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울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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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린 눈물 만큼 수치를 느끼고 마는 생물인 남자는 살면서 결코 마음껏 울지 못 해 애달프다. 그런데 난 사내답지 못 하게 정말 울고 싶은 만큼 울어버린 탓에 애달프기보다는 극히 수치스러워 차마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다.
“다 운 거 아냐?”
백지수가 물었다.
“응.”
“그럼 고개 좀 들지?”
“안 돼. 창피해서 못 들겠어.”
“야 너만 창피하냐?”
“너는 왜?”
“아니... 안 볼 테니까 일단 떨어져봐. 나 바로 등 돌리고 씻으러 갈 테니까.”
“진짜 보면 안 돼?”
“약속할게.”
“응.”
안은 팔을 풀어주었다. 백지수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일어서고는 오른손으로 내 머리가 헝클어지게 쓰다듬었다.
“으휴, 울보 새끼.”
“네가 위로해줬으니까 다섯 번까지 봐준다.”
“그래?”
백지수가 양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였다.
“이 귀여운 울보 새끼야아.”
“두 번 남았어.”
“세 번 남은 거 아니고?”
“양손이잖아.”
“어. 남은 거 나중에 알뜰하게 써줄 테니까 기억 잘 해라?”
“응.”
“언니는 이제 씻으러 갈 거니까 올라올 생각하면 뒤져요 울보씨?”
“네.”
“오구오구 말 잘 듣는다.”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정수리를 토닥였다.
“이제 한 번 남았어.”
“에이 이거 카운팅하는 건 에바지.”
“그럼 이제 더 함 깎을 거야.”
“두 번 남은 거다?”
“응.”
“어. 나 올라갈 거니까 또 우울해하면 안 된다?”
“알겠어.”
백지수가 걸어갔다.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로 가 수돗물을 틀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창피했다. 백지수의 오른 빗장뼈와 가슴에 얼굴을 얹은 채 펑펑 우는 동안 자지는 눈치도 없이 발기해 있었다. 도저히 풀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기만 해서 백지수에게도 김세은에게도 무안하고 미안했다. 왜 남자는 연인에게만 성욕을 품지 못하는 걸까, 도덕을 갈구하는 마음과 생식 전략의 간극을 메꾸지 않은 채 이뤄진 진화는 인간이라는 종을 영원히 죄악감과 양심에 갇혀 사는 죄수로 만들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주방에 가 컵을 들어 정수기로 물을 두 번 뽑아 마시고 바로 설거지한 다음 도로 돌려놓았다. 소파에 다시 앉았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누우면 수 초만에 잠들 수 있을 듯했다. 그래도 지금 잘 수는 없어서 기타 방에 들어가 기타로 세네 곡을 치며 노래 불렀다. 금세 질렸다. 기타를 내려놓고 백지수가 쓰는 베이스를 만져보았다. 백지수랑 김수원이 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며 대충 흉내만 냈다. 자기변호도 불가능할 정도로 엉터리였지만 재밌었다.
“존나 뭐하세요 내 베이스 들고?”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는지 흰 티셔츠에 검은 레깅스 차림을 하고 목에 흰 수건을 걸친 백지수가 어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뭔가 데쟈뷰다 지금.”
“데쟈뷰고 뭐고 베이스 내려 놓으세요.”
“네.”
도로 케이스에 베이스를 넣고 지퍼를 닫았다.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 본 백지수가 먼저 기타방을 나갔다. 뒤따라 나섰다. 아직 드라이기로 말리지는 않았는지 백지수의 머리는 촉촉했다.
“내가 머리 말려줄까?”
“됐어.”
“나 할 거 없어.”
“어쩌라고.”
“내가 하게 해주면 안 돼?”
백지수가 허리를 굽혀 거실에 있던 드라이기를 집고 다시 허리를 편다음 고개 돌려 나를 노려봤다.
“진짜 지랄인 거 알지?”
“그래도.”
“알아서 해.”
백지수가 드라이기를 나한테 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기 방에서 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따라갔다. 백지수가 자기 방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멀티탭 콘센트에 드라이기 플러그를 꽂고 최대로 틀었다. 왼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말렸다.
“너 머릿결 진짜 좋다.”
“어.”
“맨날 만지고 싶어.”
“존나 미친 소리할래?”
“칭찬이잖아.”
“듣기에 따라 의미 존나 달라지는 말이거든 병신아?”
“그런가?”
“어.”
“그럼 무슨 말로 대체하지?”
“말을 안 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그러기에는 네 머릿결이 너무 좋은데?”
“미친 새끼...”
장난기가 돌아 왼손 검지 끝으로 백지수의 왼쪽 뒷목을 스윽 훑었다.
“하으윽...”
목을 움츠리고 상체를 부르르 떤 백지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일단 드라이기를 껐다.
“뭐 하는데 변태 새끼야!”
“장난.”
“시발... 드라이기 내놔.”
앉은 채로 몸을 튼 백지수가 왼손을 뻗었다. 오른손을 뒤로 해서 안 뺏기려 했다.
“장난 안 칠게.”
“좆까 안 믿어.”
“진짜로.”
“너 또 하기만 하면 내쫓는다. 진심이야 이거.”
“알겠어요.”
백지수가 다시 제대로 앉았다. 드라이기를 틀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잘 거니까 스타일링 안 해도 돼죠?”
“어.”
“내일은 어떡하실 거예요?”
“내일은 네가 걱정해야죠.”
“내가 왜요?”
“네가 아침해야 되잖아.”
“아 그렇네.”
“저번처럼 호화로운 아침 기대해도 되겠죠?”
“그게 제 밑천 드러낸 거라 조금 어려울 거 같아요.”
“그러게 누가 처음부터 본실력 다 쓰래?”
“그렇다고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잖아?”
“말은 존나 잘해요, 재수 없게.”
“조금 상처 받는다?”
“아아주 미안합니다? 상처 줘서?”
“배상해주시죠?”
“내가 왜요?”
“상처 입힌 장본인이시잖아요.”
“물에서 꺼내줬더니 나더러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요?”
“상처 입힌 건 구해준 거랑 별개죠.”
“좆까세요.”
“정신적 피해 추가됐어요.”
백지수가 코웃음 쳤다.
“뭐 어떡하라고 그럼?”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고 재워주기?”
“지금도 그러는 거 아냐?”
“앞으로도 그렇게 해달라는 거지.”
“진짜 개 뻔뻔해서 정신 나가겠다.”
드라이기를 껐다.
“머리 다 말렸어요.”
“어.”
백지수가 일어나고는 침대로 가 누웠다. 플러그를 뽑고 화장대 위에 올렸다. 수건을 집고 백지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수건 1층 빨래통에 넣는다?”
“어 그래주면 고맙고. 센스 있다?”
“기본이죠.”
빨래통에 넣고 불들을 끄며 다시 백지수 방으로 갔다. 백지수는 정자세로 누워 왼손으로 그립톡을 잡고 양손 엄지로 텍스팅을 하고 있었다.
“나 네 옆에 누워도 돼?”
“진심이야?”
“응.”
“미쳤어?”
“나 아직 할 얘기 남았어.”
“... 누워.”
백지수가 침대 왼편으로 살짝 옮겨 자리를 내주었다. 오른편에서 옆으로 누워 백지수를 바라보았다. 백지수가 폰을 끄고 무드등이 있는 원형 테이블에 내려놓은 다음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 지금 나 보는 거 존나 부담돼요.”
“넌 왜 내가 너 볼 때마다 부담스럽다고 해요?”
“부담되니까요 병신아.”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 좆까. 하고 싶다던 얘기나 해. 그거 들어주려고 폰 내려놨으니까.”
“으응... 내가 엄마한테 전화 걸었댔잖아, 근데 외할아버지가 받았다고 했고.”
“수술 같은 거 들어가신 거야?”
“아니. 그냥 자고 있댔어. 핸드폰은 외할머니가 엄마 잘 때 전자파 안 받게 무조건 거실에 두게 해서 tv 보던 외할아버지가 전화 받은 거고. 요즘 잠이 부쩍 많아졌다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으응... 근데 너 병원 갔을 때 상태 나쁘지 않아 보였다면서. 괜찮으실 거야.”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 근데 외할아버지가 한숨 쉬었단 말야? 왜냐고 물어봤는데 우리 엄마 걱정된다고 했고. 근데 그거 들은 외할머니가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외할아버지는 재수 없다고 하는 게 더 재수없다고 하시고, 그렇게 둘이 말싸움하면서 전화 끊겼어.”
백지수가 흐음, 하고 입 다문 채 탄식을 흘렸다.
“두 분이 막 평소에도 싸우는 사이는 아니었단 말야. 그럼 엄마가 엄청 심각하다는 뜻이고...?”
또 목이 메여왔다. 병실에 남아 하룻밤이라도 어머니와 함께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심하게 들었다. 얼굴만 비치고 돌아간 게 죄스러웠다. 백지수가 몸을 꿈틀대며 다가와 팔을 벌렸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굳이 내가 말해야 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너무 달콤하게 들렸다.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내음과 손길의 따스함과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 모두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어머니가 너 걱정하지 말라고 밝은 모습 보여주신 걸 텐데 너 지금 이렇게 징징대는 거 아시면 슬퍼하시겠다.”
백지수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이렇게 목소리를 다채롭고 예쁘게 낼 수 있는 애인 줄은 몰랐다.
“알아, 근데 이게, 마음이 어떻게, 안 돼...”
“괜찮으실 거야.”
“진짜?”
“응.”
백지수의 속삭임을 듣고 있노라면 어머니가 정말 낫기라도 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해줘.”
“괜찮으실 거야.”
“또 말해줘.”
“괜찮으실 거야.”
“또.”
“... 그냥 네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말해줘?”
“응.”
괜찮으실 거야, 괜찮아지실 거야, 네가 눈물 빨리 그치는 만큼 더 빨리, 라고 백지수가 농담을 섞어가며 나를 달래줬다. 불안이 차츰 가셨다. 포근했다. 졸음이 몰려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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