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하소연
* * *
백지수가 다가왔다. 엉덩이를 살짝 옮겨 자리를 내줬다. 백지수가 내 왼편에 앉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오늘도 뭔 일 있었어?”
“응.”
“뭔데?”
“잿더미 나한테 주라.”
백지수가 말 없이 잿더미의 다리를 잡은 손을 풀고는 잿더미의 옆구리를 잡아 제압했다. 백지수의 허벅지와 두 손에 갇힌 잿더미는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걸 인지했는지 더는 바동대지 않았다. 양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 사이 손아귀로 앞다리를 끼워 몸을 잡아 올리고 내 허벅지 위에 안착시켰다. 잿더미가 냐아, 울고 몸을 웅크렸다. 미소지었다.
“잘 거야 잿더미?”
잿더미가 다시 냐아, 울고 하품한 다음 눈을 감았다. 자기 몸 위에 턱을 얹은 모양새가 퍽 귀여웠다.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잿더미가 골골댔다.
“얘기 안 할 거야?”
백지수가 투덜댔다. 웃었다.
“삐졌어?”
“뭐래.”
“주인 먼저 챙겨야지, 집사는 다음이고.”
“나 얘 집사 아니거든.”
백지수가 오른손을 뻗어 잿더미를 만졌다. 나도 만지고 있어서 내 왼손과 백지수의 오른손이 스쳤다. 백지수가 흠칫하더니 다시 잿더미를 만졌다. 그냥 내가 손을 뗐다.
“그냥 얘기할 수 있어?”
백지수가 여전히 잿더미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응.”
“말해줘 그럼.”
“너 나 안 귀찮아?”
백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올려다보는 각도가 절묘해서인가, 매력적이었다.
“귀찮지.”
“고마워.”
“... 존나 이상해.”
백지수가 잿더미를 만지는 걸 멈추고 자세를 똑바로 해서 앉았다.
“말해 이제.”
“응.”
잿더미를 쓰다듬으며 어디서부터 얘기할지 고민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침에 내가 집에 돌아갔잖아. 내 방 딱 들어가서 씻으려고 속옷 서랍 열었다? 근데 내가 평소 정리하는 방식이랑 다르게 있는 거야. 방 들어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누가 허락 없이 들어와서 물건들 이것저것 만진 거였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람은 새엄마 그 사람밖에 없었고. 설마 다 열어본 건가 싶어서 가족사진 담긴 액자들 숨긴 서랍도 열어봤다?”
백지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지?”
“아니, 맞아. 열어본 게 확실했어. 그나마 다행인 건 사라진 게 없었다는 거. 서랍 닫고 나서 바로 그 여자 찾아서 집 뒤졌어.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있더라. 자기가 뭘 한 건지도 모르는 거 같았어.”
“존나 순진한 척하는 거 아냐?”
씁쓸하게 웃었다.
“몰라. 척하는 건지 진짜 그런 사람인 건지. 근데 내 느낌상 진짜 그런 사람인 거 같긴 해.”
“그 사람 나이 서른 둘이라매. 그런데 모른다? 그건 멍청한 거지.”
“막 멍청한 것 같지도 않아. 그냥 방어기제로 외면해왔던 거 같애.”
백지수가 흐음, 소리를 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남의 방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서랍 뒤지지 말라고도 했고. 팔뚝 잡고 힘 주면서.”
“근데 그런다고 알아 들을까?”
“몰라. 암튼 그러고 등교하러 나왔어, 내가 전에 말한 새 여동생이랑.”
“그 싸가지 없다는 애?”
“응. 근데 걔가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아침에 엄마한테 뭐라 했냐고, 왜 그리 표정 시무룩했는지 설명하라고 하더라.”
“그 여자가 지 딸한테 얘기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 딸이 자기 엄마라고 엄청 좋아하고 그래서 괜히 나한테 좆 같이 구는 느낌? 암튼. 일단 그 여자가 뭐 얘기 안 했음 왜 나한테 그러냐고 했다? 근데 걔가 걸어오면서 나 보고 개새끼라고 말하는 거야. 평소에도 나한테 하던 욕이었는데, 그때는 진짜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나 가지고, 손목 잡고 놀이터에 끌고 가서 미끄럼틀에 강제로 앉히고 나도 무릎 굽혀서 눈높이 맞춰서 좀 심하게 받아쳤어.”
“... 뭐 어떻게 말했는데?”
“말해주기 좀 그래. 근데 그 말 듣고 걔가 울 정도였어.”
“... 그래, 네가 여자 울리게 생기긴 했어...”
“너 내 말 똑바로 안 듣고 있지.”
“아니? 완전 제대로 다 들었는데?”
“진짜?”
“어. 놀이터 끌고 가서 앉히고 심한 말해서 울렸다. 이거잖아.”
“... 맞아. 암튼. 내가 오늘 밴드부 빨리 나왔잖아, 그게 내가 그 애한테 너무 심하게 대한 거 같아서 사과하려고 좀 일찍 집에 들어간 거였어.”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가보다?”
“약간 그래. 사이가 복잡해, 많이. 그도 그럴 게, 걔는 솔직히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잖아. 자기 엄마 챙기는 건 딸이니까 할 수 있는 거고, 죄 지은 것도 걔 엄마고 걔는 그냥 싸가지만 없던 거였으니까.”
“그렇긴 하네... 그래서 사과는 받아줬어?”
“아니. 문 두드렸는데 잠가놓고 꺼지라고만 하더라. 내 방에 돌아가서 씻으려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주방에 있던 그 여자가 불렀어.”
백지수가 질색했다.
“낯짝 얼마나 두꺼운 거야 그 사람은? 배알도 없나?”
“그냥 회복이 빠른 거 같애.”
“... 야.”
“응?”
“너 은근 그 여자 감싸고 도는 느낌 든다?”
“...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거야.”
백지수가 팔짱을 꼈다.
“알겠어. 그 다음은 어떡했는데?”
“여동생이랑 무슨 일 있냐고 묻더라. 아침에 욱해서 화내 가지고, 지금 사과하려고 하는데 안 받아준댔지. 그 여자가 그래서 어떡하지, 이러길래 화해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어.”
“... 도와달라고 한다고? 네가 생각해도 존나 이상하지 않아?”
“대화의 흐름이란 게 있잖아. 내가 굳이 말 안 꺼냈어도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이랬을 걸. 거의 백 퍼센트로.”
“... 계속 얘기해봐.”
“씻고 나와서 식탁 앞에 앉았어. 오늘 화나서 못된 말한 거 용서해달라고 말 꺼냈고. 근데 새 여동생은 또 못된 말 같은 말로 포장이 되냐면서 화내고.”
“도대체 뭐라 했길래 그러냐?”
“알고 싶어?”
“어. 알아야 내용이 이해될 거 같은데?”
“개새끼라는 욕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는 뜻이 함의된 말이라고, 나보다는 너한테 어울리는 욕이라고 말했어.”
“... 어.”
“좀 많이 심했지?”
“난 그 여동생이 평소에 어떻게 말해왔는지는 모르니까, 라고 실드쳐주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선 넘는 말이긴 하네.”
“그니까.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던 거야. 암튼. 근데 그 여자가 자기 딸 다그치더라. 넌 맨날 오빠한테 욕하면서 오빠가 이번에 욕 한 번 하고 사과까지 하고 있는데 안 받아주는 게 뭐냐면서. 사과 받아주고 반대로 사과도 하라고 하고. 걔가 억지로 꾸역꾸역 말하다가, 이 새끼도 나한테 욕한단 말야 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그 말한 거까지 사과하라면서 몰아붙이더라. 그 말 듣고 여동생이 서러워서 왜 오빠 편만 드냐고, 자기 딸 나 아니냐고 하면서 울음 터뜨리고 자기 방으로 도망쳤어. 그거 보면서 그 여자도 당황해 가지고 달래주러 간다고 일어나고.”
“개판이네.”
“난 자리에 남아서 밥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그 여자가 나와서 자기 딸한테서 내가 무슨 말했는지 들었다고, 그거 사실이냐고 하더라.”
“그렇다고 했어?”
“응. 오해가 있는 거 같다고 설명하겠다고 하더라.”
“오해는 무슨 오해?”
“자기 창녀나 꽃뱀 아니라고.”
“미친 년 아냐? 유부남 꼬셔 놓고 꽃뱀 아님 뭐야?”
“그니까 그 여자가 우리 아버지가 유부남인 거를 여태 몰라왔던 거야.”
“말이 돼?”
“신기하게 그게 되더라. 아버지는 아내 있다는 거 그 여자한테 안 알려 주고, 그 여자는 아버지 가지고 싶으니까 부인 있는지 없는지도 안 물어 보고. 그래놓고 하는 변명이 자기한테 접근하는 거 보고 당연히 아내랑 이혼한 줄 알았다고 생각했대.”
“존나 이기적이네. 그런 사람은 맞아야 정신차리는데.”
“...”
“진짜 때렸어?”
“그, 약하게 뺨 두 대씩 쳤어.”
백지수가 경악했다.
“얼굴 부어오를 정도로 때리지는 않았지...?”
“응. 그냥 잠깐 얼굴 붉어질 정도?”
“으응...”
“나 좀 폭력적인가?”
“다른 사람한테 손찌검한 적은 없지?”
“안 하지. 싸움 제지하려고 밀친 적은 있어도. 적어도 여자한테는 손 안 댔어. 이번에 그 여자 때린 거만 빼면.”
“다행이네.”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주먹 휘두르고 다니는 양아치는 아니니까. 죄책감도 느끼고.”
미소지었다.
“고마워.”
“... 너 내일은 집에서 잘 수 있겠어?”
“계속 신세질 수는 없잖아.”
백지수가 왼다리를 팔걸이에 걸쳐 왼발로 캐리어를 툭툭 쳤다.
“그럼 이 캐리어는 뭔데.”
“그래도 가끔 올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미리미리.”
백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개 뻔뻔하다 너.”
“너 말고 다른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그 말이 나 호구 잡았다는 거밖에 더 돼?”
“나한텐 너밖에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
백지수가 왼다리를 거둬서 제대로 앉는 듯하더니 오른다리를 올려 나를 발로 차려고 했다. 두 손을 뻗어 수동적으로 막았다. 잿더미가 있는 탓에 공격도 방어도 자유롭지 못 했다. 결국엔 백지수가 먼저 다리를 내려놓으면서 끝이 났다.
“너 존나 말 잘 골라서 해라 진짜.”
“알겠어.”
“하... 오늘은 소파에서 잘 거지?”
“침대에서 재워주면 좋고.”
“필요해 안 필요해, 그것만 딱 말해.”
일단 고개를 살짝 숙여 오른손으로 잿더미를 쓰다듬으면서,
“필요하냐고...”
라고 읊조리고 빠르게 궁리했다. 당장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백지수는 왜 필요한지 설명하라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답할 게 궁한 나는 결국 소파에서 자게 될 것이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려면 어떡해야 할까. 잘 때가 되어서 물어보면 날 내쳐야 속이 시원하겠냐며 내가 역으로 추궁할 수 있지 않을까.
“... 잘 때 되면 말할게.”
“... 어. 나 2층 올라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라.”
“응.”
백지수가 계단을 올랐다. 잿더미는 내 허벅지 위에서 계속 잠들어있었다. 옆구리를 매만졌다. 보드라운 털을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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