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아침
* * *
야.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오.
오른 어깨가 흔들렸다. 눈을 떴다. 왼팔을 내게 뻗어 내 오른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백지수가 보였다. 화장기 없이 예쁜 얼굴은 아침의 어둠에 음영이 드리워 생소했다.
“누구세요?”
백지수가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더 예뻐졌다.
“뭘 다짜고짜 누구세요 이 지랄?”
“너무 예뻐서.”
“아침부터 지랄이야 미친 새끼가.”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오른 가슴팍을 한 대 때렸다. 오른손을 올려 맞은 데를 문질렀다.
“아파.”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지수야.”
“뭐.”
“나 언제 잤어?”
“나한테 안기고 거의 바로.”
“지금 몇 시야?”
백지수가 몸을 반 바퀴 굴려 테이블 위에 놓인 폰을 켰다가 다시 껐다. 백지수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봤다.
“다섯 시 이십 칠 분.”
“나 꽤 오래 잤네.”
“그니까. 울보에 잠만보야.”
미소지었다.
“고마워.”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백지수의 얼굴이 살폿 붉어진 것 같았다.
“갑자기 고맙다고 하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그냥 고마우니까 한 소린데.”
“알겠는데, 너무 훅 들어와서 놀랐다고.”
“응.”
“응 이러네...”
“넌 언제 잤어?”
백지수가 잠시 침묵했다.
“너 재우고 곧?”
“머리 굴린 거야?”
“아냐 병신아.”
“의심스러워지는데.”
“그냥 언제 잤나 떠올린 거야.”
“으음...”
“으음 이 지랄.”
백지수가 다시 왼손으로 내 가슴팍을 때리려 했다. 먼저 오른손을 가슴팍에 댔다. 박수치는 소리가 나고 백지수의 손을 잡았다.
“놔.”
“왜 때려 그니까.”
손을 풀면서 교묘하게 깍지를 꼈다. 백지수가 눈을 찡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리 꼴리는 거지? 자지가 서버려서 이불 속에서 애써 왼손으로 자지가 티 나지 않도록 억눌렀다.
“너 이거 성추행이다?”
“이게 왜 성추행인데?”
“몰라 걍 놔 신고하기 전에.”
“응.”
손을 놓아주었다. 백지수가 침대에서 빠져나가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보았다.
“너 여기 얼마나 자주 올 거야?”
“모르겠어.”
“올 때마다 존나 부려 먹힐 준비해라.”
“조금 무서운데요?”
“네가 자초한 거야.”
“뭐 시킬 건데?”
“일단 기본은 요리고, 아 몰라 시키는 거 있음 걍 해.”
“알겠어. 아침 만들까?”
“어.”
백지수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저 문 너머에 백지수가 결코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뭔가가 있을 것이었다. 지독히도 궁금했지만 묵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며 참았다. 1층으로 내려 가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주방으로 갔다. 일단 냉장고를 열어 뭘 만들까 고민했다. 저번처럼 더럽게 많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야 잼이 보였다. 냉장고 문을 닫고 빵 바구니를 살폈다. 식빵이 있었다. 선반에서 커다란 흰 접시 두 개를 골라 아일랜드에 두고 식빵 네 장을 꺼내 접시 하나에 올려놓았다. 토스터는 없어서 널찍한 사각 그릴팬을 스토브 위에 두고 불을 올렸다. 수란도 해야 하니 물을 담고 백식초를 조금 넣은 냄비도 그릴 팬 옆 스토브에 올려 불을 켰다. 빵칼로 식빵의 옆구리를 베고 들어가 얇은 식빵 두 장으로 만들어 옆접시로 옮겼다. 다른 식빵도 똑같이 얇게 만들었다. 팬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얇은 식빵을 네 장 올려 구웠다. 냉장고에서 달걀 두 알과 카야잼과 버터를 꺼냈다. 식빵의 반대면도 구우며 버터를 얇게 소분해 도마 위에 펼쳤다. 다 구워진 식빵 네 장은 빈 접시에 두고 아직 굽지 않은 네 장을 그릴팬에 올렸다. 구워진 식빵 한 면에 카야잼을 바르고 소분한 버터를 면 전체에 고르게 둔 다음 다른 식빵을 덮었다. 꾹꾹 눌러 더 얇게 만들고 육등분해서 한 입 크기로 만들었다. 하나를 집어 먹어 맛봤다. 갈색 빛이 감도는 식빵은 바삭했고 코코넛 기반의 카야 잼과 버터가 어우러져 달고 고소했다. 커피가 당기는 맛이었다. 그릇을 꺼내 달걀을 깨고 물 온도가 높아진 냄비에 조심스레 흘려넣었다. 다른 달걀도 똑같이 넣었다. 2분 가량이 흐를 동안 그릴팬의 불을 끄고 다 구워진 식빵을 꺼내 또 카야 토스트를 만들어 육등분 했다. 다시 냄비로 돌아가 눈으로 수란이 만들어졌나 확인했다. 이제 뜨면 될 듯해서 수채 구멍이 있는 국자로 수란을 뜨고 그릇 두 개에 하나씩 담았다. 냄비 불을 끄고 씻어야 할 주방 기구와 접시, 그릇을 싱크대에 박아뒀다. 컵 두 개를 꺼내 원두스틱을 녹이고 우유를 부어 커피를 만들었다. 테이블에 카야 토스트를 쌓은 접시와 커피 두 잔, 헤이즐넛 시럽을 놓았다.
일단 할 일은 끝냈으니 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11시 43분에 김세은이 전화를 두 번 걸었다. 문자도 두 개 와 있었다.
[자는 거야 뭐 하는 거야?]
[너 나보다 바쁘게 사나 봐?]
가슴이 내려 앉는 듯했다. 죄 지은 느낌이었다. 백지수의 품에 안겨 잠드느라 김세은의 연락을 받지 못 받았다는 걸 알면 김세은은 내게 뭐라고 말할까, 나를 붙잡고 스르르 무너져 내려서는 울음을 쏟는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울먹이면서, 왜 나 말고, 윽, 백지순데에, 라고 말하는 김세은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내 가정 환경과 심리 상태를 공유하고 함께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이 왜 자기가 아니고 백지수냐고, 너랑 사귀는 사람은 나 아니냐고, 무릎 꿇은 채 부서질 듯 울분을 토로하는 김세은이 당장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했다. 미안했다. 왜 나는 어머니에게서 김세은에게 충실하라는 말을 듣고 나서 별 생각 없이 이곳으로 향했던 걸까. 왜 나는 내가 꽁꽁 감춰뒀던 것들을 김세은 말고 백지수에게 풀었던 걸까. 답은 즉각 떠올랐다. 김세은에게 말했다면 그 순간 내가 말했던 비밀이 약점이 되고 추궁거리가 될 것 같아서. 나는 끔찍했다.
김세은에게 문자 보냈다.
[세은아.]
[자느라 전화 못 받았어. 미안해.]
[전화할 수 있어? 말로 얘기하고 싶어서.]
바로 전화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커피에 시럽을 적당히 넣어 섞고 한 모금 마신 다음 토스트 조각 두 개를 먹었다. 두드드, 전화가 왔다. 김세은이었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폰을 들어 화장실로 들어간 다음 전화를 받았다.
“응 세은아.”
ㅡ받는 게 조금 늦네?
목소리는 생각보다 날 서있지 않았다. 밤이 지나며 화가 조금 풀렸거나 자기가 화를 낸 게 조금 오바인가 싶어서 지금 느끼는 감정보다 더 누그러뜨려서 말하는 것일 터였다.
“나 세수하고 있었어 가지고.”
싱크대 물을 틀었다가 껐다.
ㅡ근데 또 빨리 깼다?
“일찍 자서 그런 거 같애.”
ㅡ너 원래도 그렇게 빨리 잤어?
“평소에도 새벽 늦게까지 안 자는 편은 아니었어. 어제는 나 치고도 빨리 잔 거기는 해.”
ㅡ왤케 빨리 잤대?
“피곤했나봐.”
ㅡ너 밴드부에도 짧게 있었다매.
“피곤해서 짧게 한 거지.”
ㅡ으응... 그럼 집 가서는 뭐 했어?
“밥 먹고 폰 조금 하다가 빨리 잤어.”
ㅡ폰으로 뭐 했어?
“그냥 영상 이것저것 보고...”
ㅡ무슨 영상?
“그냥 게임. 롤 같은 거.”
ㅡ너 겜 안 하잖아.
“아냐. 가끔 하기는 해. 거의 안 하는 거지. 그리고 안 하는 게임이어도 재밌는 사람은 재밌잖아.”
ㅡ그렇긴 하지.
“넌 뭐 하고 있었어?”
ㅡ나 그냥 혼자 좀 빨리 깨서. 잠깐만.
서연 언니 일어났, 라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또 거짓말만 늘어놓고 말았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은 걸 보면 김세은은 아마 멤버들한테도 나랑 연애하는 걸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문자를 보냈다가 그 서연 언니라는 사람이 보고 누군데 이 시간에 문자를 하냐고 캐물을 수도 있었으니까.
곧 전화가 왔다. 김세은이었다. 받았다.
“어떻게 됐어?”
ㅡ왜 빨리 일어났냐고 해서, 배 아프다고 하고 화장실 들어왔어.
속삭이는 소리였다.
ㅡ이렇게 얘기해도 되지?
피식 웃었다.
“응.”
ㅡ히힣.
“보고 싶다 세은아.”
ㅡ나두. 근데 나 이제 폰도 통제당할 거 같애.
“왜 폰을 통제해?”
ㅡ데뷔조잖아. 원래 폰 통제하는 게 맞는데 풀어줬던 거래. 폰 쓸 시간도 안 줬으면서. 이제는 휴일도 없어.
투덜대는 게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ㅡ왜 웃어?
“너 귀여워서요.”
ㅡ히힣.
“그럼 데뷔하고 나면 폰 돌려준대?”
ㅡ응.
“힘들겠다.”
ㅡ그니까. 너랑 전화도 이제 아예 못할 거고.
“그럼 나 어떻게 살아?”
ㅡ내 영상 돌려봐.
한숨이 나왔다.
ㅡ미안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알아. 근데 너도 힘들지 않아?”
ㅡ힘들어. 생각만 해도 힘들어 벌써.
“데뷔 4월 말이지?”
ㅡ응. 근데 오늘 첫 티저 올라간대.
“wx 공식 채널에?”
ㅡ응. 꼭 봐야 돼?
“알겠어.”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서 세은아 변비야, 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아, 하고 세은이가 앙탈 부리듯한 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그럼 빨리 나와. 알겠어. 가 언니. 넘 쌀쌀하다. 미안해 나 좀 예민해. 으응. 변비구나. 아니라니까아! 쿡쿡, 알겠어.
ㅡ미안해 온유야.
김세은이 속삭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냐. 괜찮아, 귀여웠으니까.”
ㅡ나 변비 아니다?
“갑자기 왜?”
ㅡ언니가 장난친 거 갖고 진짜 혹시 오해했을까봐.
“농담인 거 바로 알았어. 걱정 마.”
ㅡ으응...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왜?”
ㅡ나 폰 뺏기기 싫엉.
“심쿵.”
ㅡ풋.
“그런 거 할 때 미리 얘기해줘야 되는 거 아냐?”
ㅡ어려운데...
“왜?”
ㅡ난 그냥 귀엽잖아.
“또 예고 안 하고 그런다.”
ㅡ히힣. 너무 좋아, 네 목소리 듣는 거.
“나도.”
ㅡ전화 끊기 싫어.
“지금 끊으면 한 달 넘게 연락 못 하는 거야?”
ㅡ응.
“한 달은 못 버틸 거 같은데?”
ㅡ그럼 네가 숙소로 와주라.
“진짜 그렇게 해서라도 보고 싶다.”
ㅡ히잉... 나 울 거 같애.
“나 못 봐서?”
ㅡ응.
“우리 담에 보면 한 시간 동안 껴안고만 있자.”
ㅡ응. 그리고 못 나눈 얘기 쭉 하고...
“그러다 잠들고.”
ㅡ생각만 해도 좋다.
세은아 이제 좀 나와, 라고 한서연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어 언니, 라고 김세은이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ㅡ나 이제 끊어야 될 거 같애.
“더 얘기하고 싶은데.”
ㅡ나도. 근데 진짜 안 될 거 같애. 끊을게. 사랑해 온유야.
“내가 더 사랑해 세은아.”
ㅡ히힣. 내가 더 사랑해. 끊을게?
“응. 사랑해.”
ㅡ응.
전화가 끊겼다. 김세은 없이 어떻게 한 달 넘게 보낼 수 있을까, 한없이 막막해져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