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진실
* * *
“윤가영씨.”
“... 응...?”
“우리 엄마 이혼한 거 당신 때문이야.”
“...”
윤가영의 눈이 커졌다. 혐오감이 들었다.
“진짜 몰랐어?”
입을 벌린 윤가영이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건가, 진짜인지 의심됐다. 식탁에서 본 연기력을 지금도 쓰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혼란스러웠다. 윤가영은 정말 몰랐을까?
“내 서랍에서 액자 봤죠.”
“... 응.”
“그거 보고 뭔 생각 들었어요?”
“뭔 생각이라니...”
열이 솟아올랐다.
“액자 속의 내 얼굴이 지금 내 얼굴이랑 크게 달라? 가장 최근 게 2년 전 거야. 그때면 우리 아버지랑 아는 사이였지?”
“...”
“토요일에, 버스킹하는 날에 엄마가 왜 당신 얼굴 보고 도망쳤을까 생각 안 해봤어?”
윤가영이 입을 뻐끔댔다.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해서 뚫어져라 노려봤다. 윤가영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 미안해...”
머리가 팔팔 끓어올랐다. 일어섰다. 윤가영의 코앞으로 갔다. 윤가영의 몸과 얼굴 위로 내 몸 모양의 그림자가 졌다. 윤가영이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올려다봤다. 하얀 목에 두 손을 가져다댔다. 자제력을 발휘해 조르지는 않았다. 윤가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이혼했다고 얘기라도 했어? 윤가영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대답해. 얘기를 안 했어... 무슨 뜻이야? 아내가 있다고 한 적이 없었어... 아들 있다는 거는 알았어? 응... 너는 안 물어봤어? 부인 있는 거 아니냐고? 나느은... 준권씨가 나한테 다가오는 거 보고 당연히 이혼한 줄로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기를 바랐겠지. 가지고 싶었으니까 일부러 직면하지 않으려 했던 거야 너는. 온유야... 주말이랑 오늘만 해도 그렇잖아. 잠깐만 곱씹어도 유추할 수 있는 걸 몰랐다는 건, 아버지한테 아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네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외면했고,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방증이 되는 거잖아. 윤가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미안, 히꾹, 미안해애... 쓰다듬듯이 오른손을 올려 윤가영의 왼볼을 만졌다. 윤가영이 흠칫 떨었다. 온유야아...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읽혔다. 윤가영은 나를 남자로 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하면 끝나? 너한테 밀려나고 우리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는 알아? 서울을 못 올라와. 콤플렉스 생겨서 밥 먹다가 토하고. 네가 방 안에서 향초 태우고 이준권한테 다리 벌린 채로 보지 쑤셔지면서 앙앙 울어댈 동안에 우리 엄마는 잠들지 못 해서 다크서클이 졌다고. 윤가영이 눈물을 글썽였다. 성욕이 끓었다. 눕혀서 바지를 끌어내리고 나를 쏟아내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은 감각이었다. 오른손을 올려 약하게 뺨을 한 대 쳤다. 윤가영이 왼손을 올려 볼을 비볐다. 히꾹, 미아내애... 왜 엄살이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파... 히꾹, 아파아... 우리 엄마는 안 아팠고? 윤가영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윤가영이 뒤로 쓰러졌다. 두 손목을 잡고 윤가영의 어깨 옆으로 올려서 밑으로 눌렀다. 윤가영이 몸을 바둥대려고 했다. 움직이는 건 가슴밖에 없었다. 자지가 바지를 뚫고 나오기라도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충분할 거 같아? 하지, 히꾹, 마아... 미아내애... 잘모태써어... 오른손을 떼고 뺨을 한 대 다시 친 다음 도로 왼손목을 잡았다. 윤가영이 더는 버둥대지 않았다. 어떡할래? 히꾹, 미아내애... 용서, 히꾹, 용서해저어... 사과받을 사람도, 용서해줄 사람도 내가 아냐. 소연씨한테, 내가, 히꾹, 사과드릴게에... 왼볼에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게 보였다. 이번엔 왼손을 떼고 오른뺨을 때린 다음 도로 왼손목을 잡았다. 토요일에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 안 나 미친 년아? 너 때문에 엄마가 도망쳤다고, 그래서 찾아가는 게 말이 되냐고 했는데. 그걸 기억 못 해? 심지어 아까도 말해줬잖아. 죄송해요오... 잘모태써요오... 입술을 덮치고 싶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또 오른뺨을 때렸다. 윤가영이 울었다. 아프지? 아파아, 아파요오... 하아악... 윤가영의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부풀었다 내려가는 가슴으로 시선이 가서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마주하다가는 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일어섰다. 문 쪽으로 갔다가 뒤돌아 입을 열었다.
“뭔 일 있었어요? 방금까지.”
윤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뭔 일 있었냐고요? 일어나요 빨리.”
윤가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두 대씩 약하게 친 두 뺨과 내가 쥐고 있던 양손목이 빨갰다.
“뭔 일 있었어요?”
“... 네가, 윽, 내 얘기, 히꾹, 들어줬어.”
“뺨 화장으로 가릴 수 있어요?”
“히꾹, 응...”
“알아서 잘 숨겨요. 손목 가릴 만한 긴팔 입고.”
“... 응.”
등 돌렸다.
“오늘도 따먹힐 거면 손목도 감춰보시고.”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잠시 멈춰섰다. 문 틈새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 쪽으로 달렸다. 가는 도중에 주방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수아가 보였다. 이수아도 나를 봐서 눈이 마주쳤다. 뭐라 하지 않을까 긴장했는데 이수아가 바로 눈을 돌렸다. 하긴 나랑 얘기하기는 싫었을 거였다. 다행이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팬티와 함께 바지를 내렸다. 화장실에 들어가 왼손으로 벽을 짚고 김세은을 뒤에서 박는 상상을 하며 자위했다.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잡고 왼손으로 김세은의 엉덩이를 때렸다. 김세은이 하윽, 아파아, 라고 했다. 상체를 밀착시키고 두 손을 올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김세은답지 않게 커다랬다. 키스하고 싶어서 왼손으로 턱을 잡고 뒤돌아보게 했다. 눈물 흘리는 윤가영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애, 라고 말하는 입술을 덮쳤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정액을 싸질렀다. 한숨이 나왔다. 벽에 머리를 세 번 박았다. 자지를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왔다. 팬티와 바지를 도로 입고 폰을 들어 백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도 신세 좀 져도 될까요?]
바로 답이 올 거 같지는 않아서 주머니에 넣고 짐을 쌌다. 사실 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냥 옷이랑 생필품 조금을 집어넣은 캐리어에 학교 가방이랑 기타 케이스를 챙기는 게 끝이었다. 다시 폰을 봤다. 백지수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너 존나 여기서 살 작정 아니지?]
[독심술사세요?]
[지랄하지 마]
[전화 받아라 미친 새끼야]
백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았다.
ㅡ장난치지 마라. 진심이다 지금.
“나도 진심인데.”
ㅡ진짜 지랄하지 말라고오...
“나 집에 못 있겠어.”
ㅡ하아...
“오늘만. 딱 오늘만 재워줘.”
ㅡ오늘만이야. 더 억지 부리면 그땐 진짜 뒤져.
“응. 나 지금 간다?”
ㅡ언제 도착하는데?
“모르겠어.”
ㅡ한 시간 정도 뒤에 와. 그럴 수 있지?
“알겠어.”
ㅡ끊는다.
“응. 고마워. 사랑해.”
ㅡ... 지랄...
전화가 끊겼다. 마지막 말은 괜히 했나. 반응을 보면 백지수도 별 뜻 없다 생각하고 넘긴 듯하니 이걸로 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등이 조금 가렵기는 했다.
텍스팅을 하다가 택시를 부르고 밖으로 나섰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뒷좌석에 편히 몸을 기댔다.
“어디 공연 가요?”
“아뇨. 저 고등학생이에요.”
“아 학생이에요? 근데 그 캐리어를 갖고 있어서. 난 또 어디 투숙하면서 공연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기사 아저씨는 그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궁금해 할 법도 한데, 자제력이 좋으신 분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백지수의 자취방으로 향하는 시간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두드드, 전화가 왔다. 이수아였다. 받았다.
“왜.”
ㅡ어디 갔냐.
어투가 까칠하고 퉁명스러웠다. 아직 토라진 듯했다.
“밖. 왜?”
ㅡ왜는 왜야 엄마가 물어봐서지, 내가 궁금해하겠냐 병신아?
“어.”
ㅡ그럼 밖에서 자는 거냐?
“응.”
ㅡ좆 같이 단답만 할래?
“어쩔.”
ㅡ개... 좆 병신 새끼.
“끊어.”
ㅡ그래 노숙자 새끼야.
전화가 끊겼다. 문자를 보냈다.
[노숙자 ㅇㅈㄹ]
[밖에서 잔다매]
[친구네에서 자는 거지 미친 년아]
[ㅇㅉㄹㄱ]
[ㄲㅈ]
[ㄴㄴ]
[ㄴㄴ는 뭔 뜻이냐?]
[너나]
[ㅁㅊㄴ]
[ㅁㅊㅅㄲ]
반응을 보니 윤가영이 입단속을 잘한 듯했다. 윤가영이 침울한 모습을 보이거나 했다면 또 증오 섞인 지랄을 해댔을 게 뻔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바퀴는 꾸준히 굴러 어느새 택시가 백지수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나온 뒤 짐들을 꺼낸 다음 트렁크를 닫았다. 백지수에게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두 번 갔는데 끊겼다. 문자가 왔다. 백지수였다.
[다짜고짜 전화하지 마.]
[알겠어. 나 지금 도착했어.]
[3분만 기다려.]
[응.]
가방은 등에 메고 캐리어는 대문 앞에 둔 채 기다리고 있는데 냐옹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 잿더미가 있었다.
“잿더미.”
잿더미가 고양이 특유의 도도하고 사뿐한 발걸음으로 총총총 다가왔다. 무릎을 굽혔다. 내 앞에 온 잿더미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잿더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곧 대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고개를 돌려봤다. 백지수가 어이 없다는 눈을 하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백지수를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지었다.
“지수야. 잿더미가 나 좋은가봐.”
“... 캐리어 뭔데?”
“내 옷.”
잿더미가 대문과 백지수의 다리 사이로 돌진했다. 잿더미의 털이 스치는 것을 느낀 백지수가 뒤돌아봤다. 잿더미가 현관으로 입성했다.
“야! 잿더미!”
백지수가 안으로 뛰어들어가 신발을 벗고 잿더미를 추격했다. 피식 웃고 짐을 챙겨 안으로 들어가 대문과 현관문을 닫았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백지수의 별장은 향기로웠다. 어제 백지수의 품에 안겨 맡은 살내음과 빨래하고 잘 말린 옷의 냄새 비스무리한 것이 공기를 채웠다.
기타방에 케이스를 내려놓고 소파 옆에 캐리어와 가방을 두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잿더미를 품에 안은 백지수가 2층에서 내려왔다. 왼앞다리와 오른 뒷다리가 붙잡혀서 배를 까보인 잿더미가 백지수의 품에서 계속 몸을 꿈틀댔다.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소파에 등을 묻었다. 너무 안락했다.
* * *