,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수아가 두 손으로 내 양팔을 잡고 상체를 떨어뜨리려 했다. 안은 것을 풀어줬다.
“저녁 뭐 먹을래?”
“... 돈까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건네줬다. 이수아가 두 장을 뽑고 내게 돌려준 다음 얼굴을 톡톡 두드려 눈물 자국을 지웠다. 이수아가 그럴 동안 폰으로 근처 돈까스 집을 찾아 경로를 확인했다. 같이 걸어가서 서로 별로 말하지 않고 폰만 보면서 돈까스를 먹은 다음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윤가영이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왔다. 이수아가 오빠랑 돈까스 먹고 왔어요, 라고 답했다. 윤가영이 화색을 띠웠다. 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가방을 벗은 다음 침대에 누웠다. 이제 이수아를 어떻게 괴롭혀야 할까, 웃음이 나왔다. 생각만 해도 재밌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그런 내가 너무 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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